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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안고]우리들의 페이지는 끝이 났지만.

송화우연 2018. 10. 21. 17:34

패키님의 오다안고 리퀘스트 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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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끔 손을 뻗는 찻잎, 그리고 구석으로 밀어둔 고급 찻잔, 아끼고 아껴 읽는 좋아하는 책과 지나가다 보이는 눈길만 끄는 잡동사니들. 사카구치는 오랜만에 꺼내든 책을 펼쳐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아껴 읽으면서도 활짝 펼치지 않아 마치 새것과 같은 책을 쓸어보던 그는, 책을 가지고 볕이 드는 창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밖을 보기위해 옆에 둔 소파는 적당히 아늑해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사카구치는 평소 마시던 것보다 진하게 우린 홍차를 홀짝거리며 책을 펼쳤다. 조금 더 손 때가 묻어있었다면,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을까. 사카구치는 첫 장에 정갈한 글씨로 쓰여진 필체를 매만지며 작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10.23 네 생각에 발걸음이 멈추어서 어쩔 수 없이.]

그때는 이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쓴 말임이 틀림이 없다고 느꼈지만, 가면 갈수록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의 표정은 자신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천천히 펜촉을 따라 쓰듯 글씨를 더듬어가던 사카구치는 한숨을 내쉬듯이 허탈하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저나 당신이나 그때는 어리숙했죠.”

작게 중얼거린 사카구치는 잠시간 첫 페이지를 떠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기도를 하는 듯, 잠시 잠에 빠진 듯 그렇게 고개를 책에 묻은 그는, 금세 다시 고개를 들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

사카구치는 아무렇지 않게 포장된 선물을 건네는 오다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갑작스레 온 연락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한동안 바쁠 거라 귀띔했던 그의 말이 언제였는지 가늠해보던 사카구치는 오다가 건네는 선물을 받아들고는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오다의 표정은 진지한 사카구치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기뻐 보였다.

“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연락했다만.”

누가 하느냐에 따라 무척 당황스러운 한마디였다. 하지만 사카구치는 워낙 솔직한 오다의 성정을 잘 알기에, 그저 아무런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오다의 선물은 책이었다. 사카구치는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될 물건을 정성스레 포장했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뜯은 포장지를 잘 접어 책에 끼워두었다. 오다는 한껏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사카구치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기대한 대답이라도 들으려는 어린 아이 같은 표정에 작게 웃은 사카구치는 ‘책 고마워요. 좋아하는 작가인데 잘 읽을게요.’라고 인사하며 책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쥐었다. 별 뜻은 없을 거다. 사카구치는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책의 표지를 쓸어보며 작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번에 읽고 싶다고 한 게 기억나서 샀는데. 네가 기뻐하니 나도 기쁘군.”

사카구치는 영문 모를 말을 하는 그를 잠시간 응시했다. 언제 그런 말을 했더라. 아무리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을 돌려보아도 쉽사리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다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사카구치를 마주보았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오다는 생각 안에서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카구치에게 물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로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 손사래를 치며 웃을 뿐이었다.

“오다씨가 이런 말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워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고가 한 말이니 기억할 수밖에.”

또.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잠시 생각이 멈춘 사카구치는 최대한 그의 말에 예민한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다. ‘감사합니다.’ 짧은 대답을 건넨 사카구치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띤 채로 오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을 끝으로 둘의 의미심장한 대화는 끝이 났다. 이후로는 그저 시시콜콜한 평소 이야기가 오갈 뿐이었다. 일은 어땠는지, 요즘 근황은 어떤지, 아이들은 잘 지내는 지와 같은 소소한 대화였다. 사심하나 깃들지 않은 대화. 사카구치는 이정도의 거리가 서로에게는 좋을 것이라 생각하며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새어나올 것 같은 감정은 다시 꽁꽁 묶어둔 채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사카구치는 그 뒤로 오다가 내뱉는 다정한 말들을 냉정하게 쳐내며 자신을 방어할 뿐이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는 것은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한 번 그와의 대화를 곱씹던 사카구치는 자신을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던 그의 걸음걸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긋한 어투지만 중저음의 목소리,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까지. 사람이 어떻게 그리 다정할 수 있을까. 그의 속내가 궁금해 죽을 것 같았을 때에는 그에게 직접 어떻게 그렇게 다정할 수 있는지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글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라는 말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사카구치는 잠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던가. 그는 다정하긴 했으나 주변 사람의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가슴을 흔드는 이야기를 했던가, 그것도 아니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언젠가 다자이가 ‘안고는 참 사랑받고 있네?’라고 말했던 것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때는 자신에게 막중한 프로젝트를 맡긴 상사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으나, 자신을 위해 밤참을 가져다준 오다의 선물을 보고 한 말은 아니었을까. 사카구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지 걱정했지만, 오늘 낮까지 함께 있었던 그는 여전했다. 늦어버린 만큼 그에게 보상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그가 사라진 골목을 빠르게 뛰어나가며 그의 뒤를 쫓았다.

***

사카구치는 잠시간 자신의 눈꺼풀에 내려앉은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한번 읽은 책임에도 예전 생각과 함께 피어오르는 생각들은 퇴색될 만큼 오래되었지만 아껴두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움이랄지, 사랑스러움 이랄지. 가만히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쪽잠을 자던 그는, 부스스 눈을 뜨고 몸을 웅크렸다. 금세 물들어버린 저녁노을은 검푸른 색으로 하늘을 덮어가고 있었다.

“책 한 권 읽기도 참 힘드네요.”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내뱉은 말은 정처 없이 그의 앞을 맴돌다 사라졌다. 앓는 소리를 내며 뻐근한 몸을 뻗은 사카구치는 창가에 놓인 액자를 매만지며 웃었다.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진이었다. 지금의 사카구치와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카구치는 ‘다시 읽으니까 좋네요. 고마워요, 사쿠노스케.’라고 인사하고는 사진을 다시 창밖을 향해 돌려놓았다. 늦었다면 늦은 인사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오다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사카구치는 돌려놓은 그의 사진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는 밤을 잡아먹듯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