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스독/다자츄

[다자츄] 나와 너의 사계.4

송화우연 2020. 1. 13. 00:56

봄이 오는 소리는 별다른 게 아니다. 읍내에서 씨감자를 팔고 비닐하우스에서 기르던 모종들을 하나둘씩 꺼내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일 때, 정말 봄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카하라는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에 낀 장갑을 벗고, 모종의 이파리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아직 여린 이파리가 힘없이 찰랑거렸다. 나카하라는 모종을 한 판 구매하여 옆에서 걷고 있던 다자이의 팔에 걸어주었다. 다자이는 별다른 말 없이 모종들을 바라보며 ‘잘 커야 할 텐데.’라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아직 봄이 오지는 않았지만, 시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봄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 온다는 것은 분명 겨울과의 이별이었다. 나카하라는 은은하게 남은 아쉬움에 고민스러운 얼굴로 시장을 나서려 했다. 분명 겨울이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집이 비좁아 코타츠를 꺼내지는 못해도 겨울이라면 꼭 해야하는 것. 그것은 특정한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나카하라는 그걸 까먹고 있었다니 말이 안 된다며 중얼거리고는 읍내 시장에서 두부와 곤약, 그리고 숙주와 얇게 저민 고기를 장바구니에 담고 이제 됐다며 다자이에게 어서 가자는 듯이 손짓했다. 다자이는 양손이 전부 모종으로 묵직했다.

“츄야, 이거 언제 다 심게? 허리 부서지는 거 아니야?”

“안 부서져. 너도 같이 심을 거니까 내 걱정은 마라.”

‘그건 듣도 보도 못한 소리인데.’ 다자이는 자신도 동참시킨 밭일을 상상하다 고개를 젓고는 어떻게 도망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하지만 나카하라의 부탁에서 도망친다면 다음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 벌써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다자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카하라는 히터가 너무 세다며 버튼을 눌러 끄고 창문을 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을 에던 차가운 바람은 조금씩 녹아내린 것인지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나카하라는 상쾌한 산 공기를 담아두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조금 속도를 줄여 산길을 지나가는 다자이에게 속도를 올려보라고 말했다. 나카하라의 요구에 다자이는 ‘엇, 정말 그래도 되나? 쿠니키다 군이 절대 과속하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대답하며 커브 길을 안정적으로 돌았다.

“나랑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올려! 비밀로 해줄 테니까.”

나카하라는 빠르게 달리는 차에서 시원한 공기를 그대로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보기에 험준한 산길이 아닌 이곳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운전대를 잡은 다자이를 보챘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보챔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몇 번을 나카하라에게 되묻고는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액셀을 강하게 밟으며 빠른 속도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앞 좌석에 앉아있음에도 그대로 뒷좌석까지 밀려버리는 압력을 받고 눈 앞이 깜깜 해지는 것 같았다. 뺨을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산 공기는 느껴지지 않고 지옥 문턱의 공기가 그의 코끝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나카하라는 커브 길을 따라 흔들리는 자신의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큰 소리로 다자이를 부르며 그에게 운전을 멈추라고 이야기했지만, 다자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이 우악스럽게 운전했다. 나카하라는 시골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자동차는 나카하라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제 속도를 찾았다.

“너, 다시는 운전하지 마.”

“에, 그러면 츄야는 누구랑 읍내를 가나?”

‘걸어서라도 나 혼자 간다.’ 나카하라는 하늘의 모든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며 다자이에게 말했고, 다자이는 한결 상쾌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일탈이었다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들리는 시끌벅적한 해프닝에 산은 기뻐 보였지만, 나카하라는 몇 년이 늙은 기분이었다.

 

***

 

아까의 과속 사건으로 인해 피곤해진 정신을 다잡은 나카하라는 사 온 모종을 온기가 있는 창고에 넣어두고 음식 재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아까 나카하라에게 몇 번 쥐어 박힌 부분을 연신 문지르며 아프다는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벼운 잎채소들부터, 무거운 계란을 전부 들여오던 나카하라는 엄살을 그만 부리고 밥이 먹고 싶으면 어서 움직이라고 말했다. 이게 21세기 농노지 뭐야. 다자이는 입을 비죽 내민 채 중얼거리며 바구니 안에 물건을 깔끔하게 냉장고 안으로 넣었다. 나카하라는 무슨 일로 말을 잘 듣냐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다자이는 뭔가 강아지라도 된 기분이었지만, 운전에 이어 입을 잘못 놀리면 분명 저녁밥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노닥거릴 시간도 없이 쫓겨날 거라는 생각에 아무런 말 없이 거실에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츄야, 밥은?”
“내가 네 엄마인 줄 아냐, 진짜.”

하지만 나카하라는 투덜거리면서도 식사 준비를 했다. 읍내에 아침부터 다녀왔음에도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밖은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겨울은 이게 문제라니까, 낮이 짧아. 나카하라는 곧 오게 될 봄은 그러지 않을 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재료를 씻고 준비했다. 전에 사둔 쌈배추는 먹기 좋게 썰어두고 청경채는 잎을 전부 떼어둔다. 그리고 숙주와 쑥갓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손질을 해두고 다른 뜰채 바구니에 올려두었다. 다자이는 언제 자리를 바꾼 것인지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 나카하라가 채소를 씻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파리에 먼지 하나도 안된다는 듯이 깨끗한 물에 여러 번 채소를 씻던 나카하라는 마지막으로 물에 곤약을 담아두고는 시린 손에 숨을 불어넣으며 2인용 무쇠 냄비를 찬장 아래에서 꺼냈다.

“다자이, 창고에서 간이 가스레인지 좀 꺼내와 줘.”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말에 군소리 없이 곧장 일어나 가스레인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찾아왔다. 나카하라가 꺼낸 냄비를 본 것만으로도 그가 무슨 요리를 할지 짐작한 것인지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나카하라는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하는 다자이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냄비를 닦아내었다. 작은 종지 그릇에 달걀을 담아오는 것으로 저녁 식사 준비를 마쳤다. 나카하라는 무쇠 냄비를 간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고 그의 곁에 비계덩어리를 같이 두며 다자이에게 불을 켜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준비되었다는 듯이 불을 켜고 비계로 냄비에 기름칠한 뒤,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달궈진 냄비에서는 고기가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카하라는 육수를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며 조금 서두르는 모양새로 다자이가 앉아있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자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나카하라가 결정하도록 기다렸다. 나카하라는 어느 정도 고기가 익자, 간장을 부었다. 지글거리는 고기에 간장이 스며드는 모습이 꽤나 먹음직해 보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육수 조금과 먹고 싶었던 채소들을 차곡차곡 쌓고, 옆에는 곤약과 두부까지 올려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수를 더 부은 뒤 잠시 뚜껑을 닫아버린 나카하라는 ‘오랜만이야.’라고 말하는 다자이의 말에 웃어버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시간이 가장 기대되더라.”.”

“엇, 나도. 뭐부터 먹지하고 고민하게 되잖아.”

두 사람은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뭐부터 집을지에 관심이 몰려있었다. 나카하라는 숙주와 고기였고, 다자이는 일단 두부를 그릇으로 먼저 가져온 뒤 두부가 식을 때까지 고기를 먹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그게 뭐냐며 서로의 대답을 비웃었지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기전골은 모두가 배불리 먹는 메뉴이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올라가는 고기와 채소들, 그리고 마지막에 올라오는 음식은 뭐든 상관없었다. 찐득한 소스에 볶은 볶음밥이라던가, 너무 배부르다 싶으면 달걀과 육수를 넣어 죽을 끓인다는 것이 나카하라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 일단 이 식사를 마치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냄비 뚜껑에서 김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자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종지에 달걀을 까 넣어주었다. 나카하라는 고맙다고 말함과 동시에, 달걀을 빠르게 풀고 다자이의 달걀도 똑같이 풀어주었다. 이제 곧 냄비 뚜껑이 열릴 시간이었다. 달짝지근한 간장의 냄새가 강해지자, 나카하라는 셋을 센 뒤 냄비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는 아직 숨이 죽지 않은 쑥갓과 배추가 고기 위를 아슬아슬하게 배회하고 있었고, 숙주는 고기와 뒤엉켜 있었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말했던 대로 숙주와 고기를 함께 집어 달걀물에 살짝 담갔다. 그리고 금방 빼낸 뒤,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뜨겁고 달달한 간장의 향과 달걀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흩어지며 금세 식욕을 돋았다. 다자이는 아직 두부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곤약을 먼저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김이 나는 곤약을 넣기 전, 고기를 한 점 들어 그대로 달걀물에 담그고는 고기에 달걀옷을 입혀 한입에 넣었다. 행복이란 이런 맛이 아닐까? 따뜻하고 든든한 고기와 채소에 부드러운 달걀의 조화. 나카하라와 다자이는 한동안 아무런 대화 없이 전골에만 집중했다. 채소가 부족하면 채소를 더, 고기가 부족해지면 채소를 가장자리로 밀어놓고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째 고기인지 세기 힘들어졌을 때, 다자이는 ‘겨울이 가기 전에 행복한 만찬이네.’라고 중얼거리며 나카하라를 바라보았다.

“원래 봄이 오기 전에 한 번 이렇게 먹어야 해. 봄에는 일하니까 밥 챙기기가 힘들단 말이야.”

“츄야가 일 시킬 거 생각하니까 더 많이 먹어야겠다.”

다자이는 쑥갓을 한입에 넣으며 웃어버렸다. 나카하라는 오랜만에 농사일할 생각에 조금은 막막했지만, 오늘은 고기전골의 날이니 다른 걱정은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나카하라는 자신의 모친이 말하던 날씨가 추울 때 든든히 보충을 해주어야 이번 일 년을 잘 보낼 수 있다는 미신과도 같은 말을 생각하며 열심히 고기로 젓가락을 옮겼다. 뭐, 농사야 미래의 내가 알아서 잘하겠지. 나카하라는 막연하지만 든든한 생각을 하며 열심히 먹는데 집중했다. 절반가량 배가 찼다고 생각하며 젓가락이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을 때, 시골에 와서는 한 번도 울려본 적 없는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츄야, 츄야 거 같은데?’라고 말했지만, 나카하라는 전화 올 곳이 한 군데도 없었기에 의문스럽기만 했다. 받을까 받지 말까 고민하던 전화를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을 때, 나카하라는 조금 후회가 되었다.

“누군데 그래?”

나카하라는 연락처를 지웠음에도 익숙한 전 애인의 전화번호를 가만히 응시했다. 역시 받지 말자고 결정하여 전화를 뒤집어 놓았지만, 한 번 울린 전화는 끊임없이 오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나카하라의 표정에 ‘뭐…. 빚쟁이라도 돼?’라고 물었지만 나카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퇴색될 때는 말 못 할 쓰림이 있다. 나카하라는 곤약을 건져내 먹으며 ‘그냥 전 애인이야.’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전 애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란 분위기였다. ‘전’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전 애인의 존재만으로 이곳에 저 배낭 하나만을 들고 내려왔다던 나카하라가 뭔가 도시에 남기고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말을 아꼈다. 나카하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가 보아왔던 나카하라는 딱히 그 전 애인이라는 사람에게 미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 분위기가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별거 아니야. 다 끝났는데 왜 구질구질하게 전화를 거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니까.”

“저쪽은 츄야에게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 아, 물론 나는 잘 모르지만.”

“권태기에 저쪽이 바람피워서 헤어졌는데.”

다자이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왜 저런 놈이 츄야를?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왜 쓸데없이 그런 말을?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눈치를 보며 고기전골의 불의 세기를 조금 줄이고 ‘우리 천천히 먹자.’라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나카하라는 고기를 몇 점을 겹쳐 집어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나카하라의 전 애인과의 연애는 오래갔다면 오래간 연애였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나카하라가 극복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자신의 감정을 자로 재는 듯한 행위였다. 그의 ‘너에 대한 감정은 이 정도인 거야?’, ‘너는 나한테 별로 해주고 싶지 않아?’와 같은 말들은 나카하라의 사랑을 날카롭게 잘라내었다. 나카하라는 ‘내가 시간 내서 더 해주면 되지, 뭐가 그렇게 손해라고.’라는 생각으로 그의 요구를 하나둘씩 들어주며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그것은 나카하라 자신조차 좀먹는 일이었다는 것을 이곳에 내려오기 바로 직전에 알아차렸다. 사랑조차 날카롭다면 대체 무엇이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조금 메마른 상태에서도 이상함을 느꼈던 나카하라는 사랑을 자로 잰 듯이 뚝뚝 끊어 줄 수 없었던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무음으로 해도 끈질기게 전화하는 한 번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전화받을까?”?”

“어... 츄야가 하고 싶은 대로? 욕을 쏟아부어도 좋고, 츄야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봐.”

달이 채워지고 줄어가는 시간 동안, 나카하라의 마음에는 많은 것들이 채워졌다. 아직도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감정도 분명히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이곳의 따뜻한 햇빛을 받으면 금방 사그라지는 마음이었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에게 볶음밥이든 죽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후식으로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해두고는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다자이는 자신이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었지만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나카하라가 처음 왔을 때보다 밝아졌다는 것은 그의 눈에도 보이는 발전이었지만, 갓 골격을 쌓은 탑처럼 위태로운 것이었다. 게다가 한 번 무너진 적이 있으니, 다자이의 눈에는 더욱 불안해 보였다. 나카하라 아주머니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다자이는 문득 떠오르는 나카하라의 모친을 생각하며 그가 미리 다져둔 당근과 쑥갓, 그리고 파를 냄비에 볶았다. 간장 소스가 가득한 냄비에서는 맛있는 향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분명 따뜻한 차를 끓여주며 잘했다고만 하실 텐데, 그건 좀. 다자이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흰쌀밥을 볶던 다자이는 육수를 넣어 죽을 만들까, 아니면 볶음밥을 할까, 잠시간 고민했다.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채소들은 금세 밥과 뒤엉켜 맛있는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자이는 창 바로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걸으며 전화 통화를 하는 나카하라를 훔쳐보았다. 추운 겨울바람 사이로 날리는 입김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듯이 보였다. 다자이는 육수를 냄비에 부어 넣고 주걱으로 붙은 밥을 잘 풀어내어 죽을 만들 준비를 하였다. 추운 날에 아프면 안 되니까. 천천히 육수에 밥이 녹아들 듯이 풀어내고는 나카하라가 들어올 때까지 저어가며 정성스럽게 죽을 준비 하였다.. 나카하라는 생각보다 빠르게 전화를 마치고 들어왔다. ‘어우, 춥다.’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팔뚝을 쓸어내리던 그는, 다자이가 죽을 만들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으며 주걱을 뺏어 들었다.

“잘했어?”

“응, 욕이나 퍼부어 주려다가 그냥 이야기 좀 나눴다.”

정말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나카하라는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냐?’라고 다자이에게 되물었다. 다자이는 마음을 읽힌 건 아닐지 걱정하며 말을 돌렸지만, 입이 근질거리는 것은 나카하라인 것 같았다.. 나카하라는 죽을 덜어 다자이에게 먼저 건네주었다. 다자이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죽을 먼저 받고는 자신의 죽에 남은 달걀을 풀어 넣는 나카하라를 보며 자신도 똑같이 따라 했다. 나카하라는 죽을 한 입 먹은 후에야 조금 속이 풀린다고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지금 고향에 와있고, 네가 없어도 행복하다고 말했어. 좀 생긴 연하남도 있다고 네 이야기도 팔아넘기듯 말하기도 했고.”

“그랬더니?”

나카하라의 입에서는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행복. 사실 이곳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그가 이곳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자이는 긴장이 한결 풀린 표정이 되어서는 나카하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카하라는 그러자 아무런 말도 안 하고‘아, 그렇구나.’라던가 ‘응.’으로 대꾸하던 자신의 전 애인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면 재미있어했다. 나카하라는 소소한 복수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다자이의 생각에는 지금 전화를 건 그 ‘전 애인’이라는 작자에게는 가장 큰 복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활짝 미소를 지으며 죽이 맛있다고 말하는 나카하라에게 다자이는 평소보다 장난스럽게 자신이 잘 만든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카하라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계산보다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행복했고,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는다면 그것에도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풍족함을 느꼈다. 나카하라는 굳이 연애한다거나 특정한 사람이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도시에서였다면 어땠을까 고민하던 나카하라는 이미 두고 온 과거는 아직 꺼내 보지 말자며 생각을 묻어두었다. 역시 이 행복의 진원지는 앞에 앉은 갑자기 나타난 이상하면서도 재미있는 남자 때문이었을까. 나카하라는 문득 다자이를 보며 생각했지만, 기분 좋게 웃는 그에게 죽을 더 떠주느라 금세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잊어버렸다. 사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없었다. 나카하라는 꽉 찬 배를 두드리며 등을 벽에 기대었다. 어깨에 가득 올려두었던 짐 중 하나를 내던진 기분이었다. 다자이는 한결 가벼운 표정의 나카하라에게 ‘잘 먹었어?’라고 물었다. 나카하라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대화할 때마다 김이 나는 추운 겨울은 이제 꼬리만을 남긴 채 봄이 올 자리를 천천히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곧 오는 봄에도 천천히 채워보자고 생각하며 다자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봄에도 잘 부탁한다.”

다자이는 이 인사가 농사만을 부탁하는 인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도. 잘 부탁해, 츄야.”

다자이의 시선 끝, 나카하라의 웃는 얼굴에는 이미 봄이 온 듯싶었다. 두 사람은 밖의 겨울을 대신해 곧 오게 될 봄을 대비하여 미리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을 꺼내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