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츄]우당탕탕 회장님!!.8
괌에 온 지 벌써 5일째 되는 날. 다자이는 이 열대성 기후의 휴양지에 질린 나머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너무 더워, 이제 집에 갈까.’를 버릇처럼 내뱉는 그에 반해 나카하라는 곳곳을 돌아보며 아쉬움이 하나 남지 않도록 여행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고랑 오다씨 쪽보다 먼저 들어가 버리면 좀 그렇지 않냐.”
“그 부부는 둘이서 오붓하게 여행하라고 하고 우리는 돌아가자. 나 집에서 쉬고 싶어.”
답지 않게 사카구치를 생각해주는 어투로 말한 다자이는, 언제부터 한 것인지 반쯤 정리되어있는 캐리어를 보여주며 ‘나 오늘이면 갈 준비 다 될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카하라는 사뭇 아쉬운 표정으로 푸른 바다 쪽을 돌아보았다. 한 번 더 그 모래사장에서 일몰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나카하라는 사업 제안이라도 하듯 비장한 표정으로 ‘그럼 내일 모레 가자.’라고 말하고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뭐 할 건데.”
“해수욕도 좀 하고... 너랑 호텔 방에서 노닥거리고 싶어서 그런다 왜.”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집에서 하면 우리가 치워야 하잖아. 여기는 호텔이니까 남이 해주고.”
일리 있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다자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카하라는 연신 확인이라도 받듯 ‘그럼 모레 가는 거다?’라고 말하며 해수욕을 위한 물품을 가방에 담았다. 다자이는 이럴 때만 보면 누가 연하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려다, 나카하라의 눈총을 받을까 싶어 말을 아꼈다. 마지못해 함께 바다에 나간 두 사람은, 평소라면 시도도 해보지 않을 레저 스포츠를 신청하고 그 전까지 스노클링으로 맑은 바닷속 물고기를 따라 헤엄쳤다. 먼저 체력이 다한 다자이는 나카하라를 뒤로 한 채 선베드로 올라와 지친 몸을 뉘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뭍에서 쉬고 있는 다자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도로 호흡기를 차고 물속으로 고개를 넣었다.
“츄야, 안 힘들어? 언제까지 하려고?”
들릴 리가 없었지만, 다자이는 일단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있는 나카하라를 향해 소리쳤다. 물론 예상대로 나카하라는 안에 보이는 물고기에게 시선이 빼앗겨 이리저리 몸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저러다가 근육통이라도 나면 어쩌려는 건지. 다자이는 내일이면 허리나 팔이 쑤신다고 말할 그가 눈에 훤한지 혀를 차며 바다에 다시 들어가 그의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스노클링을 위해 가슴팍까지 오는 얕은 수심을 유지하는 안으로 들어간 다자이는, 나카하라를 일으켜서는 뿌옇게까지 변한 그의 물안경을 벗겼다.
“벌써 시간 다 됐어?”
나카하라는 다자이가 자신을 일으킨 이유가 신청해둔 레저 스포츠 때문인 줄 알았는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물었다. 다자이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말하고는 ‘그전에 체력 좀 보충해두고 좀 쉬고 가자. 쓰러지면 어쩌려 그래.’라고 걱정 어린 어투로 그를 선베드 쪽으로 이끌었다. 나카하라는 조금 아쉬운 기색을 머금은 표정으로 바다 쪽을 바라보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자이를 따라 바다를 나왔다. 다자이는 솔직히 말해 그가 이렇게 괌에서 신나게 놀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좋아하는 쇼핑 몇 번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 몇 번 하면 끝날 거로 생각했던 여행이 이렇게 나카하라의 의지로 늘어난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지, 다자이는 챙겨온 물을 나카하라에게 건네며 물었다.
“재미있어 츄야?”
나카하라는 대답할 새도 없이 물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와 같이 미소를 지으며 ‘안에 경치 진짜 예뻐.’라고 말한 그는, 다자이에게 한 번 더 봐보라며 그가 쓰던 물안경을 건넸다. 다자이는 이제 체력적으로 무리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츄야가 이런 것도 좋아하는지 새로 알았네.’라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좋지.”
“왜, 또 무슨 사고 쳤냐?”
간식으로 가져온 말린 망고와 바나나 칩을 먹던 나카하라는 자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다자이를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해외라서 일 처리 하기 어려운데 사고 좀 작작 치지. 아직 다자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확신한 나카하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자이는 햇볕에 달아올라 상기된 것 같이 된 뺨을 긁적거리며 난감하다는 듯이 말문을 떼었다.
“츄야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새로운 게 나와서 츄야가 더 좋아져.”
다자이의 낯부끄러운 말에 잠시 멍해진 나카하라는 말을 더듬어가며 ‘그러냐.’라고 대꾸했다. 아, 시도 때도 없이 치고 들어오냐….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는 듯 가져온 부채를 거세게 부치며 망고를 우물거리던 나카하라는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다자이에게 ‘새삼스럽게 왜 그런 말을 하냐.’라고 말을 던지고는 망고를 입안 가득 넣었다.
“그냥. 다음에 할 게 다이빙이라고 하니까 지금 말해둬야 할 것 같아서.”
하다가 죽을지도 모르잖아? 불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에게 코웃음을 치며 ‘이런 데서는 쉽게 안 죽어.’라고 대꾸한 나카하라는 소리 내 웃어버리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이미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에 말라버린 몸을 쓸어보던 나카하라는 맑은 물로 손을 씻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다이빙하는 데로 가자.”
“벌써? 아직 츄야한테 제대로 된 사랑 고백 끝내지 못했는데.”
“그건 다이빙하고 와서 해라.”
엄살을 피우듯이 말하는 다자이에게 쏘아붙인 나카하라는 그의 손을 잡아 이끌며 다이빙이 진행되는 절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같이한다고 했나 고민하던 다자이는, 이제는 늦었다는 것을 알고 체념한 모습으로 그와 함께 새하얀 백사장을 걸어 지나갔다. 다자이는 햇살을 반사해 반짝거리며 별빛같이 빛나는 모래를 한 번씩 헤집듯 밟아보며 앞서 걸어나가는 나카하라에게 ‘올 때, 여기 천천히 걸어보자.’라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앞만 보고 나아가던 고개를 돌려 그에게 다시 오고 싶은지 물었다. 다자이는 모래만큼이나 반짝거리는 주황빛 머리칼을 흩트리며 걷는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웬일이냐. 네가 이런 데를 다시 와보고 싶다고도 말하고.”
“이렇게 걸으면서 보니까 예뻐서….”
그런데 츄야가 더 예쁘네. 분명 뒤의 말까지 말했다면 웃으며 걸어나가던 나카하라가 부끄러움에 못 이겨 주먹을 날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게 웃어버리며 그의 걸음걸이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한 줄로 이어졌던 발자국이 마주 이어지기 시작하자, 걷기도 더욱 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자이는 기대감을 잔득 안고 걸어나가는 나카하라를 바라보며, 이런 바다라면 며칠 더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마음을 고쳤다. 물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다이빙을 겪고 난 뒤에는 또 생각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
한껏 내리쬐던 햇볕도 제풀에 지친 듯 한풀 꺾였다.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잠시 쉴 겸 풀 사이드바에서 음료를 시킨 뒤, 핑크빛이 섞인 주홍빛 노을이 모래사장을 뒤덮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분명 대화를 나누던 도중이었지만, 이런 장관은 하루 이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말을 아끼고 바다를 눈에 담았다. 그동안 살아오며 적지 않은 바다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넓게 펼쳐진 바다에서의 장관을 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요코하마의 풍경은, 이런 자연의 한 폭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말 예쁘네….”
조개같이 다문 입술을 먼저 뗀 것은 나카하라였다.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경관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의 의견에 동의를 얹었다. 앞에 시켜둔 칵테일과 얼음이 가득 든 위스키가 무안해질 정도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두 사람은, 해가 노을을 몰고 돌아가며 어둑한 하늘을 끌고 올 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서로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예쁜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올 걸 그랬네.”
더 많이 보지 못해 아쉽다는 듯이 말한 나카하라는 휴양지에 왔으면 꼭 시켜야 하는 칵테일인 피나콜라다를 휘저으며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다자이는 아까까지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인지 말을 아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자이는 얼음이 녹아 물과 분리되어있던 위스키를 저어 한모금 마시고는, ‘츄야 말 듣기를 잘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래, 어른 말씀 잘 들으면 떡이 하나 더 생긴다니까?”
“...어른이면 얼마나 어른이길래 그래.”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나카하라의 말에 키득거리며 대답한 다자이는 이럴 때만 엄청 어른인 척을 한다며 중얼거리고는 술을 홀짝거리는 나카하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혼여행 때도 이랬던가. 고작 몇 년 전의 기억이었지만, 추억을 곱씹는 사람이 아니었던 다자이는 밤바다가 파도치는 것을 내다보는 나카하라에게 ‘우리 신혼여행 때는 이렇게 안 좋았던 것 같은데.’라고 운을 띄웠다.
“응, 좋았을 리가 없지. 신혼여행에서도 파파라치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네가 결혼 전에 아무것도 말 안 해주고 억지로 다 떠넘겼다고 소리 지르면서 화냈잖아.”
“아, 그거 신혼여행 때였어? 그때 츄야 엄청 무서웠는데.”
다자이는 위스키 잔 안에 든 얼음을 살살 흔들며 이제는 전부 추억이라며 웃어버렸다. 나카하라는 ‘추억은 개뿔…. 그때 파파라치한테 욕한 사진 아직도 돌아다니거든?’이라고 대꾸하면서도 작게 피식거렸다. 나카하라는 대부분 잊은 다자이와 다르게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었던 연애 때가 더 좋았다고 소리치던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뒤돌아서던 다자이의 모습도 생생히 떠올랐다. 조금 충격받아서 그런가. 다른 술도 시켜보자며 메뉴판을 든 다자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나이뿐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역시…. 원수도 같이 살면 정들게 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츄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다자이는 무슨 이유로 나카하라가 저 말을 중얼거렸는지 알아채고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다자이는 ‘분명 츄야였다면 원수를 때려잡고 혼자 살았을 거야.’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더 마시고 싶은 건 없는지 물었다. 나카하라는 아직 반쯤 남은 피나콜라다를 보여주며 고개를 저었고, 다자이는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바로 주문하며 주번을 두리번거렸다.
“이번 여행은 비밀리에 와서 그런가. 딱히 방해하는 사람이 없네. 다음에도 이렇게 오자.”
“아니야. 파파라치라도 어디 있겠지. 여기는 호텔 사용하는 사람들 밖에 못오는 곳이니까 못 들어오는 거고.”
“우리 쫓아다니는 파파라치 이제 없지 않나?”
다자이는 위스키 잔에 담긴 얼음을 하나 입에 물어 어눌한 말투로 ‘츄야가 예전에 술 마시고 파파라치 카메라에 음식 던져서 전부 쫓아냈잖아. 그 뒤로 한 명도 안 쫓아다녀.’라고 설명하고는 얼음을 깨 먹기 시작했다. 나카하라는 기억 안 난다며 어깨를 으쓱였지만, 다자이는 사카구치가 그 사건을 무마시키느라 고생했었다고 넋두리를 하며 턱을 괴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 그런 것만 기억 잘 한다?”
“그때 츄야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가.”
키득거리며 말한 다자이는 레몬이 장식된 칵테일을 받아 홀짝이며 나카하라를 마주 보았다. 누가 보면 몇십 년 같이 산 부부인 줄 알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나카하라는 조심스럽게 깍지를 껴오는 다자이의 행동을 피하지 않았다.
“첫 신혼여행은 별로였지만, 앞으로는 행복하게 해줄게.”
“당연한 거 아니냐? 못하면 바다에 던져버린다.”
다자이는 살벌한 말을 하면서도 활짝 미소를 짓는 나카하라를 보며 마주 웃고는 ‘나중에 츄야 허리 아파서 못 던질 때쯤 그래야지.’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나카하라는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며 중얼거리고는 운동 게을리하지 않고 나중에 늙어서도 너 정도는 던질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늙을 때까지 같이 산다는 거네. 다자이는 속으로 한 생각에 가슴께가 간질거려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나카하라와 함께라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웃어버리고는 나카하라가 응시하는 완연한 밤바다가 된 괌의 풍경으로 같이 눈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