문스독/다자츄

[다자츄] 십이국기.3

송화우연 2017. 11. 17. 21:40
“궁내부에서 쓸데없이 낭비하던 땅들을 전부 경작지나 거주지로 바꾼 건 좋은데 누가 이렇게 생각 없이 전부 없애버리라고 했냐.”
잔뜩 펼쳐있는 종이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츄야는 정말로 최소한의 것만을 남겨둔 궁의 지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을 받은 다자이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당연히 별채도 있고 두어 개 남는 궁도 있으니 상관없지 않나.’라고 말하며 진지하게 종이를 펄럭거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회의나 나라가 돌아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네 마음대로 다 처리한 걸 왜 다시보라고 하는 거야.”
츄야는 턱을 괸 채로 노골적이게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그의 행동에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내려두었다. 그런 츄야의 반응도 상관없다는 듯이 웃던 그는, ‘괜찮다네. 아름다웠던 궁들을 골라 놓았고 연못도 내버려두었으니 외국의 대신들도 좋아하지 않겠나. 나는 그저 쓸모없는 것만을 없앤 거라네.’라고 태평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츄야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이 아침에 시동이 아름답게 꾸며주었던 머리장식을 전부 내리고 갈기와 같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츄야는 히죽거리면서 모든 반박을 쳐내는 다자이를 상대하려니 여간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닌지,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체념하듯 말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마. 나중에라도 빈이나 황후를 들일 걸 생각 하면...”
‘츄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다자이는 그를 불렀다. 츄야는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 섬뜩할 정도의 냉기를 느꼈다. 말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다자이를 응시하던 츄야는, 다시 유하게 웃어오는 그의 미소에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이호께서는... 후궁을 수없이 거느리고도 만족할 수 없어 건드리면 안 될 사람마저 건드린 전 황제를 보며 무엇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존칭에서는 무게가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어깨를 잡아 누른 듯한 압박감에 츄야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이 동요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다자이에게 보이기 싫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이 겨누어지는 듯한 그의 말에도, 차마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츄야, 나는 그저 자네 하나 뿐이야.”
다자이가 천천히 그에게 손을 뻗어 숙인 그의 고개를 천천히 들게 만들었다. 츄야는 그가 고개를 들어주었음에도, 이로 입술을 물고 고집을 부리듯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다자이는 그런 그를 빤히 응시하며 ‘그리고 이 나라는 자네나 다름이 없고.’라고 대답하고는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츄야는 그런 그의 말에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왕은 너야.’라고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자네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테니까.”
풀어진 츄야의 머리칼이 창호지 너머의 빛에 비쳐져 반짝거렸다. 다자이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난 황후도 후궁도 필요 없다네.’라고 대답했다. 츄야는 짜증난다는 듯이 ‘내가 먼저 죽을 테니 평생 통치하소서.’라고 대꾸하고는 남은 종이들을 전부 말아 그가 서류를 쌓아두는 곳에 던져두었다. 신경질 적인 그의 행동에 키득거리던 황제는 이제 일어나보겠다는 그의 말에 ‘아직 안 되지. 오찬 시간은 아직 멀었는걸.’이라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앉혔다. 그의 말에 자신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친 츄야는, 밖에 서있는 상선의 그림자를 흘긋거리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츄야는 자신을 위해 그의 심기가 자신의 외에 다른 곳에서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인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다자이는 그런 츄야의 불안함이 있는 그대로를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츄야, 있던 곳에서는 피 냄새가 나던가? 오는 길에 난민이 보이던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츄야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헤실헤실 웃던 다자이는 ‘아마 없을 거라네.’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의 말대로, 국경근처에서 넘어 오던 중에도, 수도에 도착해서도 피 냄새나 역한 악취라고는 느낄 수가 없었다. 전 황제의 손에 더럽혀져 악몽 같았던 도시는, 새로 태어나기라도 한 듯 밝고 화사했다. 츄야는 작게 ‘없었어.’라고 중얼거리고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점점 떨어뜨렸다.
“다시는 자네의 몸에, 그런 표식이 새겨지는 것을 바라볼 수가 없다네.”
검붉은 색의 얼룩과도 같은 실도의 흔적. 되돌아오는 것마저도 고통스럽던 그 흔적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새겨졌다. 츄야는 그의 말에 ‘네가 이미 실도한 인간과도 같으니 이미 내 목숨은 화롯가에 놓인 종이 신세군.’이라고 대꾸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해가 벌써 나무를 넘어간 것인지 그림자가 창호지 너머로 비춰졌다. 츄야는 다자이의 시선을 무시하기 위해 그 창호지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나라의 일을 했을 뿐이고, 나라의 일은 곧 자네의 일이지.”
‘난 부탁한 적 없어.’ 다소 공격적이게 대꾸한 츄야는 차라리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었다면 새로운 기린이 왔을 거라며 중얼거리곤 점점 흘러 내려오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노을과도 같은 머리칼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다자이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츄야가 뭐하는 짓이냐며 호통이라도 치려했던 찰나, 다자이가 그의 손을 끌어 저의 뺨에 대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행동에 자신의 손을 빼려던 츄야는  ‘자네가 없다면 이 나라를 살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는 다자이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이제는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츄야는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 근처의 옷자락을 꽉 쥐어오고는,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며 그를 밀어내었다. 다자이는 밀린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일어서고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무릎을 세워 앉아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그리고 그를 품에 가두 듯 안아오며 그의 등 뒤의 풍경을 가리고 있는 창의 문고리를 살짝 당겼다.
“그대 말고 다른 기린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 이 풍경만을 보아도 내가 자네를 생각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다자이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창문을 열고는 바로 보이는 츄야의 처소 주변을 감싼 붉은 동백나무의 장관을 보여주었다. 그 붉은 파도가, 전 황제가 일으켰던 피바다와도 같은 모양새여서 인지, 츄야는 그 황홀한 풍경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