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츄]여름날, 블루베리.
계절의 한조각을 떼어왔습니다.라는 진단을 돌려서 나온 '초여름의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진단 뒤에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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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꼭 덜 여문 블루베리 같았다. 시큼할지도 모르는 작은 알맹이를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기분이랄까. 한풀 꺾인 낮의 더위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나카하라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아주 천천히 익어가는 핫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곧잘 해주던 간식이라 그런지 다 커버려 고등학생이 되 버린 지금도 그 녀석은 이렇게 간간히 놀러와 간식을 부탁했다. 꼭 맡겨둔 것처럼 ‘츄야 뭐 있어?’라고 묻는 그였지만, 나카하라는 그런 그가 딱히 미워보이지가 않았다.
“츄야-. 토마토 더 따와야 해?”
“형 안 붙이냐.”
이런 시골에 얼마 없는 이웃끼리 친하지 않을 리가 없지만, 녀석은 유독 어렸을 때부터 나카하라를 졸졸 쫓아다녔다. 나카하라도 천성이 모질지는 못한 사람이라 그저 안겨오는 아이를 내치지 않고 꼬박꼬박 잘 먹이고 놀다가 보내니, 다자이는 부모 다음으로 나카하라를 잘 따랐다. ‘그때가 언제더라, 벌써 10년이 넘었잖아.’ 라고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잘 익은 빨간 토마토를 한 광주리 들고 들어오는 다자이에게 미리 떠둔 얼음물을 건넸다. 새파랗게 어렸던 그도 이제는 자신의 키는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말랑한 단풍잎 같던 손이 크고 단단해져 자신의 손을 덥썩덥썩 잡을 때도, 아직도 어려보이는 그가 다 커버렸다는 위화감 때문인지 아니면 요 근래 슬슬 불을 지피는 감정 때문인지 얼굴이 발갛게 익기 십상이었다. 다자이는 더위 때문인지 꿍얼거리던 말이 쏙 들어간 듯 했다. 그는 얼음물을 한번 들이킨 후에야 ‘츄야, 밭 엄청 커졌는데 혼자 다 먹을 수 있어?’라고 핫케이크를 뒤집는 나카하라에게 물었다.
“내 입만 입이냐. 니네 집도 보내고 저기 앞집 할머니 댁에도 보내고 그 옆에 할아버지 댁에도 보내야지.”
나카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노릇하게 잘 익은 핫케이크를 쌓아둔 것을 바라보았다. 어쩜 이리 고른 모양으로 탐스럽게 나오는지 다자이는 알 턱이 없었다. 집에 가서 엄마께 부탁도 해보기도 하고 자신이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이런 모양은 고수하고 그저 넓대한 빈대떡 같았다. 심지어 자신이 만든 것은 먹을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나카하라는 잘 쌓아올려진 핫케이크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고는 ‘어제 만든 블루베리 잼. 올리자.’라고 말하며 냉장고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알알이 영근 것들을 손수 골라 만든 잼을 꺼낸 나카하라는, 큰 맘 먹고 산 휘핑크림도 꺼내 핫케이크 위에 예쁘게 올렸다. 접시 가장자리에 어제 먹고 남은 과일까지 올리니 마치 파는 것 같다는 다자이의 말에 나카하라는 의기양양해졌다. 읍내까지 왕복 2시간 정도가 걸리는 곳이니 만큼, 손수 만드는 것이 차라리 덜 수고로웠다. 나카하라는 나름 호화롭게 꾸며진 핫케이크를 사진으로 남긴 뒤, 다자이에게 어서 먹자며 재촉했다. 식탁에 앉은 둘은, 제사라도 지내는 듯이 조심스럽게 칼로 핫케이크를 잘랐다. 폭신하면서도 눅진하게 닿는 안의 촉감에 나카하라는 수고스럽게 머랭까지 친 정성이 헛되지 않았음에 기뻐했다. 물론 다자이는 한입 입에 넣자마자 다시 다음 조각을 잘라내 입에 넣을 준비를 마쳤다. 나카하라는 이럴 때 보면 애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따라 그에게 건넸다.
“아, 츄야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뺀질나게 자고가면서 얼마나 더 성가시게 구려고?”
나카하라가 오렌지를 한입 베어 물며 대답하자 다자이는 ‘나 성가셔?’라고 되물었다. 사실 성가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정도로 성가셨다면 어릴 때는 그를 집에 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다 커서 친구들이랑 놀지 자꾸 찾아오니까 성가시지. 너 자꾸 그러면 밥만 주고 계속 밭일만 시킨다?’라고 대꾸해버렸다. 작은 블루베리가 포크를 피해 접시 밖으로 도망쳤다. 나카하라는 굳이 블루베리를 다시 주워 접시에 담지 않았다. 작고 탱탱한 것이 꼭 덜 여문 것 같았기 때문일까. 다자이는 ‘하지만 츄야는 내가 오는 거 좋아하잖아?’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핫케이크 한 조각을 한 입에 넣었다.
“아니다, 날 좋아하던가?”
나카하라는 그의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포크로 찌른 블루베리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모습만을 응시했다. 언제부터였나, 간간히 그를 응시하던 시선 때문이었을까. 나카하라는 그의 말에 대답조차 하는 것을 잊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그를 응시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감정을 잘 못 숨기는 사람이긴 하지만 저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간을 좁히고 있는 모습에는 어떠한 말을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듯 했다. 마치 입 다물고 있으면 신상에 이롭다고 협박하는 불량배와도 같은 표정이기에 먼저 사과의 말이라도 건네야 할지 우물쭈물 하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츄야... 저기 내가 말이.”
“어떻게 알았냐.”
그저 떠보기만 하려고 던진 공이 그대로 맞아 만루 홈런을 쳐버렸다. 다자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잠이 든 줄 아는 자신의 머리칼을 넘겨주고 뺨을 매만지던 그라던가, 뭔가를 시키면서도 항상 잘 했다며 머리를 헤집듯이 쓰다듬던 그, 항상 간다고 이야기하면 싫다고 대답하면서도 환히 웃으며 반겨주던 그. 생각하면 할수록 얼굴은 열이 오르듯 붉어져 갔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를 다 꼽아보아도 그저 친한 동생에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 투성이였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장난이었어.’라고 말하기에는 들쑤신 개미집처럼 그의 감정이 쉴 새 없이 자신에게로 흘러넘쳤다.
“야, 내가 미안하다.”
먼저 사과의 말을 꺼낸 것은 나카하라였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에 그가 화라도 낼까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이루어 지지 못할 일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고 말하던 나카하라는 고해 성사를 하듯 다자이에게 조목조목 자신의 감정에 대한 변론을 했다. 다자이는 죄를 고하는 표정으로 그가 말하는 사랑 고백을 토시하나 놓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자신을 쳐다도 보지 못하는 그가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쿵쾅대는 가슴이 조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블루베리가 가득 든 바구니를 쏟은 듯, 간질거리게 콩닥거렸다. 나카하라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이제 안와도 돼.’라고 답하고는 다 끝났다는 표정으로 다자이를 응시했다. 다자이는 터질듯이 새빨개진 얼굴을 감출 새도 없이 ‘나도 츄야 좋아하는데 왜 안와.’라고 대답했다. 다자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느끼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냉장고에 있던 휘핑크림을 입에 한가득 짜 넣은 듯한 한마디에 괜히 말했나하는 생각이 솟구쳤다. 하지만 입이 방정이라는 말처럼, 감정이 잔뜩 묻은 말은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너 내가 몇 살인지는 아냐?”
“나는 이제 열아홉이니까 내년이면 성인이지.”
동문서답을 하듯 내뱉은 다자이는 한수도 물러주지 않은 채로 그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결국에는 나카하라가 머리를 헤집으며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이걸 어쩌면 좋냐.’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뭐, 어찌할 도리가 있나. 어깨를 으쓱이며 쉬운 길이 눈앞에 보이는데 그냥 가면 안 되는지 묻는 다자이의 물음에 나카하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걸로 떼쓰지 마. 이게 무슨 쉬운 일인 줄 알아.”
“내가 떼쓰는 것 같아 보여, 츄야?”
어릴 때처럼 형이라 부르라고 말해도 꼬박꼬박 이름으로 부르던 그가 던진 물음에 나카하라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렇게 다 컸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되는데 라는 생각은 두근거림으로 인해 묻혀버린 지 오래였다. 다자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너머에 있는 그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피해 돌려버린 고개는 다자이의 손에 의해 쉬이 제자리를 찾았다. 나카하라는 역시 그가 덜 여문 블루베리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게 달게 만들어진 간식을 먹었음에도 맞춰진 입에서는 새콤한 맛이 더 많이 감돌았기 때문일까. 나카하라는 새콤달콤함이 입 안을 굴러다니는 통에, 도저히 제대로 된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