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츄]십이국기.4
달빛에 비친 동백은, 어느 붉은 빛보다도 찬란했다. 질 때가 되어 떨어진 꽃은 마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것마저도 아름다웠다. 츄야는 떨어진 꽃들 중 그나마 모양새가 온전한 것을 골라 들고 다자이가 친히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산책길을 걸었다. 늦은 밤, 자신의 처소 앞을 지키던 궁녀마저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무렵, 조용히 밖을 걸어 다니던 츄야는 이 상황을 다자이에게 들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았지만 걱정에 치우치는 것 보다 동백의 향에 둘러싸이는 쪽을 택했다. 궁 안에서 맡던 희미한 향이 아닌,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의 진한 동백의 향이 숨을 쉴 때마다 온 몸 곳곳으로 번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츄야는 자신이 주워든 꽃을 망가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며 처소로 돌아왔다. 그는 가끔씩 즐기고 싶은 유희거리가 생겨버린 탓에 잠이 부족하지 않을 까 스스로를 걱정했지만, 어차피 없는 잠, 굳이 자지 않아도 된다고 되뇌며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얼마간 눈을 붙인 걸까, 궁녀가 기침하셨냐고 묻는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 츄야는 ‘일어났으니 걱정말거라.’라고 대답하고는 눈을 비볐다. 잠시 생각한다고 눈을 감은 것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중얼거린 그는, 궁녀가 가져온 세숫물에 얼굴을 닦아 정돈하며 오늘의 일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아침 조례, 상소 읽기, 황제와의 회의. 항상 같은 일정이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기대해보던 츄야는, 정확한 시간에 자신을 데리러 온 환관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고 있는 예복 중 가장 단정하고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재촉하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상선에게 금방 나가겠다고 일렀다. 그를 따라 나서자, 평소보다 바쁘게 걸음 하는 모양새가 긴장한 듯 보였다. 굳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지는 않아 말없이 조정을 향해 걸었다. 어느 때보다 이른 시간부터 모여 있는 신하들의 모양새에 의아해 할 새도 없이 조례는 시작되었다. 다자이에게 아침 인사를 할 새조차 없이 시작된 조례에서는, 잠시 동안 적막만이 흘렀다.
“오늘 조례에 급히 부른 까닭은 융국의 왕이 바뀜과 동시에 국경 지대에 약탈과 괴롭힘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아 전쟁 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먼저 말문을 튼 것은 다자이였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황제의 옆에 앉아있는 기린의 심기를 살피며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기린이 피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다고 들었을 뿐더러, 몇 년 전에 이루어 졌던 전황제가 시행한 대학살로 인해 실도했던 그가 전쟁이라는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할지는 모르기 때문이었다. 츄야는 떨리는 손을 마주잡은 채로 긴장을 삭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견고하게 지켜져 있던 국경지대가 옆 나라의 난동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설명하던 다자이는 신하들이 츄야의 심기를 살피며 이야기를 차마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 그를 불렀다.
“짐도 타이호께서 노여워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백성들이 더 이상 무고하게 죽어나가는 것은 볼 수 없을 것 같군. 타이호, 그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의 화살이 츄야를 향해 돌아왔다. 츄야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하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기색을 내색하지 않으려 침착하게 입을 연 그는, 자신을 응시하는 다자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폐하. 융국은 마수를 군에 이용할 정도로 뛰어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지금 전쟁을 선포한다면 더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어 지금보다도 더 큰 피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지금은 지켜보자?’ 그의 말을 끊고 들어온 다자이의 한마디는 마치 내리꽂는 칼과 같은 차가움이었다. 츄야는 자신이 하려던 말이 그대로 다자이의 입에서 나오자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자이는 ‘그럼 타이호께서는 우리가 언제까지 참아야 좋을 것 같습니까?’라고 되물으며 자신이 보던 상소를 그대로 옆에 내려놓았다. 츄야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최대한 골똘히 생각했다. 옆 나라의 침략의 의사를 밝히고 쳐들어온다면, 국경지대 사람들은 몰살될 가능성에 놓여있었다. 그렇게까지 피해가 번지지 않기 위해서는 속히 국가 측에서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던 츄야는 ‘다음 한 번. 그 한 번이후로는 저희가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자이는 그가 조속히 낸 대답에 만족한 미소를 띤 채로 대답했다.
“타이호께서 말씀하신 때이니 모두가 그러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곧 국경지대에 다녀온 병사들이 돌아올 때이니 같이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다자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츄야는, 그의 말에 모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조아린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다자이는 ‘무언가 할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타이호?’라고 물었지만, 츄야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조례는 무거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끝나버렸다. 비록 신하들의 모습은 이 사안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행동과도 같이 보였지만, 나중을 생각한다면 슬기로운 판단인지도 몰랐다. 신하들이 전부 물러난 조정에는 다자이와 츄야만이 남았다. 츄야는 다자이가 먼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는지, ‘왜 나가지 않으십니까, 폐하.’라고 물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자이는 그의 물음에 ‘타이호께서 일어나시면 같이 일어날 생각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츄야는 전쟁을 안 했으면 좋겠는가?”
‘침략이 들어오기 전까지 대응을 하지 않는 눈치여서 말이야.’ 심중을 찌른 다자이의 물음에 츄야는 고개를 돌려 대답을 피했다. 다자이는 그런 시선을 따라 움직여 그의 시야에 자신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장난스러운 그의 행동에 ‘뭐냐... 얼굴 들이대지 마.’라고 대꾸하며 그를 밀어낸 츄야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조정 제일 위의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자기가 직접 치러가겠다며 나서는 모양새였을 텐데. 우리 타이호께서는 아직도 겁먹고 계시는 겁니까?”
마치 장난을 걸어오는 말투에 피식 웃은 츄야는, ‘내가 뭐가 겁나서. 그냥 기린이니 피 냄새가 싫을 뿐이다.’라고 답하고는 조정을 나섰다. 다자이는 일부러 여유로운 척을 하는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피식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왜 따라 오냐며 묻는 츄야에게 그저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라 대답한 다자이는, 뒤에서 황급히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다자이는 무언가를 품에 안고 뛰어오는 병사를 응시하였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은 참극을 목격했다는 증거일까. 그러나 그가 다가올수록 안색이 파리해지는 츄야의 모습을 발견한 다자이는, 환관을 시켜 그를 멈추게 하였다. 다자이는 금방이라도 휘청일듯한 츄야를 그대로 뒤에 가려준 뒤, 병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물었다. 막 도착한 병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다자이의 물음에도 쉬이 입술을 떼지 못하던 병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가 품에 꼭 안고 오던 상자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국경 방위대장 오다 사쿠노스케의 목입니다. 창에 꽂혀 매달려 있어... 목숨을 걸고 가지고 왔습니다.”
츄야는 온 몸에 미치는 피의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의 악몽이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눈을 뜨면 보이는 다자이의 용포를 꽉 쥐며 등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오다 사쿠노스케의 이름이 나오자, 꿈이라고 생각했던 현실의 무게에 그대로 그의 등에서 얼굴을 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궁녀들은 타이호를 처소로 모셔라. 나는 잠시 이 병사와 이야기를 할 터이니. 처소에 도착하면 그곳의 궁녀들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충격이 말이 아닐 테니 말이다.”
다자이는 자신들의 뒤를 지키고 서있던 궁녀들에게 일렀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츄야는 궁녀들의 시중을 받아 발걸음을 떼었다.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는 다자이를 연신 돌아보던 츄야는, ‘지 이야기를 어디다가 가져다 붙이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
자신의 처소 안에 있음에도, 궁 안의 살벌함은 여실히 피부로 와 닿았다. 츄야는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도 다들 말을 아끼며 자리를 지키는 궁녀들과 시종들의 모습에 처소에 조용히 머물며 낮에 처리하지 못한 상소를 보았다. 지금 보아도 집중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지만, 내일 전부하려면 하루 종일 해도 모자를 것 같다고 느껴 상소가 적힌 두루마리를 펼쳤다. 얼마간 글자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집중조차 되지 않아 종이와 글자만을 구분하고 있던 츄야의 방문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비쳤다. 궁녀들의 언질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 그일 것이라는 생각에 ‘왔으면 들어와야지, 왜 안 들어와.’라고 말한 츄야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자이의 모습을 응시했다. 제일 친한 친우라고 하던가, 그가 전 황제의 신하였을 때, 같이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던 남자였다. 나름 신의도 있고 자진해서 국경에 갈 정도로 충성심이 깊은 남자라고 들었던 츄야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시신을 찾아오라 시켰으니 장례는 최대한 빠르게 치를 생각이라네. 자네는 별로 신경 쓸 것 없어.’라고 대답하는 다자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죽었다는 것은, 국경의 군사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경은, 융국에서 쳐들어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츄야가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음에도, 다자이는 그의 앞에 산호와 호박으로 만든 동백과 청옥의 잎사귀, 그리고 금으로 가지를 엮어 만든 머리 꽂이를 건넸다.
“...지금 이거 줄 때냐? 전쟁 하자고.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승산 없어.”
츄야는 마치 진짜 동백과도 같아 나비마저도 속일 듯한 머리꽂이가 무색하게 소리쳤다. 다자이는 그런 그의 말을 들은 것인지 듣지 못한 것인지, 다자이는 흘러내린 츄야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아직 덜 말라서 해 볼 수도 없겠군.’이라 중얼거렸다. 츄야는 그런 그의 모습이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며 ‘네가 아까 하자고 했잖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라고 그를 재촉했다.
“아직 시간은 있어. 군사는 보냈으니 일단 그곳을 정리하고 백성들을 피신시키는 게 먼저라네. 그리고 승산 없는 전쟁이니 만큼, 작전이란 것을 짜보아야겠지. 안고에게는 부탁해놓았어.”
‘그의 유품을 받았으니 오늘은 무리겠지만.’ 다자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조곤조곤 말하며 불쾌해 보이는 츄야를 응시했다. 츄야는 복잡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차라리 울고 화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자, 그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은 다자이는 ‘츄야, 내가 지금 흥분하게 되면 분명 일을 그르칠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자네와 국가를 위해 전쟁을 나가는 거라네. 그도 친우이기 전에 나의 백성이니까.”
황제와 같은 말투로 말하며 츄야의 뺨을 쓸어주던 다자이는, ‘그리고 나의 기린이 전쟁을 선포했는데 내가 어찌 그냥 지나가겠어.’라고 말을 덧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은 것은 츄야였다. 대신 화내고 울어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으리라. 츄야는 눈물이 흘러내리기라도 할까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 버리고는, 방을 나서려다 뭔가 잊은 듯 돌아보는 다자이를 보곤 얼른 소매를 숨겼다.
“그리고 그 머리 꽂이는... 밤에 꽃구경을 다니는 츄야에게 주는 선물이랄까. 몸이 상하니 자주 나가지는 말게나. 나에게 말하면 같이 나가 줄 터이니 언제든 말하고.”
다자이의 말에 ‘시끄러워. 지금도 내가 때리면 휘청거리는 주제에 너나 잘 해.’라고 대꾸하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 지었다. 다자이는 그의 미소를 응시하다 어서 침소에 들라 말하고는 내일 아침 안고를 함께 보아야하니 환관을 보내겠다는 말과 함께 그의 처소를 나섰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문 너머 그림자로 확인한 츄야는, 그가 준 머리 꽂이를 매만져 보다가 빈 옥함에 넣어두고 장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무거운 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차오르는 듯한 상현달이 밤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