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란지]새벽의 바다 上

문스독/리퀘 2016. 12. 10. 05:30

이 망망대해에서 너를 찾을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수 있을 것 같아. 란지에는 바다가 창문 한가득 들어오는 호텔방에 일기장을 펴둔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만히 보이는 바다는 공허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잔잔한 파도가 치는 저 바다가 좋은 안식처나, 기억에 담고 싶은 장면중 하나겠지만, 란지에에게 저 바다는 이제는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벌써 몇 번인건지. 창문을 한 번 내다 볼 때마다 한숨을 한 번씩 쉬게 되는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갔던 아름다운 이 해협은, 란지에에게는 지옥 같은 곳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 카르디가 없어졌을 때는 그저 그가 그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어딘가에서 또 어여쁜 장소를 찾아 헤매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보내던 시간이 일주일이 흐르자 란지에는 점점 불안해 졌다. 격주로 보내던 엽서도 메시지도 없어지자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그와 자주 같이 여행을 떠났던 그의 무리들에게 이리저리 수소문 해보았지만, 단독 촬영이라며 혼자 떠났던 여행이니 만큼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가 사라진지 이주가 되었을 무렵, 란지에는 직접 짐을 싸서 그가 마지막으로 엽서를 보낸 곳을 떠났다. 철새가 왕래하고 경관이 아름다운 이 해협을 그는 자주 언급했던 것이 기억난다. 꼭 같이 가서 구경하고 싶다고 환히 웃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혼자 걷는 해변은 비도오고 칙칙하니 어디라도 나타나서 손잡고 같이 걸었으면 싶다는 생각을 하며 찾아온 것이 이 번째까지 합해 15번이 되었다. 란지에는 생각을 줄이기 위해 일기장을 덮고 푹신한 이불 속으로 몸을 묻었다. 이제는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친구들의 말에도 그저 매달 이곳을 찾고 있다. 물론 그에 대한 단서라고는 엽서 한 장뿐이고, 마을 사람들은 이곳은 관광객이 많아 잘 모른다는 말이 다였다. 비가 그쳤는지 빗소리가 그쳤다. 그가 도착했을 때부터 쏟아지던 비는 그의 기분을 더욱 저조하게 만들었다. 나른히 침대에 누워 포기를 생각하던 란지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그의 물건들과 반지를 보며 차마 그를 포기할 수 없다 되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바에야 그냥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정한 그는 겉옷과 지갑만을 챙겨 나왔다. 작은 섬이라 성수기가 아닌 이상 사람도 얼마 없는 이곳은 한적했다. 천천히 호텔을 나와 바닷가 쪽으로 걷던 그는 해변에서 보이는 사람의 인영에 가만히 들어다 보았다. 회색머리, 큰 키, 편안한 옷차림. 란지에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그 일 것이라 확신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인 자신이니까. 그는 낼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뛰어 해변 가로 내려갔다.

“카르디!”

숨이 차 멀리서 까지 들리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그는 들은 듯 했다. 게다가 카르디의 이름에 돌아보기 까지 했으니 란지에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올만큼 뛰어왔다.

“카르디 잠시만.”

그 회색머리 남자의 어깨를 잡자마자, 란지에는 호흡곤란으로 그대로 허리를 숙여 헉헉대었다. 남자는 허리를 숙이며 숨을 고를 란지에를 일으켜주며 앞으로 숙이면 더 어지러우니 조심하라고 까지 일러주었다. 그런 행동에 잠시 흠칫하던 란지에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같은 이목구비, 같은 눈동자, 같은 머리색, 비슷한 체형. 안 닮은 게 없는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왜. 란지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파왔다. 일단은 이 남자가 카르디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참을 수 없는 실망감에 눈에서 그대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순간 자신의 눈물에 당황한 란지에가 입고 있던 가디건 소매로 눈가를 닦으려 하자 그 남자는 먼저 손을 뻗어 란지에의 뺨에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일단 호텔로 돌아가서 차라도 한잔 할까요?”

그는 란지에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하며 미소 지었다. 천천히 걸어 같이 호텔로 가는 중에도 란지에는 그의 행동에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걷는 걸음걸이, 걸으면서 살짝 흔들리는 손, 머리카락 한 올까지 눈여겨보았다. 조슈아는 호텔로 도착하자 란지에를 안내하듯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꼭대기 펜트하우스 층을 눌렀다. 란지에는 그 남자의 행동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있어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층에 도착해서 바로 앞에 문을 열자 작은 호텔방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방이 보였다. 거실부터 침실 주방까지 완비된 층보다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란지에에게는 중요했다.

“누구신가요.”

누구신데 저의 애인의 모습을 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하는 거죠. 질문의 본질을 눌러두며 란지에는 질문했다. 그는 너무 급해하지 말라며 그를 소파에 앉혀두고는 차를 한 잔 타와 란지에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까 만졌을 때 손이 너무 차가워서요. 제 이름은 조슈아 폰 아르님입니다.”

란지에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이 카르디가 아니란 것을 인지한 순간, 란지에는 자리에 일어나 컵을 내려놓았다.

“저는 그냥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한 것 같군요.”

한 입도 대지 않은 차를 잘 마셨다 인사한 란지에는 그대로 돌아서 방문으로 향해 걸었다.

“혹시 찾고 있는 사람이 막스 카르디인가요?”

조슈아의 입에서 들린 연인의 이름에 란지에는 흠칫하고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성큼성큼 다시 뒤돌아 그를 향해 걸어간 란지에는 그의 행방을 아는지 그에게 물었다. 란지에의 목소리는 카르디가 그리운 만큼의 절박함이 가득 묻어났다. 조슈아는 그런 란지에를 가만히 응시했다. 방금 눈물을 떨궈 촉촉한 붉은 눈을 바라보던 조슈아는 란지에를 소파에 앉히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가 사라졌다는 말은 저도 들었습니다. 혹시 그의 친인척이신가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조슈아의 목소리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자신을 타박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자신이 아직 통성명조차 안 한 것을 깨닳고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늦었지만 란지에 로젠크란츠입니다. 친인척이라기 보단...그의 연인입니다.”

조슈아는 란지에의 말에 눈을 키웠다. 놀랐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란지에는 자신의 손에 깍지를 껴 매만졌다. 항상 이런 일이 있으면 친구라고 변명하긴 했지만 그는 카르디의 행방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조슈아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란지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나갔다.

“연인분이...갑자기 실종되어서 상심이 크시겠네요. 안 그래도 아르님 연구소에서 그가 휴가로 이곳에 왔다가 실종된 것이라고 정보를 입수해서 소장인 제가 직접 와서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친인척이 따로 없었다고 들어서요. 씁쓸한 미소를 짓는 조슈아의 말에 란지에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래로 보이는 그가 카르디가 있던 해양연구소의 소장이라니. 실례라는 생각에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는 란지에의 표정을 보던 조슈아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다들 그렇게 놀라니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직접 다른 연구를 맡길 만큼 유능하고 열정 넘치는 연구원이었으니까요. 저희 연구소에서도 그의 실종소식에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그의 말에 끄덕이던 란지에는 그의 실종신고를 하던 날의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듯했다. 어두운 란지에의 표정에 조슈아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다. 조슈아는 다 마신 컵을 내려두고 테이블 앞에 놓인 작은 사탕 상자를 열어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그 사탕은...”

카르디의 쓴 사탕. 조슈아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란지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탕을 보며 아까 지어보였던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카르디가 자주 먹던 사탕에 반응할 정도인거면 이제까지 얼마나 억눌려 있던 것인지. 자신도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진 란지에는 몸이 안 좋아서 그만 일어나겠다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휘청거리는 그를 보며 일어난 조슈아는 그를 엘리베이터까지 부축해 대려다 주었다. 란지에는 그저 가볍게 목례한 뒤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파묻히듯 누운 란지에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소리, 향기, 습관, 자주 먹던 음식 까지. 카르디가 있었던 연구소 소장이라는 남자는 카르디와 닮아있었다.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자신이 이성적이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란지에는 이불 위를 뒤척이며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카르디...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어디에라도 있어줘.”

어디라도 상관없으니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란지에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꿈을 자주 꾸지는 않았지만, 그를 잃은 뒤에는 카르디와 나누었던 추억들이 다시 반복되고는 하였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 품에서 일어난다던지, 같이 아침을 차려먹는다던지, 같이 산책을 하는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꿈은 행복했고, 이어난 뒤의 현실은 항상 냉혹했다. 이번에도 그의 꿈이길, 란지에는 무의식 적으로 그를 찾았다. 따뜻한 남쪽의 바닷바람이 부는 바닷가였다. 그와 가본적이 있던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란지에는 멀리서 걸어오는 인영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빠른 걸음은 뜀박질로 바뀌었다. 닿지 않았던 뒷모습은 점점 가까워졌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터질 것 같다고 느껴질 만큼 뛰자 그의 옷깃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숨이 차 헉헉대며 호흡부족으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이고 있자 그는 손을 뻗어 자신을 일으켜 마주보게 했다.

“고개를 숙이면 더 어지러울 수 있어요.”

마주본 얼굴은 카르디였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카르디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남자는 아까 본 조슈아 폰 아르님이었다. 가만히 자신의 눈을 응시하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뭔가 이상하냐는 듯이 자신의 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란지에?”

란지에는 그대로 침대에서 튕겨나듯 일어났다. 얼굴을 파묻고 자서인지 숨을 고르던 그는 방금 꾼 기묘한 꿈을 다시 되뇌었다. 카르디가 조슈아처럼...아니 조슈아라는 사람이 카르디처럼...?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던 란지에는 일어나 생수 한 병을 열어 그대로 전부 마셔버렸다. 꿈에 잡혀 산채로 먹히는 기분이었다. 란지에는 이성이 돌아와 안정되어가자 그저 심적으로 힘들어 시답지 않은 꿈을 꾸었다 치부해 버렸다. 그리고는 잠을 자지 않게 하기위해 방의 불을 모조리 켜고 창가에 앉았다. 바람에 파도치는 밤바다는 밤을 먹은 듯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듯이. 란지에는 먹히지 않으려는 듯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아침 해가 날 때까지 바다만을 응시했다.

posted by 송화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