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츄]레몬, 끝.
손바닥에 닿는 굵은 소금의 감촉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레몬 껍질에 문질러지자 은은하게 퍼지는 레몬의 향기는 나름대로 기분 전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카하라는 열심히 껍질을 소금으로 문질렀다. 귀찮지만 뭐든 껍질째 먹기 위해서는 손이 가는 법이라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손에 가득 묻은 레몬의 향에 레몬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는 도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모양이 한쪽으로 쏠려있어도 향은 가득한 노란 레몬은, 어느 쪽으로 썰어도 예쁘게 썰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나카하라는 날이 선 칼을 천천히 들어 꼭지부터 잘라내고는, 천천히 같은 두께로 레몬을 썰어내었다. 하얀 부분만이 나오는 곳을 지나 레몬의 속내가 드러나자, 그 특유의 새콤한 향이 나카하라의 코앞까지와 맴돌았다. 오래 냉장고에 있어서 상하기 직전 같은 감정도 이렇게 쉽게 잘라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스로가 우스운 생각을 한다는 듯이 피식 웃은 나카하라는 다시 두 번째 레몬을 들어 꼭지를 잘라버렸다.
“츄야, 나 결혼하기로 했다네.”
그 다음, 아니 그 다음의 다음이라도 나의 차례가 오지 않을까. 이렇게 순서를 차례대로 기다리는 레몬들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곁을 지키고 있다 보면 분명 그가 자신을 돌아볼 날이 있지는 않을까. 아니, 그전에 고백을 제대로 하는 쪽이 더욱 좋았을까. 뒤늦은 후회를 섞어가며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좋은 두께로 썰린 레몬 조각들을 모아 한 그릇에 담았다. 술김에 한 고백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잠든 그에게 아무리 원망해 봤자 그가 들을 리 없다는 것은 자신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덜 마른 빨래에서 나는 텁텁한 향기처럼 좋지 못한 감정이었다.
“구질구질하네.”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져 만들어진 반쯤 잘린 얇은 레몬 조각을 입에 넣으며 중얼거리던 나카하라는 씁쓸하고도 시게 퍼지는 레몬의 맛에 미간을 좁혔다. 분명 설탕과 꿀에 점칠 되어져 있는 것만 먹어버릇해 익숙하지 않은 맛이었지만, 나카하라는 그것을 꾸역꾸역 씹었다. 타액과 섞여 조금씩 달콤해지는 과육의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널리고 널린 사랑에 관한 책에는 항상 달콤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만 적혀 있어 나의 사랑도 그런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었었다. 설탕 조림처럼 끈적끈적하기도 하며 새콤달콤하고 상쾌한. 어딘가에서 마셔본 레몬에이드와 같이 맛이 다르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색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짝사랑을 가만히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미처 준비 못한 민트가 생각난 것인지 베란다에 있는 화단으로 향했다. 파릇파릇하게 자라난 애플민트를 한 잎씩 떼어내던 그는,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자신에게 결혼 소식을 전한 다자이를 생각했다. 생각보다 오래 갔던 연애였지만 항상 끝은 좋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손톱만한 민트 잎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털은 나카하라는 남은 물기마저 빠지도록 키친 타올 위에 민트를 올리고는 손끝에 묻어난 민트의 향을 맡아보았다. 청량함이 코끝만 간질이다 그대로 사라졌다. 준비해둔 작은 병에 레몬을 천천히 깔아둔 그는, 미리 준비해둔 설탕을 솔솔 뿌려대었다.
“츄야, 내 들러리 서 줄 수 있나?”
“야, 언제는 창피해서 싫다더니 뭐라는 거냐.”
“그래도, 츄야만큼 가까운 친구가 어디 있겠나.”
주변에 사람이 널리고 널린 놈이 그런 말을 꺼낸 것에 위안을 받았다. 제일 가까운 친구라는 말에 멍청한 심장이 빠르게 달리는 것도 우습기 그지없었다. 조여 오듯 아픈 것도 이젠 익숙해 진 것인지 그저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급한 일이 있다 자리를 피했다. 그날 먹었던 것들은 전부 얹힌 것인지 새벽까지 나카하라를 괴롭혔다. 순간 숟가락을 놓칠 뻔 해 다른 층보다 설탕이 더 많이 쌓여버린 것을 보던 나카하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그 위로 레몬과 민트 잎을 한 겹 한 겹 더 올려 쌓았다. 분명 말하지 못한 감정들도 속에서 이렇게 쌓이고 있지 않을까. 재미없는 상상을 하던 그는 병이 반 밖에 차지 않은 것을 바라보며 냉장고에서 레몬을 더 꺼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항상 모자란 타이밍에 그에게 말하지 못한 건 아닐까. 오늘은 비가 와서, 날이 좋으니까, 오늘은 내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다자이가 여자 친구가 생긴 날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짜증나네.”
여태까지 그의 생각만 하던 것이 들통 난 것 같아 스스로에게 불만을 토로한 나카하라는 다시 처음부터 레몬을 씻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같이 벗겨버릴 듯이 거친 소금의 촉감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듯 했다. 이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어싱 같은 것을 뚫으러 가는 걸까라고 중얼거리던 나카하라는 다시 꼭지를 잘라 규칙적인 모양새로 레몬을 썰어내기 시작했다. 우리 둘의 관계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족했던 너의 감정도 내 넘치는 감정으로 채워준다면 우리 둘은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꼬투리를 무는 생각에 잠시 칼을 내려둔 나카하라는 반쯤 찬 병을 바라보았다. 이미 레몬의 사이사이에서 눅진하게 녹아가는 설탕이 눈에 띠었다. 이미 녹아내린 것은 돌이킬 수 없으니, 다시 체념한 듯 레몬을 썰어낸 나카하라는 다시금 설탕을 눈이 오듯 안에 살살 뿌렸다. 레몬 특유의 맛이 남을 수 있도록 너무 달지는 않게, 그래도 스스로의 기분은 좋아질 수 있을 만큼 달게. 마지막 레몬 한 조각을 올린 나카하라는 그대로 병 입구에 코를 대고 병 안 가득한 레몬의 향을 들이마셨다. 특유의 새콤하고 씁쓸한 향과 섞여 들어오는 달큰한 향기. 그저 포장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카하라는 자신의 감정을 우겨넣은 듯한 기분마저 들어 급하게 뚜껑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누구도 꺼내보지 못하게 주방 제일 구석에 숨겨둔 나카하라는 앞치마에 넣어둔 전화기가 울리자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고 여유롭게 전화를 받았다.
“왜 또. 그래. 들러리 옷?”
결혼식 때 입을 들러리 옷을 맞춰야 한다고 답지 않게 대답을 재촉하던 다자이에게 대꾸하던 나카하라는, ‘알겠으니까 너나 시간 내. 들러리는 설마 나 혼자냐? 친구 없는 거 티내지 마라.’라고 장난스레 말하며 남은 레몬의 꼭지들과 과육이 들지 않은 끄트머리 부분을 치웠다. 어질러진 주방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그의 말에 대꾸해주던 나카하라는 급하게 전화를 끊는 그에게 약간의 잔소리를 더해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씁쓸한 듯 달콤한 레몬의 향기는 그의 손끝에서도, 마음에서도 쉬이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