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모리]알오버스 임신물.3

문스독/다른 커플링 2019. 4. 12. 19:22

 

 

모리는 매일 자신이 퇴근할 때쯤 오는 전화가 기다려졌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이런 기분은 거의 느껴본 적이 없던 그는 이렇게 챙김을 받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며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휴게실로 향했다. 아이는 아직 있는지도 모를 만큼 작고,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나마 아이의 아버지가 조금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다행인 걸까. 오늘은 뭘 먹으러 가자고 할까나. 예상이 가는 후쿠자와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해보던 모리는, 휴게실 앞에 햇볕이 드는 창가 앞에서 잠시간 따뜻한 온기를 맞으며 서 있었다. 은은한 볕이 드는 나른한 오후 시간, 이제 올 때쯤이 되었는데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때면 여지없이 진동이 울린다. 모리는 애라도 태우는 듯 진동이 울리면 다섯 번쯤 울렸을 때 전화를 받는다. 전화 너머의 후쿠자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던하고 곧은 목소리로 밥을 먹었는지 모리에게 묻는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딱히 입덧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만.“

모리의 말에도 전화 너머의 후쿠자와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싶었다. 조금은 제멋대로인 모리의 성격을 파악한 것인지 골고루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후쿠자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났다. 모리는 이 걱정이 온전히 자신을 위한 걱정이 아님에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햇볕을 맞아서인지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식히던 모리는 역으로 그에게 안부를 물으며 오늘은 어땠는지 물었다. 후쿠자와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고 말하자, 모리는 작게 웃으며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누가 본다면 연인과 다름이 없는 대화였지만, 두 사람은 자각이 없었다. 모리는 후쿠자와와 자신이 서로 책임질 부분이 있으니만큼, 그와의 감정까지 문제가 된다면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심 같은 것은 섞지 말고 조심히 행동하자고 생각했지만, 생각만치 행동이 잘되지 않았다. 모리는 후쿠자와의 고집에 자신답지 않게 끌려다니는 일이나, 그도 자신의 고집은 어지간해서는 전부 들어주던 것을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물론 후쿠자와가 자신의 고집을 들어주는 것은 그편이 산모에게 좋다고 설득하여서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멀리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 그런가. 가만히 생각하던 모리는 휴게실로 하나둘씩 들어오는 동료 의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오늘은 몇 시에 퇴근하는지 묻는 후쿠자와에게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한다는 언질 줬다.

오늘도 기다리실 겁니까?“

[일과라고 생각하고 있다만.]

하여간 꽉 막힌 사람이라니까. 모리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전화를 먼저 끊지 않고 기다리는 전화 너머의 소리를 잠시 듣고 있다가 전화를 끊었다. 동료 의사들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리의 표정을 보며 연인인가 보네요, 모리 선생님?’이라고 물으며 짓궂게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모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아직 아무것도 확실히 하고 싶지 않았다. 모리는 . 요새 그런 사람이 있긴 하죠.’라고 대꾸하고는 퇴근하면 뭘 먹을지 생각하며 행복한 발걸음으로 휴게실을 나섰다.

그 시각 후쿠자와는 드디어 대기 줄에서 벗어나 만쥬가 가득 든 쇼핑백을 들고 나왔다. 저번부터 모리가 생각난다면서 중얼거리던 만쥬 집을 찾는 시간만 이틀, 그리고 매번 품절로 인해 사지 못했던 하루를 끝으로 후쿠자와는 드디어 그 만쥬를 종류별로 살 수 있었다. 후쿠자와는 모리가 좋아할 생각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후쿠자와는 모리가 무언가 먹고 싶다는 말을 대놓고 하지 않아 고민스러운 나날을 보냈었다. 하지만 에도가와가 무언가 먹고 싶을 때마다 중얼거렸던 것과 같은 행동 양상을 보이는 모리의 모습에, 후쿠자와는 시험차 약 삼 일간 노래를 부르던 딸기 쇼트케이크를 가지고 방문했었다. 그때의 그의 표정이란.

내가 케이크였다면 기뻤을 것 같군.“

가만히 중얼거리던 후쿠자와는 자기 자신이 무어라 중얼거리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후쿠자와가 사 온 만쥬를 기웃거리던 에도가와는 그의 한마디에 사장은 케이크가 되기에는 너무 딱딱해.’라고 말하며 모리에게 주려고 산 만쥬가 아닌 작은 봉투에 든 만쥬를 꺼내 먹었다. 후쿠자와는 에도가와가 꾸중하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에도가와는 풀어진 후쿠자와의 표정을 보며 그를 떠보기라도 하듯 그 남자, 좋아하나 봐?’라고 물었다.

내가 말인가? 잘 모르겠는데.“

거짓말. 에도가와는 만쥬로 가득 찬 입을 오물거리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도로 삼켰다. 사장도 다 컸는데 내가 연애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붉어진 얼굴로 멍하니 한곳을 응시하는 후쿠자와는 에도가와의 질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에도가와가 만쥬를 세 개쯤 뜯었을 때, 보다 못한 그가 후쿠자와에게 일러주지 않았다면 후쿠자와는 약속 시각에 늦었을 것이 분명했다.

사장! 만쥬 가져가야지!“

정신도 같이 차리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하나 남은 만쥬 포장지를 까던 에도가와는 걱정이 되는지 창문가에 앉아 후쿠자와가 가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그것을 보던 쿠니키다는 사장님께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지만, 에도가와는 그저 늦바람이 났다며 손을 내저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사장도 다 컸는데 뭘.“

그의 앞에 우유 컵을 내려두던 쿠니키다는 에도가와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토 달지 않았다.

 

***

 

겨우겨우 모리의 퇴근 시각에 맞춰 병원에 도착한 후쿠자와는 병원 입구 곁에 놓여있는 벤치에 앉았다. 이제는 조금 후끈해진 봄기운이 해를 통해 느껴지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던 후쿠자와는 벤치 뒤에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꽃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꽃구경이라도 가지고 해볼까. 꽃구경 정도라면. 데이트라고 부르지 않을 정도의 만남을 생각하던 후쿠자와는 홧홧해지는 뺨을 손으로 눌러가며 진정시켰다. 이제 여름옷을 좀 꺼내놓아야겠군. 자신의 뺨에 열이 오르는 것을 따뜻한 햇볕 탓으로 돌린 그는, 바람에 보기 좋게 흔들리는 꽃나무를 가만히 응시했다.

후쿠자와 씨, 일찍 와계셨네요.“

모리는 꽃을 바라보는 그의 뒤에서 그를 부르며 나타났다. 치렁거리는 의사가운 대신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온 그의 옷차림은 완연한 봄이었다. 후쿠자와는 시간을 맞추다 보니 조금 서두르게 되어서 말입니다. 모리 씨는 잘 마치고 오셨습니까?’라고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리는 아까 전화상의 후쿠자와와 같이 평소랑 똑같았다고 대답하고는 웃어버렸다. 모리는 후쿠자와에게 조금만 앉아있다 가자고 말하며,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던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확인했다.

, 꽃이 정말 예쁘게 피웠네요.“

후쿠자와와 같은 시선의 끝에는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봉오리가 져 있는 꽃도, 이미 꽃잎이 활짝 열린 꽃도 아름답다 생각하던 모리는, 아까까지만 해도 꽃만을 바라보던 후쿠자와가 꽃나무 쪽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후쿠자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리는 꽃을 가리키며 예쁘죠?’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후쿠자와는 꽃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 마냥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말에는 꽃놀이를 가도 좋겠어요.“

모리는 넌지시 그에게 물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 병원 사람들이 지나가다 보았다면 악마가 천사의 탈을 쓰고 있다며 뭐라 했겠지만, 뭐 어떤가. 후쿠자와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일 리 없었다. 후쿠자와는 예상치 못한 그의 제안에 눈만 껌뻑이며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후쿠자와는 스스로가 잘 못 들은 것은 아닐지 고민했다. 다시 그에게 꽃놀이 말입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놀라서 떼어지지 않는 입술에 빠르게 되묻지 못했다. 모리는 뭔가 자신이 실수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 없는 후쿠자와의 반응에 싫다면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자존심 상하는 기분에 금세 미간을 좁힌 그는, 아니라며 일어나는 그를 따라 일어나 앞을 막아선 후쿠자와를 흘겨보았다. 새침데기라는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텐데. 후쿠자와는 모릭 화가 나 자칫 심각해질 수도 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그가 귀엽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면 분명 그가 더욱 화낼 것이 분명하기에, 말을 아끼며 그를 달랬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그랬습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꽃놀이. 같이 갑시다.“

횡설수설하며 변명하던 후쿠자와는, ‘그럼 갈 거예요?’라고 묻는 모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리는 제어가 되지 않는 감정을 최대한 가라앉히고는 그에게 가고 싶은 곳을 먼저 생각해보라 말했다. 모리는 그 말을 끝으로 그를 지나쳐 걸어나갔다. 후쿠자와는 찡그려져 있던 그의 미간이 풀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열심히 찾아보겠다며 먼저 걸어나간 그의 보폭을 맞춰 따라 걸었다. 약 이 주 동안 함께했던 그의 퇴근길은 이제 익숙한 것을 넘어 마치 자신의 귀갓길과도 같이 느껴졌다. 후쿠자와는 익숙한 길을 걸으며 오늘 병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조잘거리는 모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감정 표현이 풍부한 것도 임신 때문이려나. 지금과는 상반된 처음의 그를 생각해보던 후쿠자와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자신이 손에 든 봉투를 본 모리의 모습에 생각났다는 듯이 봉투를 그의 쪽으로 들어보였다.

그나저나 그 봉투는 뭔가요?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평소에는 빈손으로 오던 후쿠자와가, 생각보다 큰 봉투를 들고 온 것을 발견한 모리는 그에게 물었다. 후쿠자와는 그가 얼마나 좋아해 줄지 기대하며 봉투의 상표가 보이도록 모리에게 보여주었다. 모리는 그 봉투에 적힌 상표명을 보자마자 눈빛이 바뀌어 그와 봉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거 진짜인가요?“

저번부터 말씀하셔서 사 왔습니다. 모리 씨는 출근하시면 어디 멀리 가기 힘드시니까요.“

모리는 예상보다 더욱 감동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봉투를 받아든 그는, 묵직한 무게의 봉투를 열어보고 더욱 기분이 좋아진 표정이 되었다. 역시 사 오길 잘했군. 후쿠자와는 좋아하시는 맛을 몰라 일단은 전부 사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좋아서 뛰기 직전인 듯이 보이는 모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리는 어린아이같이 기뻐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최대한 신나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다 좋아하니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후쿠자와 씨.“

후쿠자와는 그를 그렇게 오래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환히 웃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진심으로 사 오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던 후쿠자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들어와서 맛을 보고 가라고 신나는 목소리로 말하는 모리의 말에 손을 내저었지만, 모리는 완강했다.

이거 정말 맛있습니다. 어서 들어오시기나 하세요.“

갑작스러운 초대에 고개를 연신 내젓던 후쿠자와는, 자신에게 손짓하며 그를 부르는 모리의 행동에 마지못해 그를 따라 들어갔다. 저런 표정으로 부르는데 어떻게 안 들어갈 수 있겠나. 작게 한숨을 내쉰 후쿠자와는 어서 차만 마시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후쿠자와가 문 안으로 들어오자 문을 닫고 샐쭉 웃는 모리의 모습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posted by 송화우연

[후쿠모리]알오버스 임신물.2

문스독/다른 커플링 2019. 4. 2. 01:21

 

모리의 한마디에 탐정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얼어붙었다. 후쿠자와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스승이자, 한 단체의 수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세간에서 말하는 나쁜 놈이라는 호칭이 붙을 만한 행동을 하다니. 두 사람의 사이에서 얼어붙은 나카지마는 결국 쿠니키다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갈 수 있었다. 모리는 잘 우려진 홍차를 홀짝거리며 후쿠자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후쿠자와는 많이 당황한 듯했다. 게다가 그 당황한 모습을 내보이기까지 하여 모리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렇게자리를 피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무척 당황스러웠을 텐데 죄송합니다.”

모리는 그의 사과에도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그의 사과가 마음에는 든 것인지 모리는 아까만큼 공격적인 눈초리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말을 아끼고 있었다. 후쿠자와는 평소 긴장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이 긴장되었다. 스승님께 막 배움을 가지기 시작하던 때와 같이 하오리를 주먹으로 곽 쥐어오던 그는, ‘그럼.’이라고 운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제 손으로 이 세포를 떼어내려 하는데, 그게 법에 걸린다는군요. 불법 의사가 되기에는 아직 제가 쌓아온 경력이 아쉬워서 이렇게 당신을 찾으려고 탐정사를 소개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돈뭉치를 두고 간 것도 사과받을 겸해서요.’ 모리의 말을 집중해 듣던 후쿠자와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모리에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모리는 생각 외로 잘 굽히고 들어오는 후쿠자와의 태도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모리는 연신 사과하는 후쿠자와에게 됐다는 듯이 손을 내저어 보이고는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듯이 구는 그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말했다.

우리 둘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니 만회하면 됩니다. 오늘 시간 괜찮으십니까? 바로 병원으로 가서 수술 날짜를 잡으려 하는데 동행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후쿠자와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생에 있을까 말까 한 일을 한꺼번에 겪은 후쿠자와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지만 모리 앞에서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 후쿠자와는 쿠니키다에게 대화가 잘 끝났다고 말하며 오늘 하루 동안 탐정사를 맡겼다. 쿠니키다는 여러모로 막중한 책임을 느끼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일에 전념했다. 후쿠자와가 먼저 앞장서 탐정사를 나섰다. 문을 나설 때마다 문을 열어주는 그는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예의있고 배려심이 묻어났지만, 모리는 그에게 문은 혼자 열 수 있으니 앞을 잘 보고 걸으시길 바라겠습니다.’라고 대꾸하고는 그와 같은 보폭으로 탐정사 건물을 나섰다. 모리를 배려하여 한 일임에도 그가 차갑게 대하는 것이 조금 마음이 쓰였지만, 후쿠자와는 그의 신경을 긁지 않는 쪽을 택했다. 병원은 작고 소박한 산부인과였다. 후쿠자와는 요새 누가 이런 병원을 찾지 싶었지만, 앞 장서는 모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병원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나름대로 명망 있으신 분이신데 눈에 띄면 안 되니까요. 물론 제가 자주 다니는 병원이라 온 겁니다.”

후쿠자와는 자신을 배려한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모리는 바로 병원 접수를 하고 자신을 부르는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후쿠자와는 아까같이 긴장된 모습으로 모리를 따라갔다. 모리와 의사는 괘나 친분이 있어 보였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문제없을 거라고 이야기하며 검사를 진행했다.

안녕하세요, 후쿠자와 씨. 보통 베타 분들은 문제없이 중절 수술을 할 수 있지만, 모리 씨가 극도로 예민하신 우성 오메가 셔서요. 후쿠자와 씨도 같이 검사에 참여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번에 보니까 페로몬이 그다지 강하지는 않아서 분명 열성일 것 같은데 말이죠.“

손을 내저으며 걱정 없다는 듯이 말하는 모리는 웃으며 동의를 구하듯 후쿠자와를 바라보았다. 후쿠자와는 어렸을 때 받았던 검사에서나 볼법한 우성, 열성이 무슨 상관인지 전혀 모르겠으나, 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알겠습니다.’라고 답하고는 간호사를 따라 검사실로 향했다. 검사는 매우 간단했다. 피를 조금 많이 뽑고, 러트사이클 주기를 물었다. 후쿠자와는 별거 아닌 검사를 마치고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다. 모리는 아까보다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검고 곧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속 시원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모리의 모습은 후쿠자와까지도 기쁘게 만들었다. 얼마 걸리지 않는다던 검사결과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듯했다. 모리는 아까같이 여유로운 표정이었으나, 조금 초조해진 듯 보였다. 모리는 결국 간호사와 의사가 검사결과를 가지고 나오자 미소를 띤 얼굴로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나 봅니다.’라고 말했다. 의사는 아까까지 모리와 화기애애하게 웃던 미소가 사라져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조금 가린 채 다시 자리에 앉은 의사는 모리 씨, 중절 수술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모리는 그 한마디가 그곳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 후쿠자와는 조금 화가 나보이기까지 한 모리를 진정시키며 의사에게 정중한 투로 무슨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의사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모리의 성격을 알아서인지, 여유롭던 표정이 가시고 조금 걱정 어린 표정이 된 의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후쿠자와 씨도 극 우성 알파이신 관계로 법적으로 중절 수술이 불가능합니다.“

모리는 배신당한 표정으로 후쿠자와를 바라보았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얕은 그 페로몬이 무슨 극 우성.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다 한숨을 크게 내쉰 모리는, ‘설마요.’라고 말하며 후쿠자와를 응시했다. 후쿠자와는 그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얼마 남지 않은 알파와 오메가의 개체 수를 맞추기 위해, 알파와 오메가의 중절 수술을 막는다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이 평범한 알파와 오메가였다면 특수한 경우라는 이유로 예외가 생길 수 있었지만, 극 우성 알파는 나라 안에서 개체 수 보존을 신경을 쓰고 있는 터라 법원을 거치지 않고는 무리였다.

그리고 법원을 거치면 이미 기간이 지나죠,“

이런 뭣 같은 상황이 있을 수 있지. 모리는 순간 입 앞까지 튀어나온 욕지기를 참을 수가 없어졌다. 모리는 후쿠자와 쪽이 당연히 열성이라 생각한 것이라 당당하게 중절 수술을 말할 수 있던 것이었다. 개 같은 나라 법. 모리는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쓸어넘겼던 머리를 잔뜩 헝클이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속전속결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후쿠자와는 짜증이 가득 찬 모리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아무도 입 열지 마십쇼. 아무것도 듣기 싫으니까.“

말 한마디를 내뱉으려던 후쿠자와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탈출구가 단단히 막혀 있었다. 모리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것인지, 고개를 번쩍 들어 의사를 바라보았다.

해외에서 수술은 어떻습니까.“

기록이 남아 분명 나중에 걸리게 될 겁니다. 두 분께서 연이시라면 되도록 낳는 쪽으로.“

모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후쿠자와조차 고개를 저으며 저희 둘, 모두에게 안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며 모리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이미 탐정사를 이끄는 후쿠자와보다, 인근 요코하마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모리의 경력은 이 사건으로 인해 위태로워 졌기 때문일까. 모리는 진정이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아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모리의 몸인지라 모리가 감수해야 할 일들이 더욱 커졌다. 모리는 혹시라도 후쿠자와가 여기서 발을 뺀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생각했다. 제정신으로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가 사람을 쉽게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의 모리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법원 청원 넣게 소견서 작성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후쿠자와 씨. 따라 나오세요.“

의사는 모리의 방법이 최선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운이 좋다면 수술 가능 기간 전에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리는 긴장에 입술을 뜯으며 진료실 밖에서 소견서를 기다렸다. 초조해 보이는 표정과 행동이 그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후쿠자와는 그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일단 조금 진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리는 그런 그의 행동조차 고까워 보이는지 됐습니다. 진정 가능한 후쿠자와 씨나 많이 드시죠.’라고 말하고는 다시 진료실 쪽을 바라보았다. 의사는 걱정이 되는지 그에게 직접 봉투를 전해주러 나왔다. 모리는 그 소견서를 받고, 감사하다는 인사 외에 아무런 말 없이 병원을 나섰다. 후쿠자와는 모리의 뒤를 쫓아가며 그가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서 걷던 와중, 모리는 어느 카페 앞에 멈추어 섰다. 그의 시선은 창가에 앉은 학생들의 파르페에 가 있었다.

후쿠자와 씨, 이리로 오세요.“

멈춰선 모리를 따라 선 그는, 모리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라서 카페로 들어갔다. 모리는 일부러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쓴 연차가 아까울 정도로 해결된 일이 없었다. 모리는 잠시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다가, 후쿠자와에게 뭘 마실 건지 물었다.

아니. 제가 사겠습니다. 모리 씨는 무슨 음료를 드시겠습니까.“

저는 저기 파르페요. 두 개 다 시켜주세요.“

후쿠자와는 학생들이 먹는 파르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나는 딸기와 바나나,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시럽이 가득 올려져 있었고. 하나는 키위와 딸기 생크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후쿠자와는 바로 자신의 녹차와 그의 파르페를 주문했다. 분명 임신 초기 때는 먹고 싶은 것을 잘 먹어야 한다고 했으니 두 개를 먹던, 세 개를 먹든 상관없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모리는 카페와 이질적이게 동떨어져 있는 후쿠자와를 가만히 응시했다. 과묵하고, 다부지고, 나름의 예의도 있고. 분명 생긴 것까지 쳤을 때 모리가 만났던 사람 가장 좋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번호만 묻고 나올 걸 술이 원수지. 모리는 자신의 실수에 혀를 차며 쟁반을 들고 오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후쿠자와는 별다른 말 없이 그의 앞에 파르페를 놓아주었다. 모리가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한 건지, 그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모리는 그가 사 온 파르페를 바로 먹기 시작했다. 빠르게 하나를 해치우고, 조금 기분이 나아졌을 때쯤,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후쿠자와를 발견한 모리는,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라고 물으며 다른 파르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잘 먹으니 보기 좋아 보고 있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예의가 묻어나는 말투가 몸에 배 있었다. 모리는 원래 그렇게 고지식하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으며 크림에 붙어있던 키위를 입에 물었다. 후쿠자와는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미없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는 말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린 모리는 잠시 크림을 깔끔히 먹는 데 집중하며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후쿠자와 씨, 만약에. 정말 정말 만약에라도 법원 청원이 잘 해결되지 않아서 아이를 낳아야 할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실수이니만큼 제가 해결하고 싶습니다.“

망설임 없이 말하는 그의 대답에 모리는 꽤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답이랑 다르네. 만약 조금이라도 망설였거나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면 모리는 그대로 얼굴에 물이라도 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더욱 고지식하고 더욱 책임감이 강한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거린 모리는 반쯤 먹은 파르페에 긴 파르페 숟가락을 꼽았다.

후쿠자와 씨 잘못만 있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조금 위안이 되네요. 이 뒤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임하려면 후쿠자와 씨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거라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준비하겠습니다. 일단 제 집에 편안하게 지내실 방을 준비해 둘 테니.“

”너무 가지는 말아주세요. 전 제 집에서 지낼겁니다. 지금도 나중에도 말이죠.

모리는 단칼에 거절하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후쿠자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뭔가 고민스러운 표정이었다. 딱히 정한 규칙도, 별다른 이야기도 없었다. 모리는 자신의 전화번호와, 집 주소, 근무하는 병원 위치를 알려준 뒤 그에게도 같은 정보를 요구했다. 후쿠자와는 특위의 바른 글씨로 그에게 자신의 정보를 적었다. 살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있었나. 후쿠자와는 단연코 없었다고 생각하며 한결 ㅍ난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리를 마주 보았다.

잘 부탁합니다. 역시 설탕이 좀 들어가니 사람이 마음이 유해지는군요.“

한 가지씩 알아 두어야 할 점이 생기고 있다. 이렇게 하나씩 쌓이다 보면 분명 서로에게 깊게 빠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후쿠자와는 제 생각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모리를 바라보았다. 모리는 파르페를 마저 다 먹고, ‘후쿠자와 씨는 단 것이 부족해 보이시는데. 허니 버터 토스트를 더 시키는 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후쿠자와는 수첩에 설탕이 중요하다는 말을 적으며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모리의 질문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토스트를 주문하기 위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핑크림은 얼마나 올리시겠습니까.“

지금 모리에게 제일 중요한 질문을 하며 말이다.

posted by 송화우연

[후쿠모리] 알오버스 임신물.1

문스독/다른 커플링 2019. 3. 29. 02:36

 

 

 

그래서찾으시는 분이 있으시다고 하셨죠?”

나카지마는 눈앞에서 홍차를 홀짝거리는 모리에게 조심스레 물으며 그의 맞은편 소파 자리에 앉았다. 급한 용무로 온 듯하면서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남자는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제 이름은 모리 오가이입니다. 직업은 의사입니다.’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카지마는 탐정사에서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만큼, 여러 사람을 접했기에 굳이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다. 모리가 말하는 것을 적기 위해 수첩을 펼치ㄴ나카지마는 본격적으로 그에게 질문 하기 시작했다.

네 모리 오가이씨찾으시는 분과는 어떤 관계이신 가요?”

그 날 처음 보았습니다만 굳이 관계를 물으신다면생물학적 아이 아버지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생물학적 아이 아버지? 나카지마는 차마 되물을 수 없어 수첩에 조심스레 그의 대답을 적었다. 아무리 탐정사에 별별 사람이 다 온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나카지마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음 질문을 생각했다.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그럼 그분과는언제, 어떻게 만나신 거죠?”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인상착의만으로는 찾기 힘든 걸까요?”

나카지마는 조금 당황한 듯이 보이는 남자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읽었다. 별다른 이야기가 아니라면 분명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이야기했겠지만, 그는 초조한 듯이 입술을 뜯었다. 나카지마는 범죄에 가담될 염려가 있어 대충이라도 설명해야 한다고 그를 설득했다. 모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

 

이미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술집 안은 시끄러웠다. 서로를 유혹하기 위해 이리저리 뒤섞이는 페로몬 향이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아 미간을 찌푸린 모리는 바텐더에게 두 번째 위스키를 부탁했다. 뼈 빠지게 일해서 돈 벌어 놨더니 뭐? 만나는 시간이 적어서 마음이 떠났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변변치 못한 놈이 말은 많아서. 모리는 바로 나온 잔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고는 씁쓸하게 퍼지는 알코올의 맛에 입맛을 다셨다. 답지 않게 오래 연애한 연인에게 차이고 구슬프게 찾아온 술집은, 무슨 연애의 장이라도 되는 모양새였다. 홀에서 춤을 춘답시고 서로를 유혹하고 부추기는 페로몬들은 알파 오메가 할 것 없이 잔뜩 뒤섞여 구역질까지 날 정도였다. 모리는 굳이 그 판에 뒤섞이고 싶지 않아 바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세 번째 잔을 달라고 컵을 내민 모리는, 바로 옆 옆자리에서 조용하게 술을 홀짝거리는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시끄러운 것을 유독 싫어하는 타입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이 난장판 속에 섞여 있는 모습이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모리는 달아오른 얼굴에 손등을 대보며 열기를 식혔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 잔뜩 붉어진 얼굴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술집에서 술을 마시지 물을 마시러 오겠나. 술기운이 섞여 의미 모를 자신감에 차오른 그는, 턱을 괸 채 그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자 왔습니까?”

남자는 잠시 모리를 가만히 응시하다 혼자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남자는 이 난장판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모양이었는지, 상쾌한 향이 나는 페로몬이 모리의 주변까지 뻗어 나오는 듯했다. 모리는 기분 좋게까지 느껴지는 페로몬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 그의 친우의 말에 의하면 사람 하나 홀리는 미소라고 할 법했지만, 남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저도 혼자인데 같이 마시지 않겠습니까?”

그 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는지, 아니면 대답을 했는지 모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그와 테킬라를 몇 잔씩 나눠 마신 뒤, 바로 술집 위에 있는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주저 없이 제일 위의 층을 골랐고, 모리는 그것이 나쁘지 않아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술집에서는 조용히 이야기만 나누다가, 둘만 남게 되자 모리는 점차 페로몬을 풀었다. 그가 달달한 향을 몸에 두르자, 술기운이 잔뜩 얹어진 남자가 모리에게 몸을 가까이했다. 두 사람은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입맞춤을 나누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밤이 깊다 못해 새벽이었고, 두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뒤의 기억은 정말 드문드문 떠올랐다. 그만하고 싶다고 밀어내다가도, 자신이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에게 매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나름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름. 불러 주겠나.”

간간이 기억나는 기억의 파편 속에서는 이런 말도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이름을 알려 주었다는 것일 텐데. 모리는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보아도 생각나지 않는 남자의 이름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삶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하루를 보낸 모리는 다음 날 차갑게 식은 옆자리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게다가 전화번호도 남기지 않고 호텔 비용 내고도 남을 금액을 협탁에 올려두고 간 것이 그를 더욱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어디 걸려도 자꾸 개 같은 놈만 걸리는군.”

한숨 섞인 욕지기를 내뱉은 그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몸을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 남자가 씻긴 것인지 몸은 깨끗했다. 하지만 병적으로 깨끗한 것을 집착하는 그에게 샤워를 한 번 더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리는 씻으면서도, 심지어 그 남자가 미리 결제까지 전부 한 호텔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이를 갈았다. 흥신소에 연락해 신원이라도 찾아야 하는 걸까 생각하던 그는,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자 그 남자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게 한 달 하고도 3주가량을 보낸 그는, 얼마 전부터 안 좋아진 몸 상태를 검진받기 위한 병원에서 임신 소식을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

 

모리의 묘사에 따르면, 오메가인 그가 실연의 아픔을 이기기 위해 방문한 술집에서 진탕 마시다가 어떤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의 근처를 지나치면 느껴지는 페로몬이 그가 알파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고, 생긴 것도 나름 자신의 취향이었다고 설명했다. (나카지마는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그가, 그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결국 어찌어찌해서 같이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 그 남자는 사라진 뒤였다.

아니, 그냥 도망간 거라면 별로 화나지 않았을 겁니다.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놓고 가서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 .”

나카지마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수첩에 적어 내리며 어서 자신을 도와줄 동료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쿄카는 아직 미성년자니까 제발 쿠니키다 씨나, 아니면 요사노 씨만이라도. 아니 나오미 씨도 저보단 잘 도와줄 수 있을 텐데. 나카지마는 눈물을 짜내며 그럼 찾으시는 분의 성함도 모르시는 건가요?’라고 물으며 수첩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름은기억이 안 납니다. 인상착의 정도는 충분히 기억하지만요.”

그럼 생김새나 인상착의를 알려주시면 최대한 찾아보겠습니다.”

나카지마는 지금 상황이 총체적 난국이라고 생각하며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카지마가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 넘어갈 무렵, 쿠니키다가 돌아왔다. 나카지마는 쿠니키다 씨, 다녀오셨어요.’라고 인사하며 구세주를 만난 듯 손을 흔들었다. 넋이 나간 그의 표정에 이상함을 느낀 쿠니키다는 바로 나카지마에게 다가와 무슨 의뢰인지 물었다. 나카지마는 ? 그냥 사람을 찾으신다는 의뢰입니다.’라고 힘없이 대답하고는 자신이 이때까지 열심히 적어둔 수첩을 그에게 건넸다. 수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쿠니키다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쿠니키다 조차 탐정사에서 많은 사건을 해결하면서도 이런 사건은 처음인듯했다. 쿠니키다는 힘없이 늘어진 나카지마를 뒤로 한 채 모리에게 사무적인 투로 말하며 힘겹게 질문을 꺼냈다.

그럼 성함을 모르시는 관계로 저희 탐정사 사원들이 모두 힘을 써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생물학적 아이 아버지라면지금 의뢰인께서는 이.”

. 임신 중입니다만.”

. 알겠습니다.’ 쿠니키다는 그의 말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곧바로 인상착의를 물었다. 모리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천천히 생각을 더듬듯이 천천히 자신이 찾는 남자에 대해 묘사해 갔다.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마치 전통적인 걸음걸이와 행동, 그리고 한 쪽으로 내려 묶은 반짝거리는 은발, 중후한 목소리, 표정 변화가 거의 없지만 감정 표현은 확실한 은빛 눈동자. 모리가 그 남자에 관해 말하면 말할수록, 쿠니키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표현이 두리뭉실해서 찾으시는 데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네요.”

쿠니키다가 아무런 대답 없이 모리와 수첩을 번갈아 응시하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나카지마가 마지못해 웃으며 그게 저희가 해야 할 일인 걸요.’라고 답했다. 쿠니키다는 나카지마가 어떻게 이야기하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 마냥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잠시 전화 통화를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나카지마는 답지 않게 정신이 없어 보이는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의뢰인이 앞에 있는 자리여서인지 최대한 침착한 모습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임신하신 거면. 아직 얼마 안 되셨겠어요. 이런 말씀 드리기는 이상하지만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모르고 있다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갈 때쯤에서야 알게 되어서요. 이제야 찾기는 뭐하지만 지우든 살리든 아이의 아버지는 필요하다 하니찾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냉정한 모리의 한마디에 그렇군요.’라고 대답하며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카지마는 급한 발걸음으로 다시 응접실로 돌아온 쿠니키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쿠니키다는 나카지마의 물음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나카지마는 이렇게까지 당황한 그가 오랜 만인지라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쿠니키다를 빤히 바라보았다.

생물학적 아이 아버지를 찾은 것 같습니다.”

쿠니키다의 한마디에 모리는 놀란 눈치였다. 기대조차 하지 않고 온 탐정사에서 이렇게 빨리 일을 처리해 줄 줄이야. 모리는 사업적인 미소를 띤 채 그럼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나카지마는 환히 웃고 있지만 무언가 숨기는 듯한 모리의 미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쿠니키다를 바라보았다. 쿠니키다는 전화를 했으니 곧 올 거라고 말하고는, 잠시 나가 있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모리와 나카지마만이 남은 응접실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나카지마는 속으로 어서 쿠니키다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적막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빠르게 일이 처리되길 바랐는데. 탐정사 분들께서 잘 처리해주셔서 무척 기쁩니다.”

아하하. 저희가 더 감사하죠. 항상 무슨 일이든 편안하게 의뢰해주세요.”

나카지마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끝에 들어온 사람은 쿠니키다가 아니었다. 모리는 단정하게 유카타를 차려입고 하오리를 어깨에 걸친 남자를 보고 놀란 듯이 크게 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 사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모리는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그의 모습보다, 나카지마가 그를 부르는 호칭에 더욱 놀란 듯했다. 눈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까지 벌리며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하던 모리는 당신이 여기 사장이었습니까?’라고 물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절 찾아왔다고 하셔 급하게 걸음 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입니다.”

모리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침대에서 자신이 그를 부르던 이름을 기억해냈다. 낯부끄러운 기억이 따로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모리는 벌써 두 달 전 이야기를 지금에야 끌고 와 죄송합니다만.’이라고 운을 띄우며 힘들게 입술을 떼었다.

제가 탐정사를 찾은 것은 당신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씨. 저는 당신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자종치종을 듣고 오지는 못했던 모양인지 후쿠자와는 엄청나게 놀란 모습이었다. 나카지마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이 보아왔던 사장님의 모습 중에서 가장 놀란 모습이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당황함 속에서 먼저 입술을 떼어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사태의 당사들과는 별개로, 당황스러운 상황에 낀 나카지마는 두 사람이 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 기나긴 정적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posted by 송화우연

그 어떤 것을 삼켜도 금방 토하고 싶어졌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로 식탁을 가득 채워도 헛구역질만 할 뿐이었다. 모리는 변기를 잡고 속을 게워내려 몇 번을 노력했지만, 그 수고는 전부 허투루 돌아갔다. 그는 소화하지 못해 몸 한구석에서 고여 있는 것들을 전부 내려 보내고 싶었다. 사랑, 추억, 슬픔, 그리움 등. 이리저리 얽히고 하나로 덩어리져 있는 그것들은 갑자기 모리를 짓누르기도 했고, 숨 한번을 들이 쉬지 못할 정도로 목을 조여 왔다. 참을 수 없이 아프게 만들기도 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눈물이라니. 모리는 부서질 듯 아픈 몸보다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주체를 찾을 수 없어 탄식했다.

모리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병의 원인은 간단했다. 후쿠자와의 부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모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사람이니 잊자고 생각했는데. 후쿠자와가 죽고 난 뒤 모리는 뒤돌아 볼 새도 없이 앞만을 보고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후쿠자와를 뒤로 버려두고 혼자 걸어 나왔다.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일까. 힘없이 침대에 늘어진 모리는 스스로의 모순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억지로 케이크 다섯 개를 연달아 먹기도 하고, 고급 레스토랑을 빌려 일부러 식탁 가득 음식을 내오라 시키기도 해보았다. 그토록 좋아하던 가게의 만쥬 차즈케를 전부 사들여 먹어보기도 해보았지만, 결국 전부 그것들은 모리의 안에서 내뱉어졌다. 소화 시키지 못해 삼키지 못한다. 모리는 겨우겨우 정신을 차려 수액이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구경했다. 이런 것으로 삶을 연명하게 될 줄이야. 가만히 눈을 감던 그는, 자신이 어떻게 식사를 했었는지 곱씹어 보며 가늘어진 팔을 편하게 늘어트렸다.

따뜻한 쌀밥과 미역, 두부를 넣은 된장국. 간소하지만 정성을 들인 반찬 중에서는 채소 절임을 좋아했다. 스키야키를 먹을 때면 말도 없이 먹어치워 항상 속도가 맞지 않았다. 항상 밥을 먹을 때도 차를 마시곤 했었다. 모리는 후쿠자와가 먹는 모습이라면 아직도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은 밥 한술 떠넘기지 못하고 있지만, 모리는 누구보다 배부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산이 부서진 감정들의 조각은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고 모리는 굳이 그것들을 맞추려 들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솔직하지 못해 괴로운 것보다는 차라리 뻔뻔하게 무시하는 편이 좋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것에 그대로 꿰뚫려 있던 후쿠자와는 이미 모든 것을 예견한 표정이었다. 바보 같은 표정이라 생각하던 모리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자신도 무언가가 관통한 것은 아닌지 자신의 복부와 흉부를 더듬거렸다. 어느 한 곳으로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지만, 아무 곳에도 상처는 없었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아픔은 간간히 심장을 조였다. 손에 꽉 쥔 채 이리저리 흔들고 거칠게 다루는 듯한 고통. 모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내쉬길 반복했다. 입은 쓰고 건조했지만, 그 흔한 사탕 하나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물 한 모금을 겨우 머금은 채, 나눠마시던 모리는 한 방울씩 떨어지던 수액의 조이개를 조금 풀었다. 알싸하고 시원한 느낌의 팔목에서는 무언가 삽입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먹는 거라면 먹는 거겠지. 모리는 아무것도 입에 못 댄 자신을 위안하기 시작했다.

죽을 입에 대었다 구역질을 하기 몇 번. 모리는 겨우 흰 죽 한 모금을 삼켰다. 물을 많이 넣고 끓인 죽에서는 쌀 비린내가 느껴졌다. 하지만 모리의 마른 몸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모리는 다시금 죽을 입에 물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막혀있던 목구멍을 겨우 열어 죽을 삼킨 모리는 차라리 손목에 꼽힌 카데터가 수액 말고 죽을 넣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는 세 번째 숟갈을 입에 담았고, 그것이 그날의 마지막 시도였다.

모리는 왜 슬픔을 소화시킬 수 없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냥 씹어 삼켜 배설물로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몸뚱이를 잠식해버린 감정도 그대로 씹어 삼켜 몸 안을 돌다 내뱉어지면 그만일 텐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던 모리는 후쿠자와의 자상 부위와 같은 곳을 연신 문질러 보았다. 심장 부근, 조금만 빗겨 지나갔다면 살았을지도 모르겠군. 이미 늦은 말을 중얼거리던 모리는 어서 소화가 되라며 배를 문질러주 듯 감정이 고여 있는 그 주변을 연신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모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 삼켜지지 않는 것도, 소화가 되지 않는 것도 전부 그의 탓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전부 담아 삭혀두던 자신의 탓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원망은 남아있는 사람의 몫이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모리는 빗줄기같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힘도 없었다. 직면한 커다란 덩어리의 감정을 소화 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유일한 모리의 걱정이자, 희망이었다. 모리는 그렇게 앞에 놓여 있는 슬픔에 절여진 사랑 한 조각을 삼켰다.

posted by 송화우연

[후쿠모리]때늦은 해열

문스독/다른 커플링 2019. 2. 1. 22:48

규칙적인 숨소리, 바로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놓인 그의 손. 잡고 싶다는 진심을 뒤로 한 채 뒤돌아 나왔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

애가 타는 사랑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다고 생각했다. 자신답지 않은 반응에 시선이 닿는 곳에 있던 그를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는 자신도, 가끔씩 그를 떠올릴 때면 조여 오듯 아파오는 그 통증이 사랑이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가끔씩 끓어오르는 미열이 그의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스스로도 자기 자신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며 실성한 듯 웃었다. 잡았어도 탈 수 없는 만원 버스와도 같은 사랑이었다.

“문학에 후쿠자와 유키치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던 그는, 세월이 무색하도록 그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진중한 모습하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마저도,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그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모리는 열병과도 같던 사랑의 대상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입술조차 제대로 떼어지지 않았다.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잠시간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그의 손을 맞잡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번에 교생으로 오게 된 모리 오가이입니다.”

식은땀이 나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모리는 빠르게 손을 빼내었다. 후쿠자와는 어색하게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이라고 대답하는 모리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분명 들은 바로는 그가 잠시 휴직을 하고 있다고 했다. 모리는 정확하지 못한 정보를 믿은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학교 이곳저곳에 대해 알려주는 후쿠자와를 따라다녔다.

“이 학교를 졸업했다고 알고 있는데 제가 너무 과하게 소개해버렸군요.”

“아뇨. 오래되어서 새로운 곳도 있어 좋았습니다. 후쿠자와 선생님께서는 학교에 꽤나 애착이 있으신 가보죠?”

자연스럽게 넘기고 싶어 생각하던 질문을 그대로 내뱉은 모리는, 잠시 자신을 응시하는 후쿠자와의 시선에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는지 되새겨보았다. 후쿠자와는 불안해하는 모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교생 실습도 이곳에서 해서인지 이쪽으로 발령받은 뒤에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리는 교생시절의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짧게 친 은발, 문학이 아니라 어디 체육계를 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한 체격은 학생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여학생들의 입에서는 심심할만하면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모리는 겉치레의 말로 ‘인기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교생이었던 후쿠자와를 알지 못한다는 듯이 행동했다. 후쿠자와는 그런 모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점심 식사는 이쪽 복도로 가면 되고, 나는 일이 끝나면 도서부의 일을 도우니 물어볼 것이 있으면 도서관으로 오면 됩니다.”

“네, 여쭤볼게 많을 것 같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고개를 숙여 보인 둘은, 교무실로 돌아가 서로의 자리를 찾았다. 모리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학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꿈을 가진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으니까. 불순한 동기를 그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은 모리는 자신이 맡은 반의 출석부를 읽으며 아이들의 이름을 찬찬히 외웠다.

서류를 정리하고, 통신문을 분류하고, 자신이 맡은 반에 인사를 한 뒤, 수업을 참관하고. 생각보다 긴 하루였다고 생각한 모리는 일지를 쓰며 거의 비어버린 교무실을 바라보았다. 단축수업 때문인지 더욱 일찍 가버린 선생님들 중에서 그가 질문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리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교무실을 나와 후쿠자와가 있을 도서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려오는 심장에게 주책없게 굴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던 모리는, 스스로가 짜증나기까지 했다. 벌써 이렇게 앓아 온 것이 몇 년 전인가. 근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이었다. 모리는 어서 비밀스럽게 이어온 짝사랑이 사그라지길 바라고 있었다.

후쿠자와는 아까의 단정한 모습과는 다르게 도서실 구석에서 엎드려 있었다. 모리는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지는 해를 감싸듯 하늘에 퍼지는 노을과 잡지 못했던 손. 홀로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모리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그가 엎드릴 때의 자세는 고개를 돌린 채, 한 쪽 팔을 빼낸 모양새였다. 모리는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은 듯하다 생각하며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후쿠자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모리는 조금 대담하게 굴어보자는 생각에 빠져나온 그의 손을 잡고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모리는 가만히 손에 잡은 그의 손을 바라보다 아쉽다는 마음을 뒤로하고 빼내었다. 악수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감이었다. 후쿠자와의 맞은편에 조심스레 앉은 모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그의 손 바라 앞에 자신의 손을 놓았다.

“그저 어린 날에 치기 어린 상사병인 줄 알았습니다.”

깨지 않는 그에게 닿지 못할 말을 툭 내던진 모리는 열이 오른 얼굴을 노을에 감추며 뜸을 들였다. 다시 이 손을 잡는 다고해도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매일 밤 되새겨도 사랑이었는데.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잡을 수 있을 리가 없겠죠.”

조곤조곤 말하던 모리에게는 이 손을 잡을 용기가 없었다. 흘러가는 열병이라고 치부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는 판단에 몸을 일으킨 모리는 혹시라도 그가 깨기 전에 도서실에서 나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일어난 그의 손을 잡은 것은 언제 깬 것인지 모를 후쿠자와였다. 모리는 그가 어디서부터 자신의 사랑 고백을 들었을지 예상되지 않아 불안감이 엄습했다. 손을 뿌리치려던 그는, 강한 힘으로 자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후쿠자와를 돌아보며 ‘제발 그냥 보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 때의 네 마음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저 내 스스로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모리는 영문 모를 말을 이어가는 후쿠자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강하게 뛰는 심장 소리, 숨을 내쉬는 것조차 의식 되는 가까운 시선. 모리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어차피 학생이었으니 상관없습니다.’라고 대꾸하고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내가 상관있다만. 내가 그때 잡았더라면 이 감정에게서 도망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단호하게 말하는 후쿠자와의 말이 마치 사랑고백과도 같이 느껴져 짜증스러웠다. 몇 년을 가슴에 품고 묻으려고 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도망치듯 나가는 너를 이렇게 붙잡고 싶었던 것은 내 쪽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라는 직함과 걸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모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제는 잡혀주겠나.”

모리는 대답할 필요도 없는 그의 물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

긴장한 듯한 발걸음 소리, 실눈을 뜬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검은 색 머리칼, 나직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손끝에 닿을 듯 말듯 하다 멀어지는 온기를 놓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후쿠모리]새벽을 기다리며

문스독/다른 커플링 2019. 2. 1. 01:48

뭔가 메마르면서도 표현력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힘드네요. 사망 소재 있습니다 유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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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는 가끔 어슴푸레한 새벽 사이의 시간에 아무런 예고 없이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럴 때면 항상 같은 환상을 보곤 하는데, 품에 쏙 들어올 만치 몸을 웅크리고 자는 모리가 그의 옆에 누워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의 옆에서 잠이 든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를 품에 안고 자신도 다시 잠에 들었지만, 이제는 보자마자 이것이 꿈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가능했다.

모리 오가이는 죽었다. 퇴근길에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고였고, 그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후쿠자와도 슬퍼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얼마 뒤에는 그와 교제하기 시작한지 5년 째 되는 날이었고, 안지는 15년이 넘어가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까지도 무엇을 선물로 받고 싶은지 서로 물으며 ‘당신부터 이야기 하십쇼. 또 속 시커멓게 생각하면서 혼자 사오지 말고요.’라고 말하던 모리는 그날 이후로 말이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어찌 되었건 살아가야한다고 말한다. 후쿠자와도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하루하루를 억지로 먹는 식사와 같이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모리의 장례가 끝난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후쿠자와는 모리가 죽은 날로부터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고, 매우 불안정했다. 의연해보여 다행이라는 사람들의 말이 그의 가슴을 더욱 미어지게 만들었다. 괜찮은 척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벽녘에 잠에서 깬 후쿠자와는 역시 자신이 그가 죽는 악몽을 꾼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며 모리를 끌어안았다. 생생하게 느껴졌던 가슴 아픔에 답지 않은 눈물도 흘렸다. 이 부분에 대해서 후쿠자와는 정말 자신답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모리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그렇게 행복한 새벽을 보낸 후쿠자와는, 다음 날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옆을 바라보며 한참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두 번째는 예기치 못한 하루에 일어났다. 무척 힘든 하루였고, 후쿠자와는 몸에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일이 힘들어서라기 보단, 자기 자신에게 치인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깰 수 없을 정도로 잠에 빠져들었지만 여지없이 새벽에 눈에 떴다. 모리는 여전히 자신의 옆에 누워 있었고, 후쿠자와는 품에 안았다. 분명 따뜻한 감촉마저도 모리 그 자체였다. 포근한 로션의 향기, 옷에서 맡아지는 섬유 유연제의 향기까지 진짜 같았다. 가만히 모리의 따뜻한 등을 쓰다듬어주던 후쿠자와는 일어나지 않고 곤히 잠든 그를 가만히 보다가 잠에 빠졌다.

그렇게 모리는 몇 번이고 후쿠자와의 옆에 나타났다. 한 번도 눈을 뜬 모리를 본 적은 없었지만, 후쿠자와는 이마저도 행복했다. 그렇게 그는 잊을만 하면 찾아오곤 했다. 후쿠자와는 그런 모리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아주 먼 곳에 있는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천천히 꺼내보곤 했다. 후쿠자와는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남매들과도 같이 흘려 놓은 빵조각을 따라 걷는 기분이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과자 집, 자신이 평생을 그리워할 모리를 찾아 헤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후쿠자와는 모리가 나오는 조건이 있는지 여러 가지 시험을 해보았다. 후쿠자와가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아주 힘들 때, 몸이 고단할 때, 그가 이기지 못할 정도로 그리울 때. 후쿠자와는 모리가 보고 싶은 마음에 여러 가지 조건을 만들어 보았지만, 워낙 예상이 불가능했던 사람이니 만큼 모리는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죽을 만큼 보고 싶어 후쿠자와가 꼴사납게 눈물을 보인 날에도 모리는 쉬이 옷자락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나갔을 무렵, 모리는 그제야 얼굴을 내비쳤다. 후쿠자와는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쉬워 가만히 모리를 바라보며 잠조차 들지 않고 그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맞닿은 살결에서 느껴지는 심장 소리, 그리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를 보며 느껴지는 그의 호흡. 후쿠자와는 차마 뺨을 만지면 꿈에서 깨어날까 걱정하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 아쉬움에 뺨에 손을 대보며 그의 온기를 손끝으로 옮겨왔다. 따뜻한 뺨, 그리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머리칼. 후쿠자와는 더욱 대담해져 그의 뺨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이렇게 모리를 마음에 담아두면 몇 년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후쿠자와의 이 생각은 다음 날 빈 옆자리를 보며 그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모리는 더 이상 후쿠자와의 옆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 후쿠자와는 며칠 밤을 새며 그를 기다려 보았지만, 모리가 후쿠자와의 옆 자리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후쿠자와는 다시금 자신이 흘린 빵 조각을 찾아 모리를 찾기 위해 애썼다. 분명 그리웠지만, 예전만치 비통함에 젖은 밤을 보내지 않았다. 후쿠자와는 가만히 그와 보내었던 시간을 곱씹으며 이겨 낼 수 있는 그리움을 내리 눌렀다.

후쿠자와는 이제 깨는 일 없이 잠을 잔다. 이제는 밤을 새는 일도 없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보내고 있었다. 간간히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이 그의 잠자리를 돕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근거는 없었다. 후쿠자와는 지나다닐 때마다 보이는 곳에 놓여있는 모리의 사진을 바라보며 ‘이제는 신경도 안 쓰나보군.’이라고 중얼거리곤 했지만, 표정은 한결 가벼워보였다. 후쿠자와는 꽉 찬 그리움의 병을 비우는 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빈 병을 채우는 것도 점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잊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물에 젖은 종이처럼 상념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일은 없었다. 깊은 곳에서 막혀 있던 마개가 그대로 뚫린 기분이었다. 후쿠자와는 흘러 내려가는 감정을 느끼며 사진 속 모리를 바라보았고, 모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후쿠자와는 천천히,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서도 바쁘게 하루를 보내며 새벽을 기다렸다. 그가 올지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새벽을.

posted by 송화우연

[후쿠모리]그리움의 끝

문스독/다른 커플링 2019. 1. 28. 23:56

낙자루님의 썰을 기반으로 쓴 후쿠모리 입니다. 후쿠모리는 전혀 안나옵니다. 사망 소재 유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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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모리 오가이의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도가 들려있었다. 고요한 섬마을에서 치러진 장례에는 간부인 오자키 코요만이 참석했다. 현 간부 중 한 명인 나카하라는 작은 섬마을인 만큼 장례에 많은 사람을 부를 수 없는 것은 이해한다고 했지만 갈 수 있는 인원이 왜 한 사람뿐인지 물었다. 불만을 표하는 그에게 오자키는 덤덤한 목소리로 유서에 적힌대로라고 대답했다. 모리의 장례는 생전 마피아 보스의 장례라고 하기에는 조촐하기 짝이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의사 선생이라고 불렀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모리는 죽기 전, 정확하게 자신의 장례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적어두고 떠났다. 장례를 치룰 곳, 장송곡, 와야 할 사람들의 목록과 사람들의 주소, 그리고 같이 묻어야 할 물건과 자신이 묻혀야 할 곳 등. 그는 살아생전처럼 스스로의 죽음도 계획하고 있었다. 모리는 섬마을 바닷가 근처 공동묘지에 묻히고 싶어 했다. 오자키는 답지 않게 운치 있는 곳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왜 그 자리를 골랐는지는 옆의 묘지를 보고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다른 무덤들보다 서로 가까이 위치한 두 무덤은 두 사람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물론 땅에 묻힌 시체가 옆으로 손을 뻗을 리 없었지만, 오자키는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가까이 있으니 좋을 거라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못할 혼잣말이었다. 상쾌한 파도소리와 다르게, 사람들의 표정은 엄숙하고 슬퍼보였다. 물론 얼마 없는 이웃사촌 중 한 사람이 떠나 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몇 주 전에 죽은 그의 연인을 따라 간 것 같다며 눈물을 보이는 사람도 보였다.

어울리지 않는 장도는 그의 연인의 것이었다. 그는 이미 모리의 무덤 옆에 차게 식은 채 묻혀 있는 사람이었다. 오자키는 가만히 모리가 묻히는 것을 바라보다가 옆의 무덤에 시선을 던졌다. ‘후쿠자와 유키치’라고 적힌 묘비를 바라보던 오자키는 가만히 그 묘비 앞에 서서 모리가 바라보던 바다의 전경과 무덤을 한눈에 담았다. 마을 사람들은 의사인 그가 시름거리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언제는 정처 없이 바닷가를 걷는 것을 보고는 저러다 바다에 뛰어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고 말하는 마을 사람들은 슬픈 눈으로 흙이 덮여지는 그의 관을 응시했다. 오자키는 눈물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어차피 두 사람은 만났을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추모하는 이들에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길지 않은 유서엔 남겨진 이를 위한 이야기는 담겨 있지 않았다. 가까웠던 한 사람만이 장례에 참석 해주길 바란다는 말이라던가, 섬 밖에 자세한 이야기를 알리지 말고 진행해달라는 말은 남겼다고 말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종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글들은 두 사람의 사랑에 도피에 관한 이야기였다. 흔하디흔한 연애사와 같이 쓰여 있었지만 몇 날 며칠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고, 담담하게 나열 되어있는 모리의 필체가 두 사람의 애틋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을 때와 다르게 둘만을 바라보며 지내고 싶었다는 말은, 평범한 문장임에도 힘을 줘 눌러쓴 것처럼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두 사람의 일상은 사랑의 도피라는 거창한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평범했다. 바닷길을 산책하고 마을을 지나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진료소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진찰하고 함께 식사하고 같은 침대에서 잠에 들고. 이런 평범한 일상이 서로 함께 함으로서 마치 특별한 하루 같이 묘사되어 있었다. 답지 않게 행복했노라고 말하는 문장에 작게 웃은 오자키는 거의 묻힌 모리의 관을 바라보았다.

오자키는 다시 한 번 그가 부탁한 마지막 절차를 확인하고는 성냥에 불을 붙였다. 장례를 치루는 중인지라 백사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홀로 모래를 밟고 선 오자키만이 하얀 의사가운과 어두운 색의 하카마를 태우고 있었다.

[후쿠자와 공이 남기고 간 하카마도 의사 가운과 함께 태워 주게나. 이제 더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가만히 타들어가는 옷가지들을 바라보던 오자키는 후쿠자와의 관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지 생각해보며 남은 유서를 찬찬히 읽어 내렸다.

[후쿠자와 공이 먼저 가서 다행이야. 그 사람은 이런 그리움을 느끼지 않았으면 싶으니까. 위에서 호의호식하다 천국에서 만나길 기도해야겠지.]

오자키는 답지 않은 종교관이 섞인 문장을 바라보다 거의 다 타들어간 의사 가운과 하카마를 바라보았다. 활활 타오르던 옷가지들은 불을 꺼트리며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채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가고 싶으니 이 편지도 태워주게. 마지막을 지켜주어서 고맙고... 또 해야 할 말이 있을까? 유서는 처음이라.]

끝까지 제멋대로. 오자키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꺼져가는 불씨에 종이 뭉치를 던져버렸다. 죽어가던 불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종이를 태우며 다시 일어났다. 오자키는 그렇게 불길이 다시 죽어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불이 꺼지고 난 뒤에도 한참을 잿더미를 지켜보던 그는, 천천히 백사장을 빠져나오며 모리가 소중하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장도를 생각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와중에 그걸 손에 쥔 채 묻힐 생각을 하다니, 어지간히 사랑하고 있었구나. 바닷바람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던 오자키는 다시금 잿더미가 남아있는 백사장을 연신 돌아보며 바닷가를 벗어났다. 오자키는 섬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모리의 장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죽은 모리 오가이의 손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장도가 들려있었다고 말하면 될 뿐이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후쿠모리 2세 이야기에 임신튀와 알오버스를 살짝 끼얹었습니다.  임신튀와 알오버스는 진짜 개미 눈꼽만큼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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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나지 않는 회의를 거듭 할수록 회의실 안 공기는 무거워졌다. 모두가 조금씩 피곤한 내색을 표하자, 앞에 흩어져 있던 회의 자료를 모아 정리한 후쿠자와는 평소같이 곧은 목소리로 사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지친 것 같으니 회의는 맘마 먹고 계속 하지.”

***

사원들이 칭하는 후쿠자와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직원을 아끼는 사람이다. 평소 게으름조차 부리지 않고 탐정사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그가, 지금 사장실 안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보고할 서류를 모아 그의 앞에서 기다리던 쿠니키다는, 자신의 기척에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후쿠자와를 바라보다 결국 사장실을 나왔다.

“쿠니키다, 보고는?”

“너무 곤히 주무셔서 보고는 못 올렸다.”

사장님이 주무신다고? 놀란 표정으로 되물은 요사노의 한마디에 둘의 이야기를 엿듣던 사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요사노와 쿠니키다에게로 쏠렸다. 사장님이 사장실에서 주무셔요? 어머, 어제 뭐 하셨길래. 나오미... 그건 사장님의 사생활일 것 같은데. 왁자지껄 쏟아지는 사원들을 조용히 제지시킨 쿠니키다는, 모두를 데리고 잠시 우즈마키로 향했다.

“사장님... 이주 전에 갑자기 외출하시고 온 뒤로 이상하시지 않아요?”

먼저 말문을 튼 것은 나오미였다. 여자의 직감은 무시하지 못할 것 중 하나이니 만큼, 사원들은 나오미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확실히 사장님이 이것저것 신경 쓰실 일이 많아졌다고 했던 것도 그때쯤이었지... 갑자기 이사를 했다고 하시질 않나. 그런데 이사하시고 어느 동네인지는 언급도 없으시고. 저번에는 갑자기 급하게 일찍 퇴근하시기도하고요. 줄줄이 나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도가와는 입에 물고 있던 페인트 사탕을 빼고 점점 고조되는 사람들을 진정 시켰다.

“걱정할만한 일은 아닌 거 다 알면서 뭘 그렇게 알고 싶어 해.”

“당연하죠. 사장님께서 지내시는 곳 란포씨도 모르신다면서요? 이건 분명... 사장님께서 드디어 연인이라도 생기신 게 분명해요.”

“연인보단 애가 생기신 거 같던데 말이지.”

“구세대처럼 왜 그러세요, 쿠니키다씨. 애인에게 맘마정도는 애교로 쓸 수 있다고요!”

"나...나오미.“

듣고 있다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란포는 다시 페인트 사탕을 입에 물고 ‘굳이 보고 싶지 않아서 안 찾아간 거지 모르는 건 아닌데...’라고 중얼거렸지만, 입에 문 사탕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다. 갑자기 연애 이야기로 빠진 것이 나름 즐거운 것인지 이리저리 추측해보던 사원들은, ‘그런데 그러면 왜 사장님은 그걸 숨기시는 거죠?’라고 순수한 질문을 던지는 켄지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후쿠자와와 연애사는 거리가 먼 단어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굳이 숨길 이유 또한 없었다. 쿠니키다는 얼마 전, 후쿠자와가 ‘사장님 오늘 기분 좋아 보이세요.’라고 말하던 나카지마에게 평소보다 냉정하게 대했던 것을 기억했다. 나카지마는 ‘제가 잘 못 짚었나봐요.’라고 말하며 머쓱해 했지만, 분명 후쿠자와는 뭔가 들떠 있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최대한 내리며 평소보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풍겨오는 분위기는 분명...

“자자, 이제 여기까지 하고 올라가는 게 어떻겠나?”

언제부터 있던 것인지 농땡이를 부리다가 온 다자이가, 사원들의 뒤에서 모두를 조용히 시켰다. 드디어 끝났다는 듯이 사탕을 깨물어 먹던 에도가와는 막대를 봉지에 잘 싸두고는 ‘그래, 이제 사장도 일어났을 거라고.’라며 다자이를 거들었다. 사원들은 꽤나 재미있었던 이야기가 끝나 아쉬우면서도,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사장님께 직접 물어보는 것은 어떤지 물으며 다자이에게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은지 물었다.

“나야... 자네들보다 많이 알고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별거 아닌 일이라네.”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우즈마키를 나선 다자이는,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며 ‘분명 교제 중이신 거라니까요.’라고 대화를 하는 사람들의 말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사원들이 돌아왔을 때, 후쿠자와는 잠을 떨쳐내려는 것인지 평소 입에 대지 않던 자양강장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사원들은 무거운 눈꺼풀을 어찌할 바를 몰라 눈을 깜빡이는 그에게 ‘사장님, 몸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좀 쉬세요.’라고 걱정 어린 한마디를 보냈다.

“아... 딱히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니 걱정 마라. 이틀 밤 내내 자게 내버려두지를 않아 좀 피곤 한 것 뿐이니까.”

어머, 어머 어머. 사원들을 속으로 외치며 그의 한마디에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후쿠자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쿠니키다와 함께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원들은 그가 들어가자마자 분명 무언가 있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는 서로 알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 되었다.

“음... 사생활 침해가 아닌 선까지 가려면 어디까지만 해야 하지?”

“그건 이미 넘지 않았나요.”

“일단 댁이 어디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이즈미는 품에서 꺼낸 GPS 칩을 보이며 ‘이거... 쓸만 할 것 같던데. 훈련용이긴 하지만.’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치 큰 작전이라도 세우듯이 서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사원들이 모두 힘을 합친 이상 분명 걷잡기에는 이미 늦은 듯 했다.

“나는 경고 했다-. 조금만 있으면 금방 들킬거라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린 에도가와는 감자칩을 뜯어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아까까지 그들을 말리던 다자이도, 조금은 즐거운 표정이 되어 사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방문은 너무 늦지 않은 시간으로 잡았다. 확실히 오늘 따라 사원들을 일찍 퇴근 시킨 후쿠자와는 곧장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나카지마는 빨간 점이 한곳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여기다.’라고 중얼거렸다.

“진짜 가려고?”

“음... 깜짝 집들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퍽이나 그런 게 먹히겠군.”

옆에서 불안한 듯이 다리를 떨던 쿠니키다는 일제히 사장님께 가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일단은 진정하라는 말을 했다. 그래, 물론 궁금하긴 하지만. 입술을 잘근거리며 갈등하는 쿠니키다에게, 다자이는 ‘쿠니키다 군. 다 같이 사장님 새 집 구경 가야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의 한마디로 인해 쿠니키다는 쉽게 넘어왔다. 천천히,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하던 사원들은 꽤나 들뜬 모습이었다. 뭔가를 숨기는 자신이 고용주를 파헤치러 간다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다.

“란포씨, 란포씨도 궁금하세요?”

“아니, 혹시나 싶은 상황 때문에 따라온 거야-.”

막과자를 하나씩 입에 담으며 대답한 란포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시와 거리가 떨어진 외곽, 여유로운 주택가 동네였다. 타니자키는 주변을 둘러보며 ‘전에 사시던 곳도 사람이 많이 없는 곳인데 여기는 더 없네요.’라고 중얼거리고는 주소를 찾아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은 골목 가장 안쪽에 있는 저택이라고 부를 만한 일본식 가옥 앞에 멈추었다. 평소 그의 소비를 생각하면 꽤나 호화스러운 곳에 속했다. 사원들은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현관 앞에서 벨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그리고 벨과 함께 시작된 아이의 울음소리는 정원을 가로질러 사원들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여기 맞나요?”

아기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불안해진 나카지마가 사원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원들은 대답하지 못한 채, 우는 아기에 대한 걱정을 하며 어서 현관문이 열려 안에 있던 당사자에게 사과를 건네고 싶었다. 조금은 신경질 적으로 열린 현관으로 나온 남자는 후쿠자와가 아니었다. 마치 죽다 살아난 표정인 남자는 포트마피아의 모리 오가이, 사원들은 그를 보자마자 한발자국 물러나며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하아... 잠시 낮잠을 재웠는데. 그 사이에 후쿠자와 공의 손님이 오셨군요. 그 망할 영감... 일단 들어오시죠.”

모리가 품에 안은 아이는 점점 울음을 그쳐 가는지 훌쩍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직도 울음소리가 들려 사원들은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것인지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저희 쌍둥이가 잠에 약해서 말입니다. 혹시 아기 안아본 적 있으신 분? 제발 후쿠자와 공 보다는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모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에 있던 아기를 그대로 나카지마의 품에 안기고는 아이가 우는 방 안으로 향했다. 방 안에서는 ‘그러게 사람이 올거였으면 미리 말을 하지 그러셨습니까.’라던가, ‘내가 부른 것이 아니다만.’이라던가, ‘영감탱.’같은 말들이 오가는 것이 간간히 들렸다. 나카지마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 듯한 아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토닥였다.

“우리...뭔가 잘못 찾아온 것 같지 않나요...?”

“그러게 뭐랬어.”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한 에도가와는 자신을 보고 웃는 아기의 머리를 살살 매만져주며 사원들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다 알게 되었을 거였다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에도가와는 피곤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후쿠자와를 돌아보며 ‘사장-. 난 말렸다?’라고 말했다. 후쿠자와는 반쯤 졸린 눈으로 나카지마에게 안겨있는 아이를 안아들고 모리가 들어간 방에 아이를 눕혀놓고 나왔다. 이제 그를 안 재운 것이 누구 인지 알아버린 사원들은 ‘사장님...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그가 안내하는 응접실로 죄를 지은 마냥 따라갔다.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다. 모두에게 숨겨서 미안하군.”

“그런데 사장님... 마피아 보스인 분과 아기는...”

“나와 모리 선생의 아이다. 모리 선생은 다시 만나게 된 연인이고 말이지.”

갑자기 건너 뛴 설명에 언어를 잃은 사원들은 일제히 후쿠자와를 바라보았다. 후쿠자와는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사장이 전부 잘못한 거 아니야. 마피아 보스 쪽에서 먼저 도망갔으니까.”

앞에 놓인 과자를 먹으며 말한 에도가와는 사원들을 향해 말하며 바구니에 담겨져있던 과자들을 전부 자신의 그릇에 쏟아 담았다.

물론 후쿠자와 자신도 잘못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모리가 하루 아침에 없어져 버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한동안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다가 그를 마주한 것은, 불과 얼마 전, 2인용 유모차를 끌고 와있는 모리를 발견한 후쿠자와는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후쿠자와공. 당신과 내 아이입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지?”

“임신 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알파인 후쿠자와가 러트일 때, 오메가인 모리가 히트사이클일 때 만난 횟수는 굳이 꼽지 않아도 많았다. 그런데 일 년이 다 지나간 그 때, 한 번의 실수로 그가 이렇게 사라졌다가 돌아왔다니. 후쿠자와는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를 집으로 들였다.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 모리 대신에 유모차를 끈 후쿠자와는 유모차에서 곤히 자는 아기들을 바라보며 조금 앞서 나가는 모리를 힐끔였다. 아직 윤곽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지만 분명 그의 모습도, 자신의 모습도 보이는 얼굴이었다. 집에서 가장 푹신한 이불을 깐 후쿠자와는 능숙히 아기들을 눕히는 모리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약 여섯 달가량 됐습니다. 쌍둥이다 보니 일찍 낳아서요.”

“왜 찾아오지 않았지.”

“귀찮다고 여겨지는 건 질색이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모리는 그가 건넨 차를 홀짝거리며 ‘우리가 나이도 있는데 더 깊어지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라고 중얼거렸다. 후쿠자와는 현관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그에게 던지며 비어가는 그의 찻잔에 다시 차를 따라 건넸다. 아이들의 이름, 누가 돌보아 주었는지, 왜이리 피곤해 보이는지 등등. 모리는 하나하나 허투루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자신도 임신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고, 당신을 찾아가기에는 이미 우리 관계도 늦은 뒤였다는 것을 말하던 모리는 가만히 미소를 띤 채 후쿠자와를 바라보았다.

“뭐, 알았다면 당신이 순순하게 보내주지 않았을 거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제가 온 이유는...”

모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후쿠자와는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어서 모리가 말했으면 싶은지 입술을 잘근거렸다.

“쌍둥이라 육아가 두 배로 힘들어서요. 후쿠자와 공도 도우시죠.”

“알겠다. 그럼 자네도 같이 살지.”

“...좋습니다.”

그렇게 체결된 둘의 상황은, 참으로 미묘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다시 사귀는 것이라 말하긴 하였지만, 둘은 이미 아이까지 가진 상황이 아니던가. 하지만 후쿠자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쌍둥이들을 돌보는데 힘을 쓰고 결국 지금처럼 수면 부족의 상황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사원들은 가만히 후쿠자와가 설명하던 상황을 듣고 있다가 아직도 받아드리기 어려운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입을 연 것은 미야자와였다.

“그럼... 사장님은 그 전에도 마피아 보스 분을 사랑하고 계셨던 거죠?”

“...그렇다.”

미야자와가 아니면 할 수 없었을 질문에 잠시 숨을 멈춘 사원들은 후쿠자와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결혼식은 언제 하실 겁니까?”

“집들이는요?”

“저도 사츠키와 카츠키 보고 싶습니다.”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질문과 요구에 머리를 짚은 후쿠자와는 ‘...애기 아빠가 허락하면 생각해보지.’라고 말하고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후쿠자와 공, 당사자 없는 고백은 그렇다 치고 왜 그런 결정권까지 저에게 넘기는 겁니까?”

“...아니면 네가 불쾌해 할 것 같다 그랬다만. 사원들에게 아기들을 보여줘도 되겠나?”

“제가 언제 불쾌해 했다고... 다들 손부터 씻고 오라고 말해주시죠.”

후쿠자와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모리는 사원들을 둘러보며 손을 씻으면 가장 안 쪽 방으로 오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사원들은 아기가 다시 깨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마치 초등학생이라도 된 마냥 줄을 서서 손을 닦았고, 에도가와는 그런 사원들을 보는 후쿠자와에게 ‘어차피 알게 될 거라고 했잖아.’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

“사츠키 여기 보세요-.”

“아부부부.”

쿠니키다와 나카지마는 심심해 보이는 아기의 주위를 끌기 위해 이리저리 딸랑이를 흔들어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후쿠자와는 이것을 더 좋아한다며 다른 딸랑이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이즈미는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며 조금씩 나기 시작한 은발을 살살 쓰다듬어 넘겨주었다.

“요새는 잠은 잘 주무세요?”

“새 집에 잘 적응해서 이제는 잘 잔다. 처음에는 고생이 많았지...”

가만히 몇 주 전을 회상해 보던 후쿠자와는 까르르 웃는 사츠키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낯가림이 심하지 않아서인지 사츠키는 우는 일 없이 사원들과 잘 어울렸다. 다른 사람 손을 타면 운다고 했던 것은 마피아 한정이었나. 후쿠자와는 한탄하던 모리의 말을가만히 생각하던 하며 그들이 아기를 놀아주는 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 그런데 카츠키는요?”

“오가이와 함께 포트 마피아에 있다.”

후쿠자와의 대답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 나카지마는 다시금 사츠키의 앞에서 딸랑이를 흔들었다. 그쪽도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라고 생각하던 후쿠자와는 시간을 확인하며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원들에게 한마디 했다.

“맘마 먹을 시간이니 다들 다녀오도록 해라.”

사원들은 차마 웃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숨을 참고 고개만을 끄덕거렸고, 역시 후쿠자와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듯싶었다. 뒤에서 과자를 먹던 에도가와는 그런 후쿠자와를 바라보며 조심 좀 시켜야겠다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패키님의 오다안고 리퀘스트 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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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끔 손을 뻗는 찻잎, 그리고 구석으로 밀어둔 고급 찻잔, 아끼고 아껴 읽는 좋아하는 책과 지나가다 보이는 눈길만 끄는 잡동사니들. 사카구치는 오랜만에 꺼내든 책을 펼쳐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아껴 읽으면서도 활짝 펼치지 않아 마치 새것과 같은 책을 쓸어보던 그는, 책을 가지고 볕이 드는 창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밖을 보기위해 옆에 둔 소파는 적당히 아늑해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사카구치는 평소 마시던 것보다 진하게 우린 홍차를 홀짝거리며 책을 펼쳤다. 조금 더 손 때가 묻어있었다면,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을까. 사카구치는 첫 장에 정갈한 글씨로 쓰여진 필체를 매만지며 작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10.23 네 생각에 발걸음이 멈추어서 어쩔 수 없이.]

그때는 이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쓴 말임이 틀림이 없다고 느꼈지만, 가면 갈수록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의 표정은 자신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천천히 펜촉을 따라 쓰듯 글씨를 더듬어가던 사카구치는 한숨을 내쉬듯이 허탈하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저나 당신이나 그때는 어리숙했죠.”

작게 중얼거린 사카구치는 잠시간 첫 페이지를 떠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기도를 하는 듯, 잠시 잠에 빠진 듯 그렇게 고개를 책에 묻은 그는, 금세 다시 고개를 들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

사카구치는 아무렇지 않게 포장된 선물을 건네는 오다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갑작스레 온 연락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한동안 바쁠 거라 귀띔했던 그의 말이 언제였는지 가늠해보던 사카구치는 오다가 건네는 선물을 받아들고는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오다의 표정은 진지한 사카구치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기뻐 보였다.

“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연락했다만.”

누가 하느냐에 따라 무척 당황스러운 한마디였다. 하지만 사카구치는 워낙 솔직한 오다의 성정을 잘 알기에, 그저 아무런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오다의 선물은 책이었다. 사카구치는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될 물건을 정성스레 포장했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뜯은 포장지를 잘 접어 책에 끼워두었다. 오다는 한껏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사카구치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기대한 대답이라도 들으려는 어린 아이 같은 표정에 작게 웃은 사카구치는 ‘책 고마워요. 좋아하는 작가인데 잘 읽을게요.’라고 인사하며 책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쥐었다. 별 뜻은 없을 거다. 사카구치는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책의 표지를 쓸어보며 작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번에 읽고 싶다고 한 게 기억나서 샀는데. 네가 기뻐하니 나도 기쁘군.”

사카구치는 영문 모를 말을 하는 그를 잠시간 응시했다. 언제 그런 말을 했더라. 아무리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을 돌려보아도 쉽사리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다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사카구치를 마주보았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오다는 생각 안에서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카구치에게 물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로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 손사래를 치며 웃을 뿐이었다.

“오다씨가 이런 말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워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고가 한 말이니 기억할 수밖에.”

또.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잠시 생각이 멈춘 사카구치는 최대한 그의 말에 예민한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다. ‘감사합니다.’ 짧은 대답을 건넨 사카구치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띤 채로 오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을 끝으로 둘의 의미심장한 대화는 끝이 났다. 이후로는 그저 시시콜콜한 평소 이야기가 오갈 뿐이었다. 일은 어땠는지, 요즘 근황은 어떤지, 아이들은 잘 지내는 지와 같은 소소한 대화였다. 사심하나 깃들지 않은 대화. 사카구치는 이정도의 거리가 서로에게는 좋을 것이라 생각하며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새어나올 것 같은 감정은 다시 꽁꽁 묶어둔 채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사카구치는 그 뒤로 오다가 내뱉는 다정한 말들을 냉정하게 쳐내며 자신을 방어할 뿐이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는 것은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한 번 그와의 대화를 곱씹던 사카구치는 자신을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던 그의 걸음걸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긋한 어투지만 중저음의 목소리,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까지. 사람이 어떻게 그리 다정할 수 있을까. 그의 속내가 궁금해 죽을 것 같았을 때에는 그에게 직접 어떻게 그렇게 다정할 수 있는지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글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라는 말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사카구치는 잠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던가. 그는 다정하긴 했으나 주변 사람의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가슴을 흔드는 이야기를 했던가, 그것도 아니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언젠가 다자이가 ‘안고는 참 사랑받고 있네?’라고 말했던 것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때는 자신에게 막중한 프로젝트를 맡긴 상사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으나, 자신을 위해 밤참을 가져다준 오다의 선물을 보고 한 말은 아니었을까. 사카구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지 걱정했지만, 오늘 낮까지 함께 있었던 그는 여전했다. 늦어버린 만큼 그에게 보상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그가 사라진 골목을 빠르게 뛰어나가며 그의 뒤를 쫓았다.

***

사카구치는 잠시간 자신의 눈꺼풀에 내려앉은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한번 읽은 책임에도 예전 생각과 함께 피어오르는 생각들은 퇴색될 만큼 오래되었지만 아껴두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움이랄지, 사랑스러움 이랄지. 가만히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쪽잠을 자던 그는, 부스스 눈을 뜨고 몸을 웅크렸다. 금세 물들어버린 저녁노을은 검푸른 색으로 하늘을 덮어가고 있었다.

“책 한 권 읽기도 참 힘드네요.”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내뱉은 말은 정처 없이 그의 앞을 맴돌다 사라졌다. 앓는 소리를 내며 뻐근한 몸을 뻗은 사카구치는 창가에 놓인 액자를 매만지며 웃었다.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진이었다. 지금의 사카구치와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카구치는 ‘다시 읽으니까 좋네요. 고마워요, 사쿠노스케.’라고 인사하고는 사진을 다시 창밖을 향해 돌려놓았다. 늦었다면 늦은 인사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오다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사카구치는 돌려놓은 그의 사진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는 밤을 잡아먹듯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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