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츄]퇴역군인x소아과 의사
알레프님의 썰을 보고 쓴 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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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은 침대도, 가장 푹신한 베개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허용치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수면제만이 잡생각을 덜어주었다. 자리가 너무 푹신해서일까, 아니라면 현실이 꿈같아서 일까. 나카하라 츄야는 차라리 전쟁터 한가운데가 더 잠이 잘 왔다고 중얼거리며 이불을 풀썩거리며 뒤척였다. 스탠드 빛 사이로 보이는 날이 서있는 나이프와 만일을 위해 같이 놓아둔 베레타를 보아도 곤두선 신경은 가라앉지 않았다.
“...망할 의사 놈...”
애꿎은 의사 탓만을 하며 혀를 차던 나카하라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일출에 더욱 불평불만을 쏟아내었다. 5시...결국 잠은 못 잤군. 기계적으로 일어난 나카하라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욕실로 향했다.
***
“젠장...”
나카하라는 벌써 5개비 째의 꽁초를 바닥에 바리고 발로 짓이겼다. 피어오르던 담뱃불은 희미한 연기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듯이 맞은 편 대학병원을 바라보던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병원 안으로 터덜터덜 향했다. 잠 부족으로 퀭해진 눈과 다크 서클,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미간 주름은 모두가 그를 피하게 만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병원 로비로 들어선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답답함에 다시 병원 자동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여유롭게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의사는 이제 이것이 일상이라며 익숙해져 보라고 하였지만, 바로 옆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귀가 먹먹한 상태로 싸우는 일상을 반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평화군 이라 부를만하네.”
자신이 최전선에서 돌아왔을 때, 훈장으로 수여했던 국회의원이 나카하라와 그의 부대에게 칭했던 말이다. 총질하고 사람 죽이는 부대에게는 걸맞지 않는 이름이었다. 나카하라는 병원을 차마 나서지는 못한 채, 병원 뒤에 있는 정원으로 향하며 다시 담배가 든 케이스를 꺼냈다. 나카하라는 조용한 정원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담배를 물었다.
“여기 금연인데.”
나카하라는 지포 라이터를 꺼내든 순간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인 것은 베이지색 카고 바지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꽁지머리를 묶은 채 막대사탕을 물고 있던 수려한 남자였다. 흰 가운은 그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 했다. 나카하라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었던 담배를 다시 케이스 안으로 넣었다.
“엄청 피곤해보이시는데 ER? 아, 사복인거 보니까 환자인가.”
혼자 나불나불 대던 의사는 ‘옆에 앉아도 되요?’라고 물어보고는 고개를 숙여 나카하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뭐지 이 성가신 놈은. 입에 있던 담배가 사라지자 허전한지 입맛을 다시던 나카하라는, 그의 물음에 자신이 일어나서 ‘이제 됐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의사는 재미있는지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뭔가 놀림 받는 느낌이 드는 얼굴인지라 한 대 치고 싶다고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그가 딸기맛 사탕을 건네자 그것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담배 못 펴서 아쉽잖아요. 저는 다자이 오사무, 여기 소아과 근무해요.”
‘근데 그쪽은 진료 다 받은 거예요?’ 날치기 같이 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혼자 친한 척은 다하고 있는 다자이의 모습에 나카하라는 더욱더 담배가 생각났다. 이런 놈은 군대에도 없었는데. 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리던 그는, 다자이가 ‘정신과는 3층이에요. 오늘은 사람 별로 없으니까 예약 안 해도 갈 수 있을 것 같던데.’라고 하는 말에 미간을 좁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순간적으로 튀어 나갈 뻔 한 짧은 말을 가다듬으며 물은 나카하라는 다시 한 번만 더 저 면상이 히죽거린다면 정말 한 대 치자고 생각하며 그의 멱살을 잡을 준비를 했다. 다자이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다가, 그의 살벌해 보이는 표정에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예전에 뉴스에 나왔던 평화군부대 나카하라 소령. 맞나? 제가 그때 유심히 봤었거든요.”
‘높으신 분들 다 계시는데서 그렇게 인상 쓴 채로 설명하고 깽판치고 나온 사람 처음 봤어요.’ 나카하라는 기억 속에 남지도 않았던 일을 다시 상기시키며 그를 잡을 준비를 했던 손을 내렸다. 그 뉴스라면 온 국민이 다 보았다고 말할 만큼 이슈가 되었었고, 그 일로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 어차피 은퇴 할 생각이었으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나카하라가 손을 내리자 다자이는 이제 안심이라는 듯 숨을 내쉬며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의외네. 의사 양반까지 그런 뉴스를 챙겨보고.”
나카하라는 입안 구석구석까지 퍼지는 단맛이 거슬리는지 사탕을 씹어 삼켰다. 으적으적 소리가 들린 것도 금방, 남은 막대만을 잘근거리던 나카하라가 말했다. 다자이는 피식 웃으며 ‘다들 궁금해 했으니까요. 이길 싸움이라 해도 전쟁은 전쟁이니까.’라고 대꾸하며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벽에 등을 기댔다. 나카하라는 잘근거리던 플라스틱 막대를 꺼내고는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병원을 가기는 글렀으니 오늘은 수면제 두 봉을 한꺼번에 먹어볼까라고 멍하니 생각하던 그는, 다자이의 이어지는 말에 그대로 아까 내렸던 주먹을 다시 쥐어 들었다.
“물론 그건 동료들 이야기고. 나는 그쪽 얼굴이 좀 취향이라 끝까지 봤었는데. 화려하게 생겨서 왜 군인이지 했는데, 깽판 치는 거 보고 성격 더러운 것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날라드는 주먹은 그에게 피할 새조차 주지 않았다. 그대로 뻗어버린 다자이는 그 사이 누가 발견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발견되지 못했겠지만, 그건 나카하라의 알바가 아니었다.
***
“아야야...”
다자이는 쿠니키다가 건넨 얼음 팩을 받아들고는 뺨에 문질렀다. ‘군인이 이렇게 주먹을 막 쓰면 어째...’라고 중얼거리던 그를 보며 쿠니키다는 자업자득이라며 혀를 찼다.
“방금 나에게 말한 게 사실이라면, 넌 한 대로 끝나서 다행인거다. 나카하라 환자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이 세계를 통틀어서 없을 테니까.”
쿠니키다는 멍이 들것같이 붉어지는 다자이의 피부를 확인하고는 ‘피도 안 나는데 어서 니네 병동 가라.’라고 말하며 그에게 손짓했다. 다자이는 그런 그에게 너무하다 중얼거리며 쿠니키다에게 징징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나카하라씨는 왜 자네에게 직접 치료를 받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면 우리 병원에는 제대한 군인들 전문 복지센터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될 텐데.”
한참 얼음찜질을 하던 다자이는 녹은 얼음주머니를 주무르며 그에게 물었다. 확실히 다른 제대 군인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 모임을 가지거나, 치료를 받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이 병원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그 건물로는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쿠니키다는 환자에 대해 이리저리 말하고 다니는 것은 의사의 도리로써 어긋난다고 그에게 말하며 질문이 많은 그를 내쫒았다. 눈 깜짝할 새에 얼음주머니만을 가지고 휴게실에서 쫓겨난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소아과로 향했다.
***
마구잡이로 날아다니는 총알이 벽을 꿰뚫는 소리가 났다. 부서지는 벽 사이로는 부하들이 죽어나갔고, 국가 평화 안전 유지군의 상징인 배지를 단 시체들이 땅에 즐비했다. 총소리가 점점 잦아들 무렵, 나카하라는 벽 너머를 바라보며 빠르게 총을 장전했다. 그리고 팔을 관통한 총알에 의해 그대로 몸이 고꾸라짐과 동시에, 그는 땀범벅인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고, 수면제를 먹으면 이런 기분 더러운 꿈밖에 못 꾼다니. 나카하라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마른 입술을 잘근 거렸다. 어떻게 버텼냐는 물음에 그저 익숙해졌다고 말했지만 이런 지옥 속에서 익숙해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카하라는 마치 아직까지 시체들이 보이는 듯한 느낌에 뭉쳐져 있는 이불들을 전부 펼쳤다. 그래도 꽤나 잤는지, 창밖에서는 동이 트고 있었다. 하지만 푹 잔 것과는 거리가 먼 수면이었기에, 나카하라는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다시 몸을 뉘였다. 그의 옆에는 항상 놓아두는 나이프와 베레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전투 속에서 다친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어째서 항상 총상의 기억은 항상 무덤에서 기어 나오듯 생생했다. 드러난 팔에 보이는 흉터를 문지르던 나카하라는 다시 자기는 글렀다 생각한 것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군인 생활을 오래 했었던 그인지라, 군대를 제대한 지금도 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제대 첫날에는 침대가 어색해 바닥에서 잘 정도였으니 말이다. 동네를 뛰어 조깅을 하던 그는, 얼마나 왔는지 가늠도 되지 않아졌을 때야 뜀박질을 멈추었다. 해가 중천이 되자 사람들이 슬슬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다시 방향을 틀어 돌아가려던 나카하라는, ‘나카하라씨?’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이른 아침에 뭐하세요? 설마 나카하라씨가 편의점 가시려는 건 아닐 테고....아 운동이신가?”
시퍼렇게 멍을 달고 있는 다자이가 그에게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나카하라는 안 그래도 예민해 보이는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또 맞고 싶습니까?’라고 그에게 물었다. 다자이는 그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내밀며 ‘저 오늘 금쪽같은 휴가 첫 날인데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가 쉬고 있는 벤치 옆에 낼름 앉은 다자이는, ‘요 근처 사시나봐요?’라고 물었다.
“여기 어디지. 저 D구역 쪽으로 가야하는데."
다자이는 ‘엑, 여기 B구역이거든요? 여기까지 뛰어온 거예요? 와 나카하라씨 완전 괴물이네.’라고 대답하며 방금 산 것인지 물방울이 맺힌 물을 그에게 건넸다. 나카하라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어 그대로 물 한통을 비워버렸다.
“원래 남이 주는 거 그렇게 잘 받아먹어요? 저번에 사탕도 그렇고.”
다자이의 물음에 나카하라는 ‘이제 죽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조심해야 할 이유라도?’라고 대꾸하며 그가 준 물통을 구겨버렸다. 하긴. 다자이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가 구긴 물통을 옆에 있던 쓰레기 통으로 던져 넣었다.
“나카하라씨 부하들은 나카하라씨가 제대해서 슬프겠는데요.”
다자이는 물과 함께 샀던 주전부리인지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꺼내 물었다. 나카하라는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아쉬워할 부하들 다 죽었는데 무슨 소리인지.’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자이는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사과했다. 나카하라는 손을 내저으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말하겠어. 괜찮아.’라고 답했다.
“그런데 말이 짧아졌네?”
나카하라는 ‘아, 내가 한 대 때렸다고 당신 만만하게 봐버렸네. 이참에 그 쪽도 말 놔.’라고 답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보면 볼수록 그가 군인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다자이였지만, 굳은살이 잔뜩 있는 마디 굵은 손과, 땀이 흐르는 목덜미에 있는 흉터들이 그가 얼마나 많은 훈련과 전투에 임했는지 보여주는 듯 했다.
“츄야.”
나카하라는 잠시 사고회로가 멈추는 것 같았다. 뭐?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그에게 확인 차 되물은 것인데도 굳은 인상이 펴지질 않았다. 하지만 다자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지, 여유로운 웃음을 띠고 ‘츄야. 라고 불러봤네만.’이라 대답할 뿐이었다.
“...저번부터 생각한 거지만 네가 내 부대에 있었으면 진짜 좆 빠지게 굴렸을 거다.”
나카하라가 한숨을 쉬며 내뱉은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던 다자이는 ‘내가 군인 안 해서 다행이네.’라고 말했다. 츄야라니. 자신의 부모님이 아닌 이상 남에게서 들어 본적 없던 자신의 이름이 두 번 만난 남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기분이 묘했다.
“츄야는 내 이름 기억하나?”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나카하라는 멍하니 그를 응시하다 시선을 돌렸다. 다자이는 뺨을 그렇게 쳐놓고 이름도 기억을 못했냐며 툴툴대었지만 다시금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카하라의 귀에 박히게 몇 번을 말하고, 절대 잊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던 다자이는, 그가 귀찮아 할 정도로 유난을 떤 뒤에야 떨어졌다.
“그래, 다자이. 다자이 오사무.”
나카하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에게 확답했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친해진 김에 뭐 좀 더 물어보자며 질문을 던졌다.
“잠 안 오지? 수면제는 먹는데 잘 안 듣고.”
‘눈만 봐도 알겠는데 뭐.’귀신같이 알아맞히는 다자이의 말에 말없이 앞만 보던 나카하라는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술은 많이 마시나? 좋아 할 것 같긴 한데.’ 다자이가 맞는 말만 쏙쏙 골라내 말하자 피식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음날 머리 아파서 자주는 안 마신다. 그거 기분 더럽거든.”
자신이 생각한 대로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다자이는 ‘그럼 오늘 마실까? 나 3일 휴가라 시간도 많은데.’ 물었다. 지금 시각, 이제 막 오전이 지난 이른 오후. 제대하여 밖을 나다녀본 적 없는 퇴역군인과 매일매일을 병원에서 생활하던 의사. 두 사람이 이 시간에 열린 술집을 찾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이미 시내를 한 바퀴 돈 뒤였다.
“야... 그냥 우리 집 가.”
이제 하다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집까지 닫혀있는 것을 본 나카하라가 말했다. 이쯤 되면 오기가 생겨서 꼭 마셔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눈앞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그와 함께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각종 선물 받았던 것들이 어디 있는지 생각하던 그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내려 술을 더 담았다. 다자이는 그저 집에 술이 없으니 샀다고 생각했지만, 나카하라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상자 꾸러미들을 내려 술병을 꺼내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두르며 ‘이걸 다 마셔? 츄야 말술인가보네.’라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 칭찬을 오래 못가 깨졌는데, 나카하라가 그 많은 술 중, 와인 한 병을 다 해치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
“츄야, 남자랑 자본적 있어?”
술기운이 알딸딸하다 못해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뭐라는 거냐고 되물어가며 그와 대화를 나누던 나카하나는 ‘왜, 나랑 자고 싶냐?’라고 물으며 평소에는 굳이 하지 않을 말들을 그에게 내뱉었다.
“군대에 있으면 별별 놈이 다 있어서 너는 놀랍지도 않다. 아, 나도 그 별별 놈 중 하나지만.”
‘자고 싶으면 네가 꼴리게 해보던가.’ 다자이는 술기운에 게슴츠레 뜬 그의 눈이 야릇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다자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며 거리를 좁혀오자, 눈을 감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입 맞춰 오는 그의 입술을 맛보듯 한입 베어 물었다. 다자이는 그런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리를 안아 몸을 밀착시켰고, 나카하라도 다자이의 양 뺨을 감싸 잡으며 입안을 헤집었다.
“시발...”
깨질 듯한 나카하라의 기억은 그곳이 끝이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거실 소파에 널부러져 있던 그는, 자기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조차 기억하기 힘들어했다. 나카하라는 지끈거리는 허리에 작게 욕지기를 중얼거리고는,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다자이를 그대로 소파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그 충격에 깬 다자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불쾌한 표정의 나카하라를 발견하고는 ‘좋은 아침이네 츄야.’라고 인사했다.
“설명해라. 아니면 반 죽여 놓을 거니까.”
다자이가 벗은 몸을 가릴 새도 없이 나카하라는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러나 살벌하게 말하는 나카하라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다자이는 아프다며 징징대다가 ‘츄야 자네가 꼴리면 한다하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가 한거지.’라고 말하고는 이제 놔달라며 그에게 애원했다.
“...내가 그랬다고?”
다자이는 다시 되묻는 나카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술에 잔뜩 꼴아서 뭐라고 씨부린거냐, 나 새끼... 한숨을 푹푹 쉬며 머리를 벅벅 긁던 그는, 어서 옷 입고 나가라며 다자이를 재촉했다.
“...그리고 좋다고 매일 하자고 하기도 했는...아, 빨리 나가야지, 그래.”
다자이는 눈에서 불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될 만큼 살벌한 나카하라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 날 이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병원에서였다. 나카하라가 정신 의학과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다자이의 일방적인 치근덕거림이었지만. 나카하라의 상태는 전보다는 좋아보였다.
“그 날 잘 잤어요?”
나카하라는 아직도 삐걱대는 허리를 잡고 ‘오냐. 허리 아파서 침대에만 있다시피 해서 좀 잤다.’라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오히려 밝을 목소리로 다자이는 다행이라며 효과가 떨어지면 다음에도 부르라며 장난스레 말하자, 나카하라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술에 취해서 기억 못 할 텐데. 내가 그것만 잘하는 게 아니라 사람 재우는 것도 좀 하거든요. 그러니까 불러요.”
그는 주머니 안에서 포스트잇과 펜을 꺼내 뭔가를 적어내고는 그에게 건네주며 언제든지 연락만하라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받아들까 말까 고민한 듯싶었지만, 다자이는 앞서간 동료가 자신을 부르자 그의 손에 종이를 떠넘기고 가버렸다. 나카하라는 저 난잡하고 어지러운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숫자의 나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는 구기듯이 주머니에 넣은 채로 병원을 나와 버렸다. 지나가던 쿠니키다는 그를 보며 ‘어제 방문하셨는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십니까, 나카하라씨?’라고 아는 체를 했지만 듣지 못했는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또 다자이 자식인가...”
***
나카하라는 지금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관문 앞에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며 ‘츄야 나왔다네. 문 안 열어 줄 건가? 저번에도 그러더니 왜 그리 튕기나?’와 같은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 다자이 오사무 때문이었다. 저 씹새끼는 부르면 조용히 올 것이지...속으로 욕지기를 중얼거린 나카하라는 현관문을 열어주며 ‘그 주둥이는 섹스할 때 빼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냐?’라고 쏘아 붙였다.
“아, 하긴 츄야가 내 목소리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니. 그래도 자네가 새벽에 깰 때 괜찮다고 말해주면 잠도 다시 잘 들던데, 그건 별로인건가?”
다자이의 물음에 나카하라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차라리 군대에 같이 소속했었던 동기나 다른 친구들이 낫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과 똑같은 상황이거나, 일찍 퇴역한 자신들과는 다르게 다들 자신들의 부대에 소속해 있는 군인들이 대부분이라 쉽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 깽판을 치고 나왔는데 얼굴 보기도 그렇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헤집던 나카하라는 이제는 좀 드나들었다고 자신의 집과 같이 편안하게 있는 다자이의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을 내비쳤다.
“왜 하필 네 자식이냐...”
눈가를 문지르며 중얼거리던 나카하라는 벌써 그가 자신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날짜를 계산해보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저 치료나 유흥 목적인 거니까. 그가 사가지고 온 와인을 따던 그는, 익숙하게 잔을 꺼내 와인을 따르며 ‘한잔씩만 마셔야하네. 자네는 술이 너무 약해.’라고 말하는 다자이에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니도 군대에서 20년 최전선 근무 해보던가. 거긴 마취나 치료용으로 들인 술도 귀하니까.”
나카하라는 그가 따라준 와인을 받아들고는 ‘너는 근데 연병장 한 바퀴 돌고도 죽으려할 새끼니까 그냥 말을 말자.’라고 하며 옆에 있던 아일랜드 테이블에 스툴을 가져다 앉았다. 이제는 뭔가 다자이가 있는 것이 썩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지, 가만히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쿠니키다가 이제 수면제 안 먹어도 된다더라.’라고 말을 내뱉었다.
“나도 들었다네. 축하할 일이지. 이제는 혼자도 잘 잔다며? 그 섬뜩한 나이프랑 권총은 아직 못 치운 모양이지만.”
와인을 홀짝이던 다자이는 ‘이건 그 선물이야. 수면제 안 먹으니 좀 더 윤택한 삶이 된 것 같지 않나?’라고 말하며 와인 잔을 들어보였다. 츄야는 그의 반응이 자신이 생각했던 반응과는 거리가 멀어 잠시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제 안 와도 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무슨 말이든 내뱉기만 하면 두세 달 정도 지속된 이 가벼운 관계는 금방 깨질 터였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묻어나는 손을 바라보던 그는 순간, 가까이 다가오는 다자이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내빼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빤히 보이는데 츄야. 나는 계속 올 거니까 걱정 말게나.”
나카하라는 의중을 꿰뚫린 듯한 그의 발언에 시선을 피하며 ‘누가 네 자식 없다고 걱정하겠냐. 시끄러우니까 썩 꺼지게 하고 싶구만.’이라 중얼거리며 남은 와인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츄야에게 들이대는 건데, 안 올 리가 없지 않나.”
순간, 한 번에 마셨던 와인을 도로 잔에 뱉을 뻔했다. 그의 반응에 다자이는 몰랐냐는 듯이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처음부터 말했지 않나. 내 취향이라고.’라고 말을 덧대었다. 그게 플러팅이었냐.
“요즘은 그딴 식으로 작업을 거냐? 알다가도 모르겠구만.”
한 잔만 마시라는 다자이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두 번째 잔을 따른 나카하라는 간질거리는 손끝을 비비며 ‘열심히 해봐라. 내가 넘어가게끔.’이라 말하며 피식 웃었다. 마치 네가 할 수 있겠냐는 비웃음이었지만, 다자이는 ‘거의 다 넘어왔다네. 그런데 이 딱딱한 군인 아저씨는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야.’라고 말하며 나카하라를 빤히 마주보았다. 나카하라는 ‘내가 언제...’라고 웅얼거리면서도 슬금슬금 다가와 손을 잡으려 하는 그의 손을 막지 않았다. 간질거리는 손끝은 답지 않게 움츠러들었지만, 다자이는 상관하지 않고 깍지를 꼈다.
“뭐, 이제 곧 솔직해 지겠지.”
누구보다 자신감에 찬 말투였다. 다자이의 자부심 넘치는 말에 푸스스 웃은 나카하라는 와인 잔을 밀어내며 ‘난 원래 거짓말 같은 건 안 하거든?’이라 반박하며 마주 잡은 그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다자이는 이리저리 고개를 틀며 뭔가를 확인하는 것 같이 살피더니 ‘아직 완전히 솔직하지는 못하지 않나.’라고 대답하며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었다.
“침대에서만 솔직하면 못써 츄야.”
상큼한 웃음과는 다르게 자신을 놀리는 말투에, 그의 손을 비틀듯 잡은 나카하라는 엄살을 피우며 죽겠다고 하는 그에게 이제 그만하고 네가 하고 싶은 거나 해보라며 툴툴댔다. 손을 빼내 털어낸 다자이는 ‘항상 이렇더라,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츄야가 원하는 거잖아.’라고 반박하면서도 그의 뺨을 쓸어내리고 입 맞췄다.
“네가 꼬시는 거니까 열심히 해보라고.”
그의 반박에 어쩌겠냐는 듯이 대꾸한 나카하라는, 입 맞춰 오는 그의 목에 한 팔을 둘러 안아 몸을 밀착시켰다. 다자이는 너무 꽉 안지는 말라며 당부하고 그에게 짧게 입 맞춰주며 한 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솔직하지 못한 감정선은 다시 마주잡은 손으로 연결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