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츄] 나와 너의 사계.4

문스독/다자츄 2020. 1. 13. 00:56

봄이 오는 소리는 별다른 게 아니다. 읍내에서 씨감자를 팔고 비닐하우스에서 기르던 모종들을 하나둘씩 꺼내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일 때, 정말 봄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카하라는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에 낀 장갑을 벗고, 모종의 이파리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아직 여린 이파리가 힘없이 찰랑거렸다. 나카하라는 모종을 한 판 구매하여 옆에서 걷고 있던 다자이의 팔에 걸어주었다. 다자이는 별다른 말 없이 모종들을 바라보며 ‘잘 커야 할 텐데.’라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아직 봄이 오지는 않았지만, 시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봄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 온다는 것은 분명 겨울과의 이별이었다. 나카하라는 은은하게 남은 아쉬움에 고민스러운 얼굴로 시장을 나서려 했다. 분명 겨울이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집이 비좁아 코타츠를 꺼내지는 못해도 겨울이라면 꼭 해야하는 것. 그것은 특정한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나카하라는 그걸 까먹고 있었다니 말이 안 된다며 중얼거리고는 읍내 시장에서 두부와 곤약, 그리고 숙주와 얇게 저민 고기를 장바구니에 담고 이제 됐다며 다자이에게 어서 가자는 듯이 손짓했다. 다자이는 양손이 전부 모종으로 묵직했다.

“츄야, 이거 언제 다 심게? 허리 부서지는 거 아니야?”

“안 부서져. 너도 같이 심을 거니까 내 걱정은 마라.”

‘그건 듣도 보도 못한 소리인데.’ 다자이는 자신도 동참시킨 밭일을 상상하다 고개를 젓고는 어떻게 도망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하지만 나카하라의 부탁에서 도망친다면 다음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 벌써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다자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카하라는 히터가 너무 세다며 버튼을 눌러 끄고 창문을 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을 에던 차가운 바람은 조금씩 녹아내린 것인지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나카하라는 상쾌한 산 공기를 담아두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조금 속도를 줄여 산길을 지나가는 다자이에게 속도를 올려보라고 말했다. 나카하라의 요구에 다자이는 ‘엇, 정말 그래도 되나? 쿠니키다 군이 절대 과속하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대답하며 커브 길을 안정적으로 돌았다.

“나랑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올려! 비밀로 해줄 테니까.”

나카하라는 빠르게 달리는 차에서 시원한 공기를 그대로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보기에 험준한 산길이 아닌 이곳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운전대를 잡은 다자이를 보챘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보챔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몇 번을 나카하라에게 되묻고는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액셀을 강하게 밟으며 빠른 속도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앞 좌석에 앉아있음에도 그대로 뒷좌석까지 밀려버리는 압력을 받고 눈 앞이 깜깜 해지는 것 같았다. 뺨을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산 공기는 느껴지지 않고 지옥 문턱의 공기가 그의 코끝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나카하라는 커브 길을 따라 흔들리는 자신의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큰 소리로 다자이를 부르며 그에게 운전을 멈추라고 이야기했지만, 다자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이 우악스럽게 운전했다. 나카하라는 시골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자동차는 나카하라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제 속도를 찾았다.

“너, 다시는 운전하지 마.”

“에, 그러면 츄야는 누구랑 읍내를 가나?”

‘걸어서라도 나 혼자 간다.’ 나카하라는 하늘의 모든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며 다자이에게 말했고, 다자이는 한결 상쾌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일탈이었다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들리는 시끌벅적한 해프닝에 산은 기뻐 보였지만, 나카하라는 몇 년이 늙은 기분이었다.

 

***

 

아까의 과속 사건으로 인해 피곤해진 정신을 다잡은 나카하라는 사 온 모종을 온기가 있는 창고에 넣어두고 음식 재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아까 나카하라에게 몇 번 쥐어 박힌 부분을 연신 문지르며 아프다는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벼운 잎채소들부터, 무거운 계란을 전부 들여오던 나카하라는 엄살을 그만 부리고 밥이 먹고 싶으면 어서 움직이라고 말했다. 이게 21세기 농노지 뭐야. 다자이는 입을 비죽 내민 채 중얼거리며 바구니 안에 물건을 깔끔하게 냉장고 안으로 넣었다. 나카하라는 무슨 일로 말을 잘 듣냐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다자이는 뭔가 강아지라도 된 기분이었지만, 운전에 이어 입을 잘못 놀리면 분명 저녁밥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노닥거릴 시간도 없이 쫓겨날 거라는 생각에 아무런 말 없이 거실에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츄야, 밥은?”
“내가 네 엄마인 줄 아냐, 진짜.”

하지만 나카하라는 투덜거리면서도 식사 준비를 했다. 읍내에 아침부터 다녀왔음에도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밖은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겨울은 이게 문제라니까, 낮이 짧아. 나카하라는 곧 오게 될 봄은 그러지 않을 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재료를 씻고 준비했다. 전에 사둔 쌈배추는 먹기 좋게 썰어두고 청경채는 잎을 전부 떼어둔다. 그리고 숙주와 쑥갓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손질을 해두고 다른 뜰채 바구니에 올려두었다. 다자이는 언제 자리를 바꾼 것인지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 나카하라가 채소를 씻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파리에 먼지 하나도 안된다는 듯이 깨끗한 물에 여러 번 채소를 씻던 나카하라는 마지막으로 물에 곤약을 담아두고는 시린 손에 숨을 불어넣으며 2인용 무쇠 냄비를 찬장 아래에서 꺼냈다.

“다자이, 창고에서 간이 가스레인지 좀 꺼내와 줘.”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말에 군소리 없이 곧장 일어나 가스레인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찾아왔다. 나카하라가 꺼낸 냄비를 본 것만으로도 그가 무슨 요리를 할지 짐작한 것인지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나카하라는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하는 다자이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냄비를 닦아내었다. 작은 종지 그릇에 달걀을 담아오는 것으로 저녁 식사 준비를 마쳤다. 나카하라는 무쇠 냄비를 간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고 그의 곁에 비계덩어리를 같이 두며 다자이에게 불을 켜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준비되었다는 듯이 불을 켜고 비계로 냄비에 기름칠한 뒤,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달궈진 냄비에서는 고기가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카하라는 육수를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며 조금 서두르는 모양새로 다자이가 앉아있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자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나카하라가 결정하도록 기다렸다. 나카하라는 어느 정도 고기가 익자, 간장을 부었다. 지글거리는 고기에 간장이 스며드는 모습이 꽤나 먹음직해 보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육수 조금과 먹고 싶었던 채소들을 차곡차곡 쌓고, 옆에는 곤약과 두부까지 올려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수를 더 부은 뒤 잠시 뚜껑을 닫아버린 나카하라는 ‘오랜만이야.’라고 말하는 다자이의 말에 웃어버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시간이 가장 기대되더라.”.”

“엇, 나도. 뭐부터 먹지하고 고민하게 되잖아.”

두 사람은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뭐부터 집을지에 관심이 몰려있었다. 나카하라는 숙주와 고기였고, 다자이는 일단 두부를 그릇으로 먼저 가져온 뒤 두부가 식을 때까지 고기를 먹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그게 뭐냐며 서로의 대답을 비웃었지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기전골은 모두가 배불리 먹는 메뉴이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올라가는 고기와 채소들, 그리고 마지막에 올라오는 음식은 뭐든 상관없었다. 찐득한 소스에 볶은 볶음밥이라던가, 너무 배부르다 싶으면 달걀과 육수를 넣어 죽을 끓인다는 것이 나카하라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 일단 이 식사를 마치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냄비 뚜껑에서 김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자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종지에 달걀을 까 넣어주었다. 나카하라는 고맙다고 말함과 동시에, 달걀을 빠르게 풀고 다자이의 달걀도 똑같이 풀어주었다. 이제 곧 냄비 뚜껑이 열릴 시간이었다. 달짝지근한 간장의 냄새가 강해지자, 나카하라는 셋을 센 뒤 냄비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는 아직 숨이 죽지 않은 쑥갓과 배추가 고기 위를 아슬아슬하게 배회하고 있었고, 숙주는 고기와 뒤엉켜 있었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말했던 대로 숙주와 고기를 함께 집어 달걀물에 살짝 담갔다. 그리고 금방 빼낸 뒤,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뜨겁고 달달한 간장의 향과 달걀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흩어지며 금세 식욕을 돋았다. 다자이는 아직 두부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곤약을 먼저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김이 나는 곤약을 넣기 전, 고기를 한 점 들어 그대로 달걀물에 담그고는 고기에 달걀옷을 입혀 한입에 넣었다. 행복이란 이런 맛이 아닐까? 따뜻하고 든든한 고기와 채소에 부드러운 달걀의 조화. 나카하라와 다자이는 한동안 아무런 대화 없이 전골에만 집중했다. 채소가 부족하면 채소를 더, 고기가 부족해지면 채소를 가장자리로 밀어놓고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째 고기인지 세기 힘들어졌을 때, 다자이는 ‘겨울이 가기 전에 행복한 만찬이네.’라고 중얼거리며 나카하라를 바라보았다.

“원래 봄이 오기 전에 한 번 이렇게 먹어야 해. 봄에는 일하니까 밥 챙기기가 힘들단 말이야.”

“츄야가 일 시킬 거 생각하니까 더 많이 먹어야겠다.”

다자이는 쑥갓을 한입에 넣으며 웃어버렸다. 나카하라는 오랜만에 농사일할 생각에 조금은 막막했지만, 오늘은 고기전골의 날이니 다른 걱정은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나카하라는 자신의 모친이 말하던 날씨가 추울 때 든든히 보충을 해주어야 이번 일 년을 잘 보낼 수 있다는 미신과도 같은 말을 생각하며 열심히 고기로 젓가락을 옮겼다. 뭐, 농사야 미래의 내가 알아서 잘하겠지. 나카하라는 막연하지만 든든한 생각을 하며 열심히 먹는데 집중했다. 절반가량 배가 찼다고 생각하며 젓가락이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을 때, 시골에 와서는 한 번도 울려본 적 없는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츄야, 츄야 거 같은데?’라고 말했지만, 나카하라는 전화 올 곳이 한 군데도 없었기에 의문스럽기만 했다. 받을까 받지 말까 고민하던 전화를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을 때, 나카하라는 조금 후회가 되었다.

“누군데 그래?”

나카하라는 연락처를 지웠음에도 익숙한 전 애인의 전화번호를 가만히 응시했다. 역시 받지 말자고 결정하여 전화를 뒤집어 놓았지만, 한 번 울린 전화는 끊임없이 오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나카하라의 표정에 ‘뭐…. 빚쟁이라도 돼?’라고 물었지만 나카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퇴색될 때는 말 못 할 쓰림이 있다. 나카하라는 곤약을 건져내 먹으며 ‘그냥 전 애인이야.’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전 애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란 분위기였다. ‘전’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전 애인의 존재만으로 이곳에 저 배낭 하나만을 들고 내려왔다던 나카하라가 뭔가 도시에 남기고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말을 아꼈다. 나카하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가 보아왔던 나카하라는 딱히 그 전 애인이라는 사람에게 미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 분위기가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별거 아니야. 다 끝났는데 왜 구질구질하게 전화를 거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니까.”

“저쪽은 츄야에게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 아, 물론 나는 잘 모르지만.”

“권태기에 저쪽이 바람피워서 헤어졌는데.”

다자이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왜 저런 놈이 츄야를?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왜 쓸데없이 그런 말을?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눈치를 보며 고기전골의 불의 세기를 조금 줄이고 ‘우리 천천히 먹자.’라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나카하라는 고기를 몇 점을 겹쳐 집어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나카하라의 전 애인과의 연애는 오래갔다면 오래간 연애였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나카하라가 극복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자신의 감정을 자로 재는 듯한 행위였다. 그의 ‘너에 대한 감정은 이 정도인 거야?’, ‘너는 나한테 별로 해주고 싶지 않아?’와 같은 말들은 나카하라의 사랑을 날카롭게 잘라내었다. 나카하라는 ‘내가 시간 내서 더 해주면 되지, 뭐가 그렇게 손해라고.’라는 생각으로 그의 요구를 하나둘씩 들어주며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그것은 나카하라 자신조차 좀먹는 일이었다는 것을 이곳에 내려오기 바로 직전에 알아차렸다. 사랑조차 날카롭다면 대체 무엇이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조금 메마른 상태에서도 이상함을 느꼈던 나카하라는 사랑을 자로 잰 듯이 뚝뚝 끊어 줄 수 없었던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무음으로 해도 끈질기게 전화하는 한 번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전화받을까?”?”

“어... 츄야가 하고 싶은 대로? 욕을 쏟아부어도 좋고, 츄야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봐.”

달이 채워지고 줄어가는 시간 동안, 나카하라의 마음에는 많은 것들이 채워졌다. 아직도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감정도 분명히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이곳의 따뜻한 햇빛을 받으면 금방 사그라지는 마음이었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에게 볶음밥이든 죽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후식으로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해두고는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다자이는 자신이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었지만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나카하라가 처음 왔을 때보다 밝아졌다는 것은 그의 눈에도 보이는 발전이었지만, 갓 골격을 쌓은 탑처럼 위태로운 것이었다. 게다가 한 번 무너진 적이 있으니, 다자이의 눈에는 더욱 불안해 보였다. 나카하라 아주머니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다자이는 문득 떠오르는 나카하라의 모친을 생각하며 그가 미리 다져둔 당근과 쑥갓, 그리고 파를 냄비에 볶았다. 간장 소스가 가득한 냄비에서는 맛있는 향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분명 따뜻한 차를 끓여주며 잘했다고만 하실 텐데, 그건 좀. 다자이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흰쌀밥을 볶던 다자이는 육수를 넣어 죽을 만들까, 아니면 볶음밥을 할까, 잠시간 고민했다.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채소들은 금세 밥과 뒤엉켜 맛있는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자이는 창 바로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걸으며 전화 통화를 하는 나카하라를 훔쳐보았다. 추운 겨울바람 사이로 날리는 입김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듯이 보였다. 다자이는 육수를 냄비에 부어 넣고 주걱으로 붙은 밥을 잘 풀어내어 죽을 만들 준비를 하였다. 추운 날에 아프면 안 되니까. 천천히 육수에 밥이 녹아들 듯이 풀어내고는 나카하라가 들어올 때까지 저어가며 정성스럽게 죽을 준비 하였다.. 나카하라는 생각보다 빠르게 전화를 마치고 들어왔다. ‘어우, 춥다.’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팔뚝을 쓸어내리던 그는, 다자이가 죽을 만들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으며 주걱을 뺏어 들었다.

“잘했어?”

“응, 욕이나 퍼부어 주려다가 그냥 이야기 좀 나눴다.”

정말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나카하라는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냐?’라고 다자이에게 되물었다. 다자이는 마음을 읽힌 건 아닐지 걱정하며 말을 돌렸지만, 입이 근질거리는 것은 나카하라인 것 같았다.. 나카하라는 죽을 덜어 다자이에게 먼저 건네주었다. 다자이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죽을 먼저 받고는 자신의 죽에 남은 달걀을 풀어 넣는 나카하라를 보며 자신도 똑같이 따라 했다. 나카하라는 죽을 한 입 먹은 후에야 조금 속이 풀린다고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지금 고향에 와있고, 네가 없어도 행복하다고 말했어. 좀 생긴 연하남도 있다고 네 이야기도 팔아넘기듯 말하기도 했고.”

“그랬더니?”

나카하라의 입에서는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행복. 사실 이곳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그가 이곳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자이는 긴장이 한결 풀린 표정이 되어서는 나카하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카하라는 그러자 아무런 말도 안 하고‘아, 그렇구나.’라던가 ‘응.’으로 대꾸하던 자신의 전 애인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면 재미있어했다. 나카하라는 소소한 복수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다자이의 생각에는 지금 전화를 건 그 ‘전 애인’이라는 작자에게는 가장 큰 복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활짝 미소를 지으며 죽이 맛있다고 말하는 나카하라에게 다자이는 평소보다 장난스럽게 자신이 잘 만든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카하라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계산보다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행복했고,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는다면 그것에도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풍족함을 느꼈다. 나카하라는 굳이 연애한다거나 특정한 사람이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도시에서였다면 어땠을까 고민하던 나카하라는 이미 두고 온 과거는 아직 꺼내 보지 말자며 생각을 묻어두었다. 역시 이 행복의 진원지는 앞에 앉은 갑자기 나타난 이상하면서도 재미있는 남자 때문이었을까. 나카하라는 문득 다자이를 보며 생각했지만, 기분 좋게 웃는 그에게 죽을 더 떠주느라 금세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잊어버렸다. 사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없었다. 나카하라는 꽉 찬 배를 두드리며 등을 벽에 기대었다. 어깨에 가득 올려두었던 짐 중 하나를 내던진 기분이었다. 다자이는 한결 가벼운 표정의 나카하라에게 ‘잘 먹었어?’라고 물었다. 나카하라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대화할 때마다 김이 나는 추운 겨울은 이제 꼬리만을 남긴 채 봄이 올 자리를 천천히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곧 오는 봄에도 천천히 채워보자고 생각하며 다자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봄에도 잘 부탁한다.”

다자이는 이 인사가 농사만을 부탁하는 인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도. 잘 부탁해, 츄야.”

다자이의 시선 끝, 나카하라의 웃는 얼굴에는 이미 봄이 온 듯싶었다. 두 사람은 밖의 겨울을 대신해 곧 오게 될 봄을 대비하여 미리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을 꺼내놓고 있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나와 너의 사계.3

문스독/다자츄 2020. 1. 10. 23:41

다자이, 너는 왜 여기 퍼질러져 있냐?”

피난 온 거라네. 누가 여기 있는지 물으면 절대 대답해주지 말게나, 츄야.”

네가 여기 있다고 제일 먼저 소리칠 거다.’ 나카하라는 그에게 내뱉으려던 말을 새우전병과 함께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씹어 삼켰다. 이곳의 겨울은 시간이 지나가듯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스쳐 간다. 고구마를 굽는 장작 소리와 차가운 바람의 향. 나카하라가 멍하니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도시를 처음 올라갔을 때와 상반되었다. 굉장히 추울 때 왔다고 느꼈는데 이젠 그냥 그렇네. 나카하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의 군식구나 다름이 없어진 다자이는 담요를 몸에 두른 채 노곤하게 난로 근처에 누워있었다. 다자이와 먹은 밥그릇 수도 이제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다자이는 이따금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주일에 서너 번은 나카하라에게 찾아왔다. 초반에는 집에 먹을 음식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했지만, 함께 읍내에 나가도 사는 것이 없으니 먹을 것이 궁핍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자이의 말이 가장 신빙성이 있을 때는 일을 피해 도망 왔을 때였다. ‘츄야 나 좀 숨겨줘! 일을 끝냈는데 또 일을 주려고 하잖아!’라는 외침과 함께 현관을 박차고 들어오던 나날이 며칠간 계속되자, 나카하라는 이제 정말 밧줄로 다자이를 묶어 다시 농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사자인 다자이는 별로 진지해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카하라는 다가오는 봄에 무엇이 어울릴까 잠시 고민했다. 이맘때의 겨울은 봄을 위해 분주해지는 시기였으니 말이다. 나카하라는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겉옷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 넓은 마당의 한 켠에는 큰 텃밭이 있었다. 두 사람이 먹기에는 좀 많지 않은가 싶은 텃밭. 나카하라의 모친은 그곳에서 열린 농작물로 일 년을 보내기도 하고, 몇 소쿠리를 나누어 옆집에 가져다주며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언제나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하던 모친의 말이 생각났지만, 방구석에서 난로를 끼고 잠든 다자이를 생각하니 엄마,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 망친 것 같아요.’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이번 봄에는 뭘 심을 생각이야?”

언제 나온 건지 모를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가만히 텃밭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이 잘 골라두었다며 텃밭 앞에 앉았고 어쩌다 굴러 들어간 작은 돌을 텃밭 밖으로 빼냈다. 나카하라는 그가 자신의 혼잣말을 들었을지 걱정하다가, 그의 물음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텃밭을 바라보았다.

감자? 5월에 고구마 순을 심어도 좋고.”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봄 감자 좋지. 맛있겠네.’라고 중얼거렸다. 다자이가 다른 건?’이라고 묻는 말에 다자이는 또다시 고민에 빠진 듯이 텃밭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어렸을 적 자신이 보아왔던 텃밭처럼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토마토를, 그 뒤에 나눠진 공간에는 배추와 당근을 심어야겠다고 대답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아 행복한 상상을 하던 나카하라는 파종하려면 허리가 휘어지겠네.’라고 장난스럽게 말한 다자이에게 당연히 너도 도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봄이 온다는 생각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어.”

아까까지는 퍼질러 자느라 기분이 나빴냐?”

나카하라는 텃밭 아래 앉아 겨울 햇볕을 맞으며 중얼거리는 다자이에게 쏘아붙이고는, 감기라도 들면 귀찮아지니 어서 들어가자고 그를 재촉했다. 다자이는 군소리 없이 그를 따라 들어와서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뭘 할 줄 알고 거기 앉아있는 거냐며 그에게 핀잔주었지만,, 다자이는 이제 여기가 자신의 지정석이라는 말을 하며 어서 뭐라도 해보라는 듯이 나카하라를 바라보았다. 다자이의 말대로 이제 그곳은 다자이의 자리였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오래된 사이는 아니었지만, 다자이는 이미 이 집에서 어느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츄야가 요리하는 걸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그러냐?”

, 능숙하지 않아서 한 번에 몇 가지 요리를 안 해서 그럴지도.”

나카하라는 따라붙은 다자이의 말에 그대로 굶고 싶냐?’라고 대꾸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얼마 전 읍내에서 사 온 채소들과 먹을거리들이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큰 연근을 꺼냈다. 다자이는 굳이 나카하라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요리를 할 때는 아무런 간섭도, 질문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카하라는 연근에 묻은 흙을 잘 털어내고 연근을 씻었다. 흙에 뒤덮여 있던 연근이 드러나자 나카하라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칼을 들고 천천히 껍질을 잘 벗겨내었다. 연근은 썩은 곳이 없이 매끈했고, 나카하라는 다른 연근도 똑같이 손질하였다. 연근의 껍질을 전부 벗겨낸 뒤, 나카하라는 묵직한 나무 도마를 꺼냈다. 자신의 어머니 시절부터 쓰여왔던 도마인지라 군데군데 칼집이 많이 보였다. 나카하라는 도마를 물로 한 번 씻어낸 뒤 면포로 닦아내고 연근을 올렸다.

그 도마, 정겹네.”

다자이의 혼잣말 같은 한마디를 뒤로한 채 나카하라는 칼을 놀렸다. 조금 둔해 보이더라도 두께를 맞추어 천천히 연근을 예쁜 모양으로 썰어내었다. 어디 하나 부서지거나 깨지지 않은 동글동글한 모양새로. 분명 한입 물면 아삭 거리는 식감이 시원하게 퍼질 것 같았다. 연근이 천천히 썰리며 나무와 칼날이 맞닿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지,, 나카하라의 손놀림은 조금씩 경쾌해지며 빨라지기 시작했다. 연근을 전부 썰어내고 물에 담가 둔 나카하라는 혼탁해지는 연근 물을 확인하고 조용히 앉아있는 다자이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자이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나카하라가 요리하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미있냐?”

, 나쁘지 않아.”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거지, 나쁘지 않아는 또 뭐래. 나카하라는 그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냄비에 물을 가득 담아 불 위에 올렸다. 따다닥 가스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고 금방 불이 올라왔다. 나카하라는 냄비를 올린 채 식초를 냄비 안에 대강 부어 넣고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 물이 어느정도 끓기 시작하자 나카하라는 바로 연근을 전부 넣었다. 연근 하나하나가 뜨거운 물과 만날 수 있도록 한 번 섞어준 뒤, 그대로 뜰채를 이용해 연근을 건져내었다. 연근에서 물을 빼내고, 나카하라는 연근을 담글 물을 준비했다. 식초와 유자청 그리고 마지막에 넣을 통후추 한 줌. 나카하라는 일단 식초와 유자청을 잘 섞고 맛을 봐가며 설탕을 넣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물이 완성되자, 그것을 끓여두고 연근을 미리 소독해둔 병에 차곡차곡 담았다. 겹쳐 놓는 것보다는 조금 삐뚤빼뚤하게 담아 잘 물들 수 있도록. 나카하라는 피클 물이 식을 동안 다자이의 앞에 앉았다. 다자이는 이제 곧 완성되는 건지 물으며 저건 얼마나 있다가 먹을 수 있는지 물었다.

하루 정도만 냅두면 돼. 우리 엄마가 안 해줬냐?”

자주 해주셨어. 그래도 츄야가 만든 건 어떨지 궁금하네.”

미소를 띤 표정은 나른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했다. 나카하라는 따뜻하게 끓인 보리차를 다자이에게 건네주며 우리 엄마랑은 뭐 하고 지냈냐?’라고 넌지시 물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질문에 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마치 더 궁금해했으면 좋겠다는 듯이 나카하라를 바라보다가 눈꼬리를 휘어 웃고는 보리차를 홀짝거렸다.

밥 먹고, 텃밭도 가꾸고 그랬어. 정말 별거 없었는데.”

별거 없었다는 것 치고는 엄청나게 그리워하는 것 같아서.”

츄야도 그리워서 돌아온 거 아니야?”

나카하라는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다자이의 질문에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하다 전부 식은 피클 물을 확인하겠다는 명목으로 자리를 피했다. 식어서 미지근해진 피클 물은 너무 신맛이 강했다. 나카하라는 혀를 타고 올라오는 신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유자청을 한 번 더 물에 풀어 넣었고, 다자이는 그런 나카하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자이의 말처럼, 나카하라는 분명 어디선가 전해져 오는 따뜻함이 그리워 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따뜻함은 나카하라가 지긋지긋해 하던 시골의 정취와 고요함에서 흘러나오던 것인지, 아니면 나카하라의 모친에게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열쇠가 딱 맞는 자물쇠를 찾듯이 나카하라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나카하라는 달달해진 피클 물을 한번 맛본 뒤, 그대로 연근이 담긴 병에 담았다. 많이 끓여서인지 세 병을 채웠는데도 작은 병으로 하나 더 나왔다. 나카하라는 이제 됐다고 중얼거리며 병 입구를 젖은 면포로 잘 닦은 뒤, 병을 닫았다.

하루만 지나면 맛있어질 거다.”

, 아삭거리겠는데.”

손이 많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피클은 겨우 세 병이 나왔다. 한 병은 다자이와 함께 농원에 가져다줄 생각이었으니 자신이 먹을 것은 두 병뿐이었다. 이 유자 연근 피클은 몇 계절을 갈 수 있을까. 나카하라는 잠시 고민하듯이 병을 바라보다가 일단 병들을 비교적 서늘한 곳으로 옮겨두었다. 하얀 연근이 유자의 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이 계절의 묘미라고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병에 묻은 물기를 깨끗하게 닦아내고는 개수대를 정리했다. 나카하라는 방금 전 외면했던 다자이의 질문에 대한 답을 다시 곱씹어 생각했다. 솔직히 대답해보자면 나카하라는, 그리웠다. 뼈저리게 그리웠지만 무슨 아집이었는지 내려갈 수 없었다. 자신의 모친이 그리웠고 이곳의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삭막한 도심의 공기와 시끄럽고 반짝거리는 화려한 것들은 그 속에 있을 때 잠깐 정도 위안이 되었지만, 속을 따듯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나카하라는 텅 빈 자신을 바라보며 이 모습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되뇌었고, 그 모습이 익숙해 질리 없었기에 도망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츄야, 그런 표정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어떤 표정이길래? 나카하라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미간을 매만졌다. 다자이는 뭔가 동요하는 표정으로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래.’라고 얼버무린 나카하라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기에, 나카하라도 더 이상의 할 말이 없었다. 아직 해가 묵어가도록 먼지가 쌓인 마음을 드러내기에는 다자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편안하게 츄야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니까.”

너는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알고 말하는 거냐?”

나카하라의 질문에 어깨를 들썩여 보인 다자이는 나는 모르지, 초능력자도 아니고 내가 츄야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라고 대답했다. 나카하라는 더욱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도대체 뭘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지껄였는지 말해보라며 그를 타박했다. 하지만 다자이는 그의 타박이 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지, 그에게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까 밭에서도 그렇고, 요리도 그렇고 혼자 잘 생각해서 척척 잘 결정하고 움직이면서 츄야는 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모른다고 생각해?”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자신이 싫다고 여기던 것이 사실은 가장 소중했던 것이었으니까. 이 문제는 다자이가 앞에 있고 없고를 떠나, 자기 자신의 약한 모습을 직면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카하라의 꾹 닫은 입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다자이도 억지로 그의 말문을 트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자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나 보리차 한 잔만 더 줄 수 있어?’라고 물었고, 나카하라는 컵을 가져가 보리차를 따라 가져왔다. 살짝 김이 나는 컵을 그러잡은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기분 좋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츄야 보다 엉망이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

나카하라는 훌훌 털어버린 듯이 말하는 다자이가 조금은 신기한 것인지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자이는 아주머니도 그랬으니 나도 딱히 물어볼 생각은 없다면서 보리차를 홀짝였다. 나카하라는 왜 그가 자신의 모친을 그렇게 그리워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훔쳐본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굳이 모친을 언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린 날의 나카하라는 시골이 지긋지긋하고 이 적막이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시끄럽고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트리 장식에 걸려있는 커다란 별이나 전구들과 같이 모두의 시선에 들만한 무언가가.

유자 빛이 나는 연근도 행복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카하라의 영문 모를 중얼거림에 다자이가 작게 웃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어른이 아닌 것은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하여 전부 어른은 아니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얼굴에 남은 옅은 그림자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가 모른 척 해주었듯이, 자신도 모른 척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피클을 만들었는데 유자차 향이 난다, .”

유자 연근 피클이잖아, 츄야

연근 피클 때문인지 주방 곳곳에서는 아직 유자의 향이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그 실없는 소리를 시작으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나누며 보리차를 한 잔 더 마신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깊은 비밀을 나누거나, 어렸을 때처럼 비밀 일기장을 쓴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나카하라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배고프냐? 귤이라도 가져다줄까?’라고 물으며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를 챙겨 일어났다.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양하지 않겠다는 듯이 식탁에 턱을 괸 채 냉장고 문을 여는 나카하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깨에 잔뜩 지고 돌아온 짐을 덜어낼 때는 언제나 든든하고 따뜻한 한 끼가 중요하지. 다자이는 비가 오던 날 무거운 표정으로 찾아온 자신을 반겨주던 나카하라의 모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한마디에 많은 일이 변화했기에, 잊지 못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모친을 만났을 때의 자신을 회상하다가, 그대로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 또한 지금을 그저 추억으로만 지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다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나이기에. 그때의 자신과 자금의 자신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만 같은 사람이듯이. 모든 선택이 진정한 자신을 뜻하는 것은 아니니까. 다자이는 왜 그런 표정으로 보냐?’라고 묻는 나카하라에게 아까보다 기운이 난 것 같길래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하고는 키득거렸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장난에 마치 그를 언제 칠지 모른다는 듯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다자이는 그가 정말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을 피하지는 않은 채 가만히 토끼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 때리려고 했나, 츄야? 때리기에는 너무 잘생긴 얼굴 아닌가?”

퍽이나 그런 얼굴이다. , 이거 들고 어디 좀 가자.”

나카하라는 아까 만든 피클 중 하나를 작은 쇼핑백에 담았다. 흰 무지 쇼핑백이어서인지 선물 모양새가 나지는 않았지만, 나름 깔끔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건네는 쇼핑백을 받아 들고 영문을 모른 채 집을 나섰다. 대낮이었던 하늘은 점점 어둠을 덮고 있었다. 추운 날씨가 힘들었는지, 나카하라는 빠르게 어둠을 덮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겨울도 끝물인데 아직 해지는 게 빠르네.’라고 중얼거렸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어디를 가는지 물었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어차피 아는 곳이니 그냥 따라오라고 말하며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그의 소매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다자이는 점점 가까워지는 익숙한 길목에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바로 앞에 보이는 **허브라는 간판이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자신의 허브농원으로 보이자, 다자이는 이건 좀.’이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들어가야지. 내일 저 유자 피클이랑 국수해줄게.”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내일은 땡땡이치지 말고 일하고 와라.”

나카하라는 그를 끌고 가다시피 하여 농원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밖 청소를 마무리 짓고 있던 한 청년이 ‘다자이씨, 어디에 있다가 오신 거예요. 쿠니키다 씨가 어서 결산 서류 정리하라고 눈에 불을 켜셨다고요!’라고 말하며 나카하라와 다자이에게 다가왔다. 청년은 가까이 다가와서야 나카하라를 발견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나카하라는 조금 어정쩡한 모습으로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자신을 나카하라라고 소개했다.

, 나카하라 아주머니 아드님이신가 보네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나카지마 아츠시에요. 저번에 고기 조림 너무 맛있었어요!”

나카지마는 요즘 보기 힘든 순수한 청년 같았다. 나카하라는 변변치 않은 솜씨였다며 스스로를 낮추고 다자이가 들고 있던 유자 연근 피클을 건네며 직접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카지마는 감사의 말을 몇 번이고 전하며 이렇게 있지 말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자고 말하고는 다자이의 한쪽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아 잡았다.

“다자이 씨.‘

나카하라는 몇 분 전 그를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철회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오죽 다자이가 도망갔으면 저러려나라는 생각으로 나카지마를 포장하며 사무소에 도착한 나카하라는 뭔가 호통을 치려다 자신을 발견하고 입을 다문 남자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앞집에서 살게 된 나카하라입니다. 다자이는 저희 집에 있었습니다. 빨리 보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이런 모습을 처음에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나카지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이곳이 회사나 아이의 장래를 맡기는 학원 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시골의 허브농원이었고, 이야기의 대상은 학생이 아닌 성인 남성이었다.

두 사람, 날 너무 애 취급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애 같이 굴지마.“

나카하라의 타박에 쿠니키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카하라는 내려온 지 꽤 되었는데도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왔다며, 쿠니키다에게 직접 만든 유자 연근 피클을 건넸다. 뭔가 소소한 물건이라도 직접 만든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선물이었다. 다행히도 쿠니키다와 나카지마는 선물이 마음에 드는 듯이 잘 넣어놓고 먹겠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나카하라는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혹시나 모를 다자이의 가출에 대비해 쿠니키다와 나카지마의 전화번호를 받았고, 불신의 표본이 된 다자이는 우는 척을 하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다자이, 내일 작업 다 끝나면 와. 국수해줄게. 쿠니키다 씨랑 나카지마 씨도 같이 와서 드세요.“

배신자들이랑은 거기 안가.“

다자이의 중얼거림은 아랑곳하지 않은 세 사람은 두런두런 수다를 나누었다. 나카하라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대화를 나누다가 밤이 머리끝까지 어둠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농원을 나설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다자이가 아닌 사람과 수다를 떨어보네. 나카하라는 조금 들뜬 마음을 고이 접어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에 담아두었다. 마치 고요함과 적막 속에서 보물 찾기를 하여 얻은 즐거움 같았다. 돌아가는 길은 가로등이 군데군데 밖에 없어 길이 많이 어두웠지만, 나카하라는 걸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익숙하게 발걸음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찾던 곳이 나올 테니까. 나카하라는 겨울밤을 비추는 자신의 집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마음을 품에 안고 그리움을 비우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녀왔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나카하라는 자신을 감싸는 온기에 뺨을 녹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Kiss Me Before Reach the Gun.3

문스독/다자츄 2019. 8. 2. 00:03

“나카하라 씨, 남편 분께서는 직업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아아, 이제 막 시작한 보안 회사인데, 거기 보안 프로그래머야.”

높디 높은 인공 암벽을 발로 딛고 오른 나카하라는 옆에 줄에 매달려 있던 아쿠타카와가 묻는 질문에 대답해주며 다음 돌을 잡아 몸을 움직였다. 나카하라는 점점 높은 곳으로 천천히 오르고는 꼭대기에 닿는 순간 숨을 고르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놓고 아래로 몸을 던졌다. 등반용 로프가 도르래에 말려 가는 소리와 함께 땅과 가까워진 그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대강 닦고 장비를 풀어내었다.

“저번에 보니까 사기꾼 같던데, 멀쩡한 직업도 있었나 보죠.”

“넌 그걸 또 듣고 있었냐…… 그리고 아쿠타카와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수건을 던지듯 건네는 사카구치에게서 수건을 받아 목에 두른 나카하라는, 인이어를 빼내고 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아쿠타카와를 힐끔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카구치는 딱히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카구치는 다자이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잘생기긴 했는데 가식적이에요.’라고 말하곤 했었다. 나카하라는 저 정도면 충분히 솔직한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어딘가 모르게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중얼거리며 나카하라에게 이혼 할 경우에는 잘 대비하라고 까지 일러주었다. 물론 나카하라는 그럴 리 없다고 단언했지만 말이다.

“좀 이상하다니까요. 그래서 부부 상담은 다시 갈 겁니까?”

나카하라는 물을 마시는 곳까지 따라와 부부 생활을 캐묻는 사카구치에게 그만하라는 말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우리 부부는 그런 거 안 해도 괜찮다니까?’ 나카하라는 손을 내저으며 말하고는 사카구치를 탈의실에서 쫓아낸 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카구치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일반인과 연애를 한다기에 또 며칠 못 가 헤어질 거라 생각했던 나카하라가, 위장 직업까지 가진 채로 결혼까지 강행하는 것을 보고는 결사반대를 했던 사카구치였다. 모두가 결혼 사진에 찍힌 다자이를 보며 잘생겼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지만, 사카구치는 무언가 숨기는 것 같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암살자이기 때문에 위장 직업을 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며 사카구치의 말을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해가 넘어갈수록 사카구치의 의심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나카하라는 그가 왜 이렇게 다자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원한 물을 맞으며 찝찝한 몸을 씻던 그는, 사카구치의 말에 떨떠름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샤워를 마쳤다.

“너 아직도 안 갔냐?”

“어차피 같은 장소로 이동할 거니까요. 아쿠타카와 씨도 어서 씻고 오십쇼.”

도로 입고 왔던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나카하라는 아직 앞에 서있는 사카구치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카구치는 인상을 쓰는 그의 표정에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품에 든 서류를 체크하며 그와 함께 이동했다. 나카하라는 앞만을 보고 걷는 사카구치의 보폭을 따라 걸으며 ‘너는 내 남편이 그냥 그렇게 생겨서 마음에 안 드냐?’라고 화두를 꺼냈다. 사카구치는 잠시 생각하듯 말을 아꼈다. 그런 사카구치의 표정을 알아내려는지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던 나카하라는 ‘나카하라 씨의 이야기와 행동 양상을 조합했을 때 뭔가 뒤가 구린 느낌이 납니다. 그래서 싫습니다.’라고 하는 사카구치의 말에 혀를 차며 도로 시선을 돌렸다.

“남의 남편 험담하니까 좋냐?”

“여쭤보셔서 솔직하게 답했습니다만?”

나카하라는 좀 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사카구치에게 말하며 무기 개발실에 도착했다. 평소 쓰던 무기들이 한층 가볍고 더욱 성능이 좋아진 것을 확인 차 온 두 사람은, 장비를 손에 들어보고 몸에 장착해보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취용 총알이 담긴 권총을 돌려 잡아 과녁을 조준하던 나카하라는 ‘나쁘지 않네.’라고 중얼거리며 나중에 온 아쿠타카와에게 총을 건네 쏘아보라고 말했다. 아쿠타카와는 그가 총을 건네자 곧장 앞에 있던 과녁을 향해 총을 쏘았고, 바늘이 붙어있던 작은 총알은 그대로 벽에 박혔다.

“저거 하나 집으로 가지고 가십쇼.”

“너는 또 그 소리냐. 야, 아쿠타카와. 안경 교수가 말 좀 그만하게 해줘라.”

아쿠타카와는 투덜거리는 나카하라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잔소리를 하던 사카구치를 바라보다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총을 만지작거렸다. 연신 말싸움이라도 하듯 대화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은 아쿠타카와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보고는 무슨 일이 있냐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뇨. 소생은 그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뭐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아쿠타카와는 ‘이걸 말해도 되나.’라고 아주 작게 중얼거리고는 눈동자를 굴렸다. 나카하라는 답답하게 구는 아쿠타카와의 행동에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소생의 생각으로는…… 어차피 나카하라 씨가 남편 분으로 인해 위험에 빠지신다면, 회사는 분명 그 분을 1위 암살 대상으로 올려 둘 겁니다. 그러니 안 죽을 리 없겠죠. 다른 상황으로 예를 들어 두 분께서 이혼을 하시게 된다고 한다면 나카하라 씨께서 직접 죽이실 수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군요……”

진지하게 사건이 터진 후 암살 계획까지 말하는 아쿠타카와를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진지하게 맞장구를 치고 있는 사카구치를 올려다 보았다. 사카구치는 얼이 빠진 듯이 보이는 나카하라에게 ‘그럼 일단 아무런 말 하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래도 부부 상담은 꼭 해보세요.’라고 말하며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나카하라는 언제나 자신의 편이라고 말하는 아쿠타카와에게 무미건조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허탈한 웃음을 내보였다.

“너희 내 남편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

“아직 못 믿으니까요. 원래 뒤통수는 먼저 치는 사람이 승자인 법입니다.”

나카하라는 사카구치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하는 그는 누가 보아도 논리 정연한 말을 하는 듯 보였지만, 나카하라에게는 전부 말 같지도 않은 말 같았다. 나카하라는 사카구치의 옆에 서서 깊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쿠타카와의 모습에 조금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담배 말리네. 마른 세수를 하며 두 사람 사이에 선 나카하라는 담배 연기를 뱉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나카하라는 오늘 있었던 이상한 대화로 인해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나카하라는 다자이가 저녁 전에 들어온다고 한 말을 되새기며 저녁 준비를 위해 앞치마를 입었다. 오늘은 뭘 하지. 나카하라는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확인했다. 아침용으로 사왔던 착즙 오렌지 주스. 매일 먹는 식빵과 과일. 그리고 요거트와 파릇함이 조금 죽은 듯한 아스파라거스. 나카하라는 한숨을 내쉬며 차라리 장을 봐올 것을 그랬다며 난감하다는 듯 뺨을 긁적거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나가기도 뭐하다고 생각하던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중요한 결단이라도 내리듯 진지한 표정이 된 그는 통화 연결음이 멈추자 곧장 말을 내뱉었다.

“여기 크랩 케이크 두 개 부탁 드립니다. 구운 양송이와 작은 양배추 가니쉬도 같이 가져다 주세요.“

전화 너머의 사람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나카하라는 전화가 끊기자 멈추었던 숨을 내뱉고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듯이 냉장고 안에서 아스파라거스를 꺼냈다.

“매번 시켜서 줄 때마다 조금 찔리긴 하지만…… 뭐, 모르니 됐나.”

아스파라거스를 씻어 도마에 올린 나카하라는 시계를 확인하며 그가 올 시간을 계산했다. 나카하라는 시간을 계산하듯 중얼거리며 습관처럼 칼을 가볍게 돌렸다. 오랜만이네 집 식칼은. 가만히 칼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다 다시금 손에 쥔 그는, 아스파라거스를 가볍게 썰어버리고는 프라이팬을 달궈 기름을 두르고 아스파라거스를 구웠다. 오늘 다자이 오면 같이 장보러 가자고 해야겠네. 달궈진 팬을 능숙하게 돌리던 나카하라는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잘 익은 아스파라거스를 접시에 덜어두고 곧장 현관으로 나가 주문해둔 크랩케이크를 받으러 나갔다. 역시 외식업체가 빠르다니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웃은 나카하라는 포장 용기에 담긴 음식을 가져와 다자이가 오기 전에 접시에 예쁘게 담기 시작했다.

나카하라가 음식을 담았던 포장 용기를 버리고 식탁에 잘 배치하던 중 다자이가 돌아왔다. 나카하라는 접시와 식기를 두며 ‘왔어?’라고 그에게 물으며 인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어 잠시간 현관 쪽을 돌아보던 나카하라는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돌려 잡고 천천히 현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암살자인가. 설마 당당하게 현관으로? 미쳤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발소리를 죽여 다가가던 나카하라는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벽 모퉁이만 돌면 바로 현관임에도 다자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에 암살자임을 확신하던 그는, 천천히 벽 너머로 발을 떼었다.

“왁!”

나카하라는 벽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놀라게 만드는 다자이의 행동에 그대로 손에 있던 나이프를 본능적으로 바닥에 던졌다. 순간 손을 들어 찔러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식은땀을 흘리던 나카하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자이를 응시했다. 다자이는 움찔하며 굳어버리는 나카하라의 표정에 성공했다는 듯이 박장대소하고는 많이 놀랐냐며 그를 품에 안았다.

“이……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잖아.”

나카하라는 입술까지 나온 육두문자를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자신을 안아주는 다자이에게 놀란 티를 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많이 놀란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그의 등을 쓸어주고는 ‘미안, 반응이 귀여울 것 같아서 해본 건데. 많이 놀랐어?’라고 묻고는 그의 이마에 입맞췄다. 나카하라는 한숨을 내쉰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뱃속부터 끌어져 나오는 숨을 나눠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불안에 떨며 들고 나온 나이프가 마루 틈 사이에 꽂혀있는 것을 보며 웃었다.

“츄야, 강도인 줄 알았던 거야?”

“대답이 없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어서 와서 밥이나 먹어.”

평소 성격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엎어 치기라도 했을 나카하라였지만, 그 상대가 다자이였기에 포옹만으로도 금새 화가 풀린 건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카하라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나이프를 뽑아 들고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다자이는 그를 뒤에서 따라가며 나이프가 없는 쪽 손을 뒤에서 잡았다. 나카하라는 간질거리는 느낌에 작게 피식 소리를 내며 웃고는, 그의 손을 깍지 끼듯 고쳐 잡았다.

“츄야가 놀라는 거 귀엽네.”

“뭐라는 거야…… 부끄러우니까 그만 말해.”

이렇게 다정하고 귀여운데 뭐가 의심스럽다는 건지. 나카하라는 환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다자이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사카구치가 말하는 그런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카하라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숙여 조금 더 길게 입술을 맞대고 떨어졌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사람은, 다시 단란한 부부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언제나 함께일 리 없음에

문스독/다자츄 2019. 7. 14. 20:00

이미 시간은 많이 지났지만 샤샤님 생일 축전입니다! 함께 푼 썰로 쓴 글인데...잘 표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ㅜㅠ 샤샤님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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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자락을 따라 넘쳐흐르는 핏줄기가 나카하라의 걸음걸음마다 길을 만들 듯이 방울방울 떨어졌다.나카하라는 자신의 곁을 지키는 그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난장판이 된 자리를 걸어 나왔다.벌어진 상처가 분명 커 보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걷던 그는,물들어가는 조끼를 코트 자락으로 살짝 가린 채 창백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다. 그는 자기 상태를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 발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듯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부하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카하라 ...부축을

됐으니까 다른 놈들부터 챙겨라.”

부하가 손을 내밀었음에도 그는 일부러 냉정하게 손을 밀어내며 차로 돌아갔다.심한 부상을 입은 그보다,그의 부하들이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며 그의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겉옷을 벗었다.하지만 나카하라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로 부하들에게난리 떨지 말고 어서 거점으로 돌아가라.보고해야 하니까.’라고 말할 뿐이었다.나카하라는 부하가 막무가내로 쥐여준 천으로 상처를 막은 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나카하라의 안색은 점점 차가워졌지만,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그의 부하들뿐이었다.나카하라는 허리 한 번 굽히지 않은 채로 거점으로 돌아왔다.나카하라는 차에서 내릴 때조차 아무런 부상이 없는 사람과도 같았다.하지만 이미 코트를 흥건히 적신 피는 그가 발을 딛고 선 순간부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부하들은 전전긍긍한 모습으로 그를 따라 걸었다.뒤에서는간부님께서 노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간간이 들렸지만,나카하라는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긴 대리석 바닥을 지나 붉은 융단으로 들어서자 그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그의 위태한 모습에 부하들은 언제라도 손을 뻗을 준비를 했지만,나카하라는 그 누구도 먼저 그의 몸에 손을 대개 하지 않았다.

츄야.”

다자이가 있는 층에 도착했을 때쯤,나카하라의 얼굴에는 핏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그리고 승강기에서 한걸음 내딛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다자이는 그의 집무실 안에 있지 않고 나와 있었다.나카하라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어서일까.나카하라는 츄야, 왔나?’라고 인사같지도 않은 인사를 건네는 다자이에게 아는 척을 하며 천천히 한 발자국씩 그에게 가까워졌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었을까. 나카하라는 자신에게 달려오듯 오는 다자이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한쪽 무릎을 꿇을 준비를 했다.하지만 이미 무리할 대로 무리한 몸은 그의 마음처럼 잘 움직이지 않았고,나카하라는 그대로 달려온 다자이의 품에 안기듯 쓰러져버렸다.

거기 뒤의 자네.의무실에서 주치의를 불러오게.수혈할 혈액 팩도 준비해오라고 하게나.그리고 그 뒤의 자네는 깨끗한 물수건을 가져와.”

나카하라가 다자이의 품에 쓰러지자 놀란 부하들은 다자이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다자이는 품에 안긴 그를 쓰다듬으며이정도가 될 때까지 이렇게 찾아오고…………라고 중얼거렸다. 안타까움이 묻어나기보단 마치 큰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나카하라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던 다자이는 자신의 부하가 깨끗한 셔츠에 물드는 피에 대해 말해주는 것에도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과 같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못 들었다는 듯이 피가 더욱 물들도록 나카하라를 끌어안은 다자이는, 주치의가 올 때까지 나카하라를 최대한 지혈하며 죽어가는 듯이 파리해지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치의가 급한 모습으로 달려오자 다자이는 그대로 츄야를 안아 들고 집무실 안으로 향했다.나카하라의 부상은 꽤 심각했다.어떻게 이런 부상으로 여기까지 똑바로 걸어 들어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주치의에게 다자이는 한마디를 해줄 뿐이었다.

츄야는 내 개니까.”

다자이의 한마디에 주치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나카하라를 치료하기 시작했다.이미 마피아 안에서는 많이 들었던 말이어서인지, 굳이 다자이의 말에 하나하나 반응하지 않던 주치의는, 신중하게 나카하라의 옷을 잘라내었다. 심각해 보이는 상처를 소독한 뒤, 접합하고 붕대를 감는 주치의를 가만히 응시하던 다자이는 치료가 끝나갈 무렵 그에게괜찮은 건가?’라고 물었다.주치의는 수혈만 잘 받으면 문제없을 거라고 대답하고는 답지 않게 주변을 맴도는 다자이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걱정되시나 봅니다.”

주치의는 밖의 부하들만큼이나 걱정하는 눈치의 다자이를 알아챘다.하지만 다자이는 곧장 표정을 숨기고이정도야 마피아라면 당연한 상처 아닌가.’라고 중얼거리며 뒤로 돌아서 소란스러운 집무실 문을 열었다. 분명 츄야네 부하들이겠지, 그쪽 부하들은 다 츄야랑 똑같아. 속으로 빈정거리듯이 중얼거리던 다자이는, 자신이 문을 열자 금세 조용해지는 나카하라의 부하들을 한번 스쳐 지나가듯 훑어보았다. 그리고 대충 고비는 넘겼으니 인제 그만 떠들고 각자 할 일을 하라고 말하며 흩어지라는 듯 가볍게 손짓을 하고 집무실 문을 닫아버렸다. 나카하라의 걱정에 그가 들어간 다자이의 집무실 앞에서 인산인해를 이루던 부하들은 다자이의 손짓에 순식간에 흩어졌다. 지금 다자이의 얼굴이 영문 모를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을까. 부하들은 소곤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다른 볼일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잔뜩 불만인 듯이 보이는 다자이의 표정에 어디 불편하십니까?’라고 물은 주치의는 고개를 저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다자이는 주치의가 나카하라를 치료하는 한참 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다 주치의의 치료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붕대를 감는 그에게 불안에 찬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그래서 언제쯤 깨어날 것 같나?”

그건………… 나카하라님의 의지에 달린 것 같습니다.”

곧 깨어나겠군.”

다자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수혈을 마치고 치료가 끝났다며 마무리를 하는 주치의에게 치료를 마쳤다면 나가보라고 말하고는 나카하라가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나카하라의 표정이 한결 가볍게 보이자, 다자이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다치지 말라는 주인 말도 안 듣고 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애완견을 쓰다듬어준다는 생각이었을 다자이는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그대로 귀 뒤로 넘겨주고는 그대로 나카하라의 이마에 입술을 맞대었다. 아까보다 혈색이 돌아온 그의 피부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다자이는 한결 안심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팔을 베고 누워 잠에 빠진 나카하라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분명 나카하라의 상처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혼절했을 수도 있을 고통이었다. 다자이는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품에서 쓰러질 때까지 부하들 앞에서 강한 척을 했다는 것에 작게 웃으며 온기가 돌아온 뺨을 살살 매만져 주었다.

어디 가서 그러지 마, 츄야. 츄야는 내 개잖아, 그렇지?”

대답조차 들려오지 않는 물음을 던진 다자이는 그것이 마냥 좋은지 조금 자세를 바꾸어 그를 품에 살짝 안았다. 그리고는 방금 이마에 했던 입맞춤보다는 더욱 과감하게 나카하라의 입술에 입 맞추고는 살짝 이를 세워 그의 입술을 물었다. 마치 젤리를 베어 문 듯이 문 입술을 살짝 핥아보다 입술을 뗀 다자이는, 부스스 눈을 뜨는 나카하라에게 , 츄야가 무슨 공주님이야?’라고 물으며 웃었다.

“..., 아픈 사람을 왜 그렇게 괴롭히냐.”

그게 내 일 아닌가. 츄야 놀아주는 거.”

다자이는 능청맞게 말하며 나카하라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나카하라는 버둥거릴 힘조차 없는지 한숨을 내쉬며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있었다. 다자이는 흘러내리는 그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어 내리다, 갑자기 강아지를 칭찬하듯이 그에게 착하다.’라고 중얼거렸다. 물론 그런 그의 칭찬에 기쁘기는커녕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던 나카하라는 그런 자신의 반응에도 즐겁다는 듯이 반응하는 다자이의 행동에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닥쳐. 너한테 칭찬받아봤자 별로 기분 안 좋아.”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 츄야가 내 품에서 쓰러져서 주인인 나는 무척 기쁜데.”

누가 주인이냐. 그리고 그런 건 너 같이 변태 놈이나 기뻐하지.”

혀를 차며 중얼거린 나카하라는 연신 그가 쓰러졌던 때를 떠드는 다자이의 말을 들으며 잠자코 안겨있었다. 다자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그래서, 죽을 만큼 다치니까 기분이 어땠어? 좋았지?’라고 물었다. 연신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다자이에게 넌덜머리가 난 나카하라는 혀를 차며 그에게 연신 닥치라는 말만 계속했다. 자살 매니아 아니랄까 , 저 미친놈이. 속으로 육두문자를 중얼거리던 나카하라는 자신의 머리칼을 가지고 장난치는 다자이에게 그만 만지작거리라고 말했다.

그래도 어디 안 가서 다행이네. 츄야가 죽었으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어디 안 가니까.”

딱 잘라 말한 나카하라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자이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불만이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그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나카하라는 괜스레 붉어진 뺨을 더듬거리며 거슬리니 붙지 말라고 다자이에게 쏘아붙이듯 말하며 허리에 올려진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다. 다자이는 그의 행동에 웃음이 나는지 작게 웃다가 금세 표정을 굳혔다. , 이 기분. 별로인데. 다자이는 자신이 그의 목숨을 살렸음에도(순전히 다자이 자신의 생각이었지만.)마치 자신이 나카하라의 한마디에 구원 받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다자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카하라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나카하라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자이의 손에 깍지를 껴오며 그의 손을 끌어안듯 당겨 자신의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자신과 마주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의 표정을 본다면 그가 무슨 반응을 할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안 간다는 그 말, 꼭 지키게나.”

겨우 생각해 내뱉은 한마디는 뭔가 구차하게 느껴졌다. 작게 속삭이듯 나카하라에게 읊조린 다자이는 그의 쵸커가 매여 있는 목덜미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나카하라는 아무렇지 않게 알았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목덜미에 닿는 숨결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밤이 깊어갈 때까지 그저 서로의 체온이 느껴짐에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마치 오늘의 일은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듯 평범한 밤이었다. 술을 한 잔 마시거나, 푹 자고 나면 지나있을 언제나 돌아오는 그런 밤. 하지만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선 위를 나란히 걸으며 떨어질까 봐 겁이라도 먹은 아이와도 같이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온기를 느끼고, 숨소리를 조심스럽게 들으며 새벽을 보내고, 잠든 척을 한 나카하라를 모른 척을 하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나카하라는 연신 자신이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그의 행동에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깍지를 끼고 잠꼬대를 하듯 옅게 숨소리를 흘렸다. 서로가 사라질 것만 같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손을 맞잡고 있던 두 사람은 풀어지기라도 할까, 서로를 놓지 않은 채 이 밤을 보냈다. 언제라도 혼자가 될 수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절대 혼자가 될 리 없다는 확신에 찬 마음을 의심과 함께 곱씹으며.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사시사철을 보내며

문스독/다자츄 2019. 7. 6. 22:10

영별님 생일 축전입니당 늦었지만 정말 생일 축하드려요 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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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인가….”

비가 올 듯 말 듯 하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활짝 핀 여름 수국을 보던 나카하라는 가지고 있던 우산을 폈다. 조부가 돌아가시고 큰 정원을 자주 둘러보지 못해 걱정하던 차에, 시간이 나는 날이 하필 비가 오는 오늘이라니. 혀를 차며 거의 다 둘러본 정원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던 나카하라는 뭔가 검은 인영이 담장을 넘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경면주사를 갈아 결계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담장을 넘어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수준 높은 퇴마사조차 불가능했다. 나카하라는 일부러 담장 쪽에서 시선을 거둬 못 본 척을 하며 다시금 수국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한 손 가득 들어차는 수국은 여름을 한껏 머금고 있었다. 이곳을 담을 넘어 들어온 거라면 아무리 인간이어도 보통을 아닐 텐데. 꽃을 보는 척하며 머리를 굴리던 나카하라는 손에 올려둔 푸른 수국을 다시금 내려두고 다른 하얀 수국을 들어보았다. 비가 오기 시작하여 질척거리는 정원길을 걷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나카하라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시종에게 어떤 수국을 따오라고 말할지 골라보며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여기는 사람도 요괴도 함부로 올 곳이 아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등 뒤까지 가까워지자 품에서 부채를 꺼낸 나카하라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요괴의 기운마저 느껴지지 않음에 긴장하던 그는, 막상 뒤를 돌아보니 자신과 키가 비슷한 정도 사내아이가 있어 잠시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애가 결계를 넘은 건가…? 나카하라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이름.’이라고 짧게 물었다. 아이가 당황한 채로 나카하라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자, 나카하라는 부채로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귀와 아홉 개의 꼬리가 나타나고 가볍게 때렸음에도 기를 맞아서인지 그 구미호는 아프다는 듯 머리를 연신 문질렀다. 그 귀와 꼬리가 나타나자마자 나카하라는 조금 뒷걸음질을 치며 공격적이게 부채를 내밀고 구미호에게 뒤로 물러나라 일렀다.

“구미호가 퇴마사 집에 들락거리다니. 죽고 싶어서 그러냐? 이제 막 구미호가 된 모양인데 어서 돌아가.”

“나카하라 할배를 찾아왔어.”

나카하라는 그의 한마디에 얼굴이 굳어졌다. 누군가 마을에서 나카하라를 저렇게 호칭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조부일 터였다. 나카하라는 ‘전 주인님은 이미 이곳 분이 아니셔. 그러니 돌아가라.’라고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 구미호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전부 맞으며 나카하라를 쫓아갔다. 나카하라는 정원을 빙빙 돌아가며 그 구미호를 떨어트리기 위해 애썼다. 아직 어린 것 같은데 퇴마해 버릴 수도 없고. 귀찮음에 한숨을 내쉬며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겼지만, 구미호는 나카하라와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종종걸음을 걸으며 그에게 더 가까워졌다. 집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 나카하라는 아직도 자신을 쫓아오는 인영을 향해 몸을 돌려 소리쳤다.

“퇴마사 집에서 계속 얼쩡거리면 아무리 수준 높은 요마라도 힘들다는 거 모르냐? 정신 차리고 살려줄 때 돌아가라.”

“난 괜찮아. 할배가 경면주사 뚫을 수 있는 부적을 줬어.”

그리고 그 구미호가 보여준 부적은 분명 나카하라 가문에서 나오는 비단으로 엮여져 있었다. 나카하라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금 그 구미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쪽은 붕대로 감싸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한 쪽은 다갈색 눈 안에 푸른 여우불을 담고 있었다. 어디선가 느낀 적 있는 기척에 잠시간 그를 응시하던 나카하라는 다시금 그에게 이름이 뭔지 물었다.

“다자이 오사무. 그쪽은 꼬맹이 나카하라?”

“나카하라 츄야 거든? 할아버지가 그렇게 부르셨어도 너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

혀를 차며 대꾸한 나카하라는 그에게 온 이유가 무언지 물었다. 다자이는 잠시 머뭇거리듯이 가져온 짐을 만지다가 그에게 일단 집에 들여보내 주면 안되는지 물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힘들어. 나카하라는 요괴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다고 중얼거리고는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을 던져 주고 자신은 하오리를 벗어 머리에 걸친 뒤 집 쪽으로 손짓했다.

“쓰고 따라와.”

그럼 그렇지, 저 부적 때문에 기척 없이 경면주사를 넘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괜히 긴장했다 생각한 나카하라는 마루 쪽 창을 열어 둔 뒤, 그에게 잠시 처마 밑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웃기게도 그 구미호는 말을 잘 들었다. 우산을 쓰고 몸을 떨며 기다리던 다자이는 수건으로 길을 만들어 두고 몸에 큰 수건을 씌워주는 나카하라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나카하라는 일단 다자이에게 따뜻하게 씻고 나오라고 말했다. ‘요괴도 감기 같은 건 걸릴지도 모르니까.’라고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자신의 새 옷을 꺼내두고는 비에 쫄딱 젖은 짐을 손가락으로 집어 수건으로 싸매두었다. 다자이는 뜨거운 물만 뿌리고 나온 것인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을 수건으로 털고 옷을 갈아입은 다자이는, 욕실 앞에서 기다리며 얼마 젖지 않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나카하라에게 다 씻었다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누가 볼 새라 그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나카하라는 혹여나 지나가는 수련생이 보고 그가 구미호인 것을 알아채기라도 하는 날에는, 후계자인 자신의 권위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떼는 다자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결국, 제일 안쪽에 있는 방에 도착한 그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자이에게 ‘왜 온 거야 여기는.’이라고 물었다. 다자이는 왜 이토록 그가 불안하게 행동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나카하라 할배의 뒤를 이은 이곳의 주인이라고 하니 고분고분 행동하며 자신의 짐을 풀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복숭아잖아?”

“응 복숭아. 할배가 내가 가져오는 복숭아를 제일 좋아했어. 이맘때면 항상 가져다 줘서 왔는데… 결국 내가 구미호가 되는 건 못 봤네.”

흰색과 분홍색이 절묘하게 섞인 복숭아를 소매로 닦고 한 입 베어 문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도 먹어보라며 한 알을 굴려주었다. 나카하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다가 복숭아를 입에 물었다. 달달한 과즙이 터지며 입을 한가득 메웠다. 나카하라는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는 처음이었는지, 의심하던 마음은 이미 뒤로한 채 복숭아를 먹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그걸 보며 ‘피는 못 속이네.’라고 중얼거리고는 작게 웃었다. 다자이는 남은 복숭아는 제단에 올려두고 싶다고 말했다. 가만히 복숭아를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그와 함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카하라 가의 제단으로 가서 복숭아를 올려두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와 나란히 앉은 채 비가 오는 밖을 내다보며 자신과 나카하라 할아버지의 추억을 속닥거렸다. 꼬리가 일곱 개였을 때부터 만나 꼬리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나카하라의 할아버지는 스무 살씩 늙어있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원래 그래.”

“그래서 내기했어. 내가 구미호 되어있을 때까지 살아있으면 할배 사역령 하기로.”

“넌 구미호 언제 됐는데.”

나카하라의 질문에 잠시간 고민에 빠진 다자이는 ‘한 달 전인가? 여기 오는 데는 산을 넘어 오느라 좀 걸렸어.’하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할아버지의 제단을 돌아보며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이 주 밖에 안 됐으니까 내기는 이기셨네.’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럼 뭐하냐는 듯이 대꾸했다. 어차피 나카하라의 전 가주는 죽었다. 다자이의 친우이자 부모와도 같은 이였다. 다자이는 ‘이젠 돌이킬 수 없지.’라고 중얼거리고는 추적거리며 마당을 메우는 장맛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고맙다. 잊지 않고 찾아와서.”

“은근 꼬장꼬장해도 오래 살 것 같던 노인장이었는데. 이제 수다 떨 인간이 줄어서 슬플 뿐이지.”

나카하라는 이제 가봐야겠다며 옷을 털고 일어나는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나카하라는 또래의 친구같이 느껴지는 그가 간다고 말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벌써 가게?’라고 물었다. 다자이는 산을 오래 비우면 혼이 난다고 말하며 나카하라가 준 아무렇지 않게 펴고 천천히 빗속을 걸어나갔다. 나카하라는 잘 가라는 듯이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다가 갑자기 돌아보는 그의 행동에 흠칫하고 놀랐다.

“그런데, 할배말이야. 요괴한테 당한 거 맞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뭐 요괴한테 당했지.”

“응, 구미호한테 당했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물었던 거냐. 나카하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 순간 번뜩 든 생각에 품에서 부채를 꺼내려던 나카하라를 보며 웃은 다자이는 ‘걱정 마, 난 안 그러니까. 그리고 그건 다음에 선물로 줄게.’라고 의미 모를 말을 하며 다시금 담장 쪽을 향해 걸어나갔다. 나카하라는 그가 나카하라 가로 온 다른 이유라도 있는지 고민하며 그가 나갈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다자이는 별다른 수상한 일을 하지 않은 채 담장으로 뛰어올랐다.

“아, 맞다. 작은 나카하라는 이름이 츄야였던가? 츄야는 수국을 좋아해?”

나카하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어? 어.’라고 멍청한 대답을 했다. 나카하라는 자신의 맹한 대답을 후회했지만,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빠르게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 비가 와 길이 진창일 텐데도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다자이가 사라진 담장을 한참 응시하던 나카하라는 기도나 하다 자자고 생각하며 마루의 창을 닫고 수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잠을 자기 위해 시작한 기도였음에도,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쉽게 기도를 들 수 업었다. 부채를 내려두고 깜깜한 새벽의 너머가 된 창을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밤을 비추는 듯한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는 모습을 보고는 도로 조부의 제단으로 향했다. 금빛 털을 가진 구미호를 잡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결국 그 요괴를 상대하다 숨을 거둔 조부가 구미호와 친구였다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생각한 나카하라는 제단 위에 예쁘게 올려진 복숭아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친구는 요괴 안 같네요. 할아버지가 퇴마사 안 같았듯이요.”

후계자가 아닌 그저 손자로서 말한 나카하라는 향을 피운 채 잠시 손을 모으고 있다 재단이 있는 방을 나왔다. 잠자리에 들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누운 나카하라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카하라는 그 뒤로 다자이라는 구미호가 다녀갔다는 것이 꿈같을 정도로 평범하게 시간을 보냈다. 수련생들에게 기를 모으는 방법을 알려주고 할아버지가 지키던 사당의 부적을 채우는 일, 그리고 마을의 결계를 강하게 하는 일을 하며 자리를 지켰다. 가끔 강한 요괴가 나온 다거나, 요기를 정화하기 위해 기도를 위해 정기가 많은 산으로 가 기도를 드리는 일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만한 일도 없는 직업이 퇴마사였다. 나카하라는 경면주사를 갈아 기름에 개어내고는 그것을 대들보 밑과 대문에 발라내고는 집안사람들에게 마를 때까지 출입을 자제하라 이르고는 전부 방으로 보냈다. 나카하라가의 일과처럼 이루어지는 결계 의식에 가문 내 수련생과 식솔들은 전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조용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평화롭던 나카하라 가가 시끄러워진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새벽 청소를 위해 빗자루를 들고 대문을 나선 문지기가 무명천에 둘러싸인 커다란 물체에 큰 소리를 내며 집안으로 뛰어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카하라는 비명 같은 목소리로 ‘도련…아니지, 나리! 나리!’하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하오리를 걸치고 대문으로 향했다. 무명천은 나카하라 가문의 담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길고, 거대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나카하라는 부채를 빼 들고 핏물이 묻어나는 무명천을 들췄다. 그곳에는 금빛털을 가진 구미호가 목을 물어뜯긴 채로 죽어있었다. 나카하라는 구미호 사체를 보자마자 기절한 식솔을 부축해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수련생 몇 사람을 깨워 깨끗한 숯과 종이, 그리고 경면 주사에 담가둔 천을 가져와 결계를 치고 그 구미호 사체에 부적을 둘러둔 채 숯에 불을 붙였다. 나카하라는 수련생이 기절하는 것을 바라보며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련생들에게 모두를 깨우라 일렀다. 나카하라는 시체에 붙은 여우불이 나카하라 가문의 불꽃에 타 들어가는 것을 보며 주변에 이 짓거리를 한 주범이 있지는 않을까 둘러보았다. 분명 이건 다자이의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예전에 떠난 지 오래인지 작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아, 일단은 마을 사람이 일어나기 전에 이 요괴의 사체를 없애는 데에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부적을 모아 만든 빗자루로 재를 쓸어모은 나카하라는, 기를 전부 소진해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이 휘청거렸다. 끝까지 향나무 함에 시체의 찌꺼기까지 담은 그는, 만일 누가 자신을 찾아도 절대 방으로 들어오지 말라 이르며 함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괴황지 뭉치를 꺼내 경면주사로 부적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담지 못한다 생각한 그는, 상자에 차례차례 부적을 붙이며 그 요괴의 기운을 봉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부 해결한 뒤 봉인해두다시피 한 법당에 그 상자를 놔두기까지, 꼬박 한나절을 전부 썼다. 나카하라는 법당을 나오자마자 다리가 풀려 고꾸라졌다.

“어이쿠. 조심해야지, 츄야.”

다른 수련생이라는 생각에 ‘고맙다.’라고 중얼거린 나카하라는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축하는 낯선 인영을 올려다보았다. 저 다갈색 눈동자에 푸른 여우불. 그 눈은 분명 다자이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과 같은 키에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한 어린 구미호.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어엿한 성인 남성의 모습이었다. 나카하라는 이게 무슨 일인지 물으려다 말한 기운도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적거리며 마루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다자이는 순수하게 부축해주려는 생각이었는지, 별다른 행동 없이 그가 가는 대로 그를 부축해주었다. 나카하라는 왜 모습이 변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요괴 사체를 보냈는지 물으려다, 기운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나카하라에게 복숭아를 내밀었다.

“먹어 봐. 괜찮아질 거야.”

‘자네 할아버지도 자주 먹던 이유니까.’ 나카하라는 속는 셈 치고 그가 건넨 복숭아를 입에 물었다. 안에 가득 차는 과즙처럼, 빠져나가 흩어졌던 기운이 다시금 몸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복숭아를 다 먹을 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며 손에 쥐고 있던 꽃의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 내었다. 나카하라는 결국 그가 건넨 복숭아를 씨만 남긴 채 전부 먹어치웠다. 숨도 쉬지 않고 먹은 탓일까. 입안의 내용물을 씹으며 천천히 숨을 고르던 나카하라는 마지막 조각이 목 뒤로 넘어가자 곧바로 하고 싶었던 질문을 그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꼬라지가 그게 뭐야?”

“그저 좋은 여우구슬을 먹어 빠르게 자란 것뿐이라네. 아차, 저번에 빌려준 옷은 이제 맞지 않아 돌려주러 가져왔어.”

다자이는 저번에 가져온 것과 똑같은 흰 보자기 안에서 나카하라의 옷을 건네며 말했다. 나카하라는 짜증 난다는 듯이 ‘요괴면 그냥 작게 지내도 상관없잖아! 기분 나쁘게 혼자 커지는 거야!’라고 소리치며 몸에 돌아온 기운으로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다자이는 그의 발길질을 가볍게 피하며 ‘어이쿠, 할아버지랑 키만 같은 줄 알았더니 성질머리도 똑같군그래.’라고 말하고는 키득거렸다.

“그리고, 그 여우는 뭐야. 그런 거 집 앞에 두면 사람들이 놀란다고,”

“전 주인을 죽인 역적이나 다름이 없으니 집 안에 둬주고 싶었는데, 대문에 경면주사를 강하게 발라둬서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네. 그리고 사체 하나 처리 못 하면 어디 후계자 이름 부르겠나.”

역시나. 나카하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할아버지가 퇴치하려던 놈이었구만.’이라고 중얼거렸다. 대충 예상했던 터라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무리한 나카하라는 ‘고맙다.’라고 그에게 말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인사에 그저 여우 구슬이 탐나 그런 것이었다고 말하고는 붕대로 가려진 눈가를 누르며 여기를 맞았는데 아파서 죽겠다고 엄살을 피웠다. 물론 나카하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비웃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너는 뭘 원해. 요괴가 이렇게 가문에 도움을 주었는데 우리 인간 쪽도 뭘 해줘야지.”

나카하라의 말에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변한 다자이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번에 본 모습이 볼도 통통하니 귀여웠는데. 속으로 혀를 차며 중얼거리던 나카하라는 ‘정기 좀 나눠줘.’라고 말하는 다자이에게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고 되물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못 들어서 되물었다 생각한 모양인지 목소리를 키워 다시 그에게 말했다.

“정기를 나눠줘. 포옹이던, 입맞춤이던, 네 할아버지처럼 구슬화로 해서 줘도 돼.”

“난 아직 구슬화 못해. 해도 쌀알만큼 밖에 안 된다고.”

“그럼 입맞춤이 좋겠네.”

‘너희 퇴마사들은 기를 빼고 넣고 할 수 있잖아. 정기 많은 데서 기도하면 정기도 모인다며? 나도 그거 줘.’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다자이에게 나카하라는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영문 모를 부탁을 빠져나가기 위해 복숭아 먹고 기를 모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다자이는 고개를 저으며 ‘살아있는 것에서 가져와야 해,’라고 말할 뿐이었다. 아, 할아버지는 그저 공생 관계였던 것일까. 차라리 뭘 원하는지 묻지나 말 것을 그랬다고 자신 스스로 탓하던 나카하라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입술에 입 맞춰오는 다자이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밀쳐냈다.

“뭐 하는 거야!”

“아, 이거 가지고 안 되는데.”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던 다자이는, 일단 얼마 없는 기운이라도 차리고 있으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퇴마사까지 되어 요괴에게 응원을 받다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은 나카하라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다자이를 올려다보며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 모습에 다자이는 다시금 나카하라의 입술에 입술을 맞춰오고는, 부드럽게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훑고 순식간에 입술을 가르고 혀를 입안으로 내었다. 나카하라는 힘으로는 밀리지도 않고 속수무책으로 입술을 맞대고 부벼오는 그의 행동에 품에서 부채를 꺼내 펼쳐 보이며 그를 밀쳐내고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입가를 닦아내었다. 다자이는 아직도 부족한 건지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핥아내었다.

“츄야 기운이 할배보다 맛있어.”

“닥쳐! 그런 말 여기서 하지 말라고!”

민망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푸른 옷의 요괴에게 소리친 나카하라는 마지 벌레가 지나간 듯이 간질거리는 입술을 소매로 연신 문질러 닦았다. 다자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어린 거라고 너스레를 떨며 웃고는, 나카하라에게 파란 수국을 건네고는 꽃대를 나카하라의 손에 쥐여주었다.

“산 수국은 정원의 수국들보다 오래 살 거야. 꼭 물에 꽂아둬. 알겠지, 츄야? 시들 때쯤 다시 올게.”

“오면 부적으로 죽여버릴 거야.”

다자이는 으르렁거리듯 위협하는 나카하라에게 환히 웃어 보이며 ‘와, 퇴마사 손에 죽는다니. 그건 기분 좋아?’라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열 받은 나카하라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 담장을 넘는 다자이에게 끝까지 왁왁 거리며 화를 내다가, 그가 놓고간 복숭아 몇 개와 자신의 옷가지를 발로 차버렸다. 그러다가 손에 든 수국을 바라보며 분노 때문에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는 짜증 난다는 듯이 그 수국을 물 병에 꽂아두고 조부의 제단이 차려진 방으로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갔다.

“저 자식이랑 왜 친구 하신 거예요!”

제단에 남은 화를 넋두리하듯이 말하며 하소연을 하던 나카하라는 그저 인자하게 웃는 얼굴의 사진으로 남아있는 조부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요괴에게는 꼭 보답하렴.’ 전래동화를 읽어주며 강조하던 자신의 조부 이야기가 떠오른 것인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죠.’라고 웅얼거리던 나카하라는,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자이가 가버린 담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국이 질 때쯤 찾아오기로 한 그의 약조를 다시금 되새기며 흩어진 복숭아와 옷가지를 모아 방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

 

다자이는 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꼭 올 때마다 꽃을 꺾어 왔는데, 봄에는 벚꽃을 한 무더기 주워왔고, 여름에는 수국, 가을에는 단풍이 가득 달린 나뭇가지를 가져왔다. 겨울에는 찾고 찾아보아도 볼거리가 많이 없는 것인지 자신의 친구인 너구리가 말린 곶감이나 친구들과 같이 구운 군밤을 가지고 왔다.

“나 이제 정기 구슬 크게 만들 수 있다? 이번에도 여러 개 만들었으니까 가지고 가.”

“에, 싫은데. 츄야랑 입 맞출래.”

기도실에서 기도를 올리던 나카하라는 기도실 문을 벌컥 열고 마루에 누워 상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다자이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 다자이는 곶감을 우물거리며 ‘아니면 여우 구슬 줄까? 여우 신부 해.’라고 말하며 되도 안 되는 말을 꺼냈다. 나카하라는 전보다 커진 부채를 들어 그의 머리를 내려치고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그에게 소리쳤다. 나카하라는 아무렇지 않게 입 맞춰오는 다자이와는 다르게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터질 듯이 뛰어오는 심장이 아프기까지 해 자신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게 다 저 여우 요괴 때문이야. 속으로 다자이의 탓을 하며 넘겨버린 나카하라는 ‘왜, 신부 하기 부끄러워?’라고 물은 다자이의 말에 부채를 펼쳐 바람을 내 그를 밀어 넘어트렸다. 나카하라의 주술에 넘어져 놀란 다자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네 신부 할 일 없어!’라고 소리치는 나카하라를 올려다보고는 도로 일어나 그의 앞에 앉았다.

“그럼 입 맞춰줘. 나는 츄야가 그렇게 주는 게 좋아.”

“시끄러워 인간 희롱은 여기서 끝내고 그냥 구슬로 가져가.”

나카하라는 얼굴을 부채로 부치며 말하고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듯이 부채를 들었다. 다자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카하라를 바로 앞에서 마주했다. 나카하라는 자신보다 월등히 커진 다자이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듯 서자 주춤하듯 뒤로 물러났다. 나카하라는 저리 비키지 못하냐며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다자이는 비킬 생각이 없는 건지 고개를 숙여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는 ‘츄야, 나 인간은 츄야가 제일 좋아.’라며 운을 띄웠다.

“내 친우가 그러는데. 그건 사랑이래. 맞지?”

“미쳤냐. 요괴가 무슨 사랑이야! 주술 부리지 말고 꺼져!”

다자이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다시금 부채를 휘두르려던 나카하라는 다자이가 그대로 부채를 잡아 그의 쪽으로 잡아당겨 자신을 품에 안기게 하자 놀란 듯이 눈을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자이는 품에 쓰러지듯 안긴 나카하라를 가두듯 팔을 감아 안고는, 그의 정수리 근처까지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나, 츄야 앞에서 그런 주술 못 부리는데.”

나카하라는 귓가에 울리는 다자이의 목소리에 얼굴이 달아오른 숯마냥 새빨갛게 변했다. 다자이는 귀끝까지 붉어진 그를 보며 작게 키득거리고는 나카하라에게 이제 입 맞춰 줄거냐고 물었다. 나카하라는 고개를 들어 ‘일단 이것 좀 풀어봐, 숨 막혀.’라고 말하고는 다자이의 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달아오른 뺨을 식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사랑일 리 없다. 요괴가 어떻게 인간을.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요괴에게 사랑을 느끼겠는가. 하지만 나카하라는 반쯤 모습이 풀려 귀끝을 쫑긋거리는 다자이에게 다가가 입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게 주술이 아닐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다자이의 뺨을 맞잡은 채 입술을 맞댄 나카하라는 부드럽게 자신을 감싸 안는 구미호의 꼬리의 온기에 봄이 오는 듯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주책없이 뛰는 가슴과 수줍어 발갛게 상기 된 뺨이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만드는 듯했다. 다자이는 그대로 그를 안아 들어 나카하라가 자신에게 더욱 입 맞추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핥아오고 입술을 사탕을 먹듯 물고 빨며 물기 어린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한참 타액을 나누던 둘은 입술을 뗀 채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츄야처럼 잘해주는 인간도 드물어.”

“그럼 나는 있는 줄 아냐.”

“후후, 사랑해.”

마치 인간과 같이 고백해오는 다자이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나카하라는 얼굴을 붉힌 채 그의 목에 팔을 감아 안았다. ‘벚꽃이 필 때는 내가 말해 줄게.’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귓가에 속삭이며 말하고는 다자이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겨주었다. 다자이는 연신 나카하라에게 약속한 거라고 확답을 구하고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카하라를 마주 보았다.

“이번에도 벚꽃을 모아올게, 츄야. 츄야가 좋아하니까.”

“오냐, 보자기 가득 가져와라,”

푹신한 흰 꼬리에 둘러쌓인 채 속닥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벌써 봄이 왔다는 듯이 웃어버리며 금방 녹아내릴 소복한 눈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산으로 돌아간 다자이는, 벚꽃이 펴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나카하라의 마을 쪽을 연신 내다보았고, 나카하라는 다자이가 올 날을 생각하며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그의 조부의 제단에 다자이가 가져온 곶감을 올렸다.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에요. 그 구미호 때문에 혼담이고 뭐고 대가 끊어질 거라고요.”

물론 가주 답지 않은 넋두리와 함께 말이다.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우당탕탕 회장님!!.8

문스독/다자츄 2019. 7. 6. 11:00

괌에 온 지 벌써 5일째 되는 날. 다자이는 이 열대성 기후의 휴양지에 질린 나머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너무 더워, 이제 집에 갈까.’를 버릇처럼 내뱉는 그에 반해 나카하라는 곳곳을 돌아보며 아쉬움이 하나 남지 않도록 여행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고랑 오다씨 쪽보다 먼저 들어가 버리면 좀 그렇지 않냐.”

그 부부는 둘이서 오붓하게 여행하라고 하고 우리는 돌아가자. 나 집에서 쉬고 싶어.”

답지 않게 사카구치를 생각해주는 어투로 말한 다자이는, 언제부터 한 것인지 반쯤 정리되어있는 캐리어를 보여주며 나 오늘이면 갈 준비 다 될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카하라는 사뭇 아쉬운 표정으로 푸른 바다 쪽을 돌아보았다. 한 번 더 그 모래사장에서 일몰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나카하라는 사업 제안이라도 하듯 비장한 표정으로 그럼 내일 모레 가자.’라고 말하고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뭐 할 건데.”

해수욕도 좀 하고... 너랑 호텔 방에서 노닥거리고 싶어서 그런다 왜.”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집에서 하면 우리가 치워야 하잖아. 여기는 호텔이니까 남이 해주고.”

일리 있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다자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카하라는 연신 확인이라도 받듯 그럼 모레 가는 거다?’라고 말하며 해수욕을 위한 물품을 가방에 담았다. 다자이는 이럴 때만 보면 누가 연하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려다, 나카하라의 눈총을 받을까 싶어 말을 아꼈다. 마지못해 함께 바다에 나간 두 사람은, 평소라면 시도도 해보지 않을 레저 스포츠를 신청하고 그 전까지 스노클링으로 맑은 바닷속 물고기를 따라 헤엄쳤다. 먼저 체력이 다한 다자이는 나카하라를 뒤로 한 채 선베드로 올라와 지친 몸을 뉘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뭍에서 쉬고 있는 다자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도로 호흡기를 차고 물속으로 고개를 넣었다.

츄야, 안 힘들어? 언제까지 하려고?”

들릴 리가 없었지만, 다자이는 일단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있는 나카하라를 향해 소리쳤다. 물론 예상대로 나카하라는 안에 보이는 물고기에게 시선이 빼앗겨 이리저리 몸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저러다가 근육통이라도 나면 어쩌려는 건지. 다자이는 내일이면 허리나 팔이 쑤신다고 말할 그가 눈에 훤한지 혀를 차며 바다에 다시 들어가 그의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스노클링을 위해 가슴팍까지 오는 얕은 수심을 유지하는 안으로 들어간 다자이는, 나카하라를 일으켜서는 뿌옇게까지 변한 그의 물안경을 벗겼다.

벌써 시간 다 됐어?”

나카하라는 다자이가 자신을 일으킨 이유가 신청해둔 레저 스포츠 때문인 줄 알았는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물었다. 다자이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말하고는 그전에 체력 좀 보충해두고 좀 쉬고 가자. 쓰러지면 어쩌려 그래.’라고 걱정 어린 어투로 그를 선베드 쪽으로 이끌었다. 나카하라는 조금 아쉬운 기색을 머금은 표정으로 바다 쪽을 바라보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자이를 따라 바다를 나왔다. 다자이는 솔직히 말해 그가 이렇게 괌에서 신나게 놀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좋아하는 쇼핑 몇 번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 몇 번 하면 끝날 거로 생각했던 여행이 이렇게 나카하라의 의지로 늘어난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지, 다자이는 챙겨온 물을 나카하라에게 건네며 물었다.

재미있어 츄야?”

나카하라는 대답할 새도 없이 물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와 같이 미소를 지으며 안에 경치 진짜 예뻐.’라고 말한 그는, 다자이에게 한 번 더 봐보라며 그가 쓰던 물안경을 건넸다. 다자이는 이제 체력적으로 무리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츄야가 이런 것도 좋아하는지 새로 알았네.’라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좋지.”

, 또 무슨 사고 쳤냐?”

간식으로 가져온 말린 망고와 바나나 칩을 먹던 나카하라는 자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다자이를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해외라서 일 처리 하기 어려운데 사고 좀 작작 치지. 아직 다자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확신한 나카하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자이는 햇볕에 달아올라 상기된 것 같이 된 뺨을 긁적거리며 난감하다는 듯이 말문을 떼었다.

츄야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새로운 게 나와서 츄야가 더 좋아져.”

다자이의 낯부끄러운 말에 잠시 멍해진 나카하라는 말을 더듬어가며 그러냐.’라고 대꾸했다. , 시도 때도 없이 치고 들어오냐.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는 듯 가져온 부채를 거세게 부치며 망고를 우물거리던 나카하라는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다자이에게 새삼스럽게 왜 그런 말을 하냐.’라고 말을 던지고는 망고를 입안 가득 넣었다.

그냥. 다음에 할 게 다이빙이라고 하니까 지금 말해둬야 할 것 같아서.”

하다가 죽을지도 모르잖아? 불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에게 코웃음을 치며 이런 데서는 쉽게 안 죽어.’라고 대꾸한 나카하라는 소리 내 웃어버리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이미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에 말라버린 몸을 쓸어보던 나카하라는 맑은 물로 손을 씻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다이빙하는 데로 가자.”

벌써? 아직 츄야한테 제대로 된 사랑 고백 끝내지 못했는데.”

그건 다이빙하고 와서 해라.”

엄살을 피우듯이 말하는 다자이에게 쏘아붙인 나카하라는 그의 손을 잡아 이끌며 다이빙이 진행되는 절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같이한다고 했나 고민하던 다자이는, 이제는 늦었다는 것을 알고 체념한 모습으로 그와 함께 새하얀 백사장을 걸어 지나갔다. 다자이는 햇살을 반사해 반짝거리며 별빛같이 빛나는 모래를 한 번씩 헤집듯 밟아보며 앞서 걸어나가는 나카하라에게 올 때, 여기 천천히 걸어보자.’라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앞만 보고 나아가던 고개를 돌려 그에게 다시 오고 싶은지 물었다. 다자이는 모래만큼이나 반짝거리는 주황빛 머리칼을 흩트리며 걷는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웬일이냐. 네가 이런 데를 다시 와보고 싶다고도 말하고.”

이렇게 걸으면서 보니까 예뻐서.”

그런데 츄야가 더 예쁘네. 분명 뒤의 말까지 말했다면 웃으며 걸어나가던 나카하라가 부끄러움에 못 이겨 주먹을 날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게 웃어버리며 그의 걸음걸이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한 줄로 이어졌던 발자국이 마주 이어지기 시작하자, 걷기도 더욱 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자이는 기대감을 잔득 안고 걸어나가는 나카하라를 바라보며, 이런 바다라면 며칠 더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마음을 고쳤다. 물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다이빙을 겪고 난 뒤에는 또 생각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

한껏 내리쬐던 햇볕도 제풀에 지친 듯 한풀 꺾였다.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잠시 쉴 겸 풀 사이드바에서 음료를 시킨 뒤, 핑크빛이 섞인 주홍빛 노을이 모래사장을 뒤덮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분명 대화를 나누던 도중이었지만, 이런 장관은 하루 이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말을 아끼고 바다를 눈에 담았다. 그동안 살아오며 적지 않은 바다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넓게 펼쳐진 바다에서의 장관을 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요코하마의 풍경은, 이런 자연의 한 폭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말 예쁘네.”

조개같이 다문 입술을 먼저 뗀 것은 나카하라였다.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경관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의 의견에 동의를 얹었다. 앞에 시켜둔 칵테일과 얼음이 가득 든 위스키가 무안해질 정도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두 사람은, 해가 노을을 몰고 돌아가며 어둑한 하늘을 끌고 올 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서로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예쁜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올 걸 그랬네.”

더 많이 보지 못해 아쉽다는 듯이 말한 나카하라는 휴양지에 왔으면 꼭 시켜야 하는 칵테일인 피나콜라다를 휘저으며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다자이는 아까까지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인지 말을 아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자이는 얼음이 녹아 물과 분리되어있던 위스키를 저어 한모금 마시고는, ‘츄야 말 듣기를 잘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래, 어른 말씀 잘 들으면 떡이 하나 더 생긴다니까?”

“...어른이면 얼마나 어른이길래 그래.”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나카하라의 말에 키득거리며 대답한 다자이는 이럴 때만 엄청 어른인 척을 한다며 중얼거리고는 술을 홀짝거리는 나카하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혼여행 때도 이랬던가. 고작 몇 년 전의 기억이었지만, 추억을 곱씹는 사람이 아니었던 다자이는 밤바다가 파도치는 것을 내다보는 나카하라에게 우리 신혼여행 때는 이렇게 안 좋았던 것 같은데.’라고 운을 띄웠다.

, 좋았을 리가 없지. 신혼여행에서도 파파라치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네가 결혼 전에 아무것도 말 안 해주고 억지로 다 떠넘겼다고 소리 지르면서 화냈잖아.”

, 그거 신혼여행 때였어? 그때 츄야 엄청 무서웠는데.”

다자이는 위스키 잔 안에 든 얼음을 살살 흔들며 이제는 전부 추억이라며 웃어버렸다. 나카하라는 추억은 개뿔. 그때 파파라치한테 욕한 사진 아직도 돌아다니거든?’이라고 대꾸하면서도 작게 피식거렸다. 나카하라는 대부분 잊은 다자이와 다르게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었던 연애 때가 더 좋았다고 소리치던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뒤돌아서던 다자이의 모습도 생생히 떠올랐다. 조금 충격받아서 그런가. 다른 술도 시켜보자며 메뉴판을 든 다자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나이뿐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역시. 원수도 같이 살면 정들게 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츄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다자이는 무슨 이유로 나카하라가 저 말을 중얼거렸는지 알아채고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다자이는 분명 츄야였다면 원수를 때려잡고 혼자 살았을 거야.’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더 마시고 싶은 건 없는지 물었다. 나카하라는 아직 반쯤 남은 피나콜라다를 보여주며 고개를 저었고, 다자이는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바로 주문하며 주번을 두리번거렸다.

이번 여행은 비밀리에 와서 그런가. 딱히 방해하는 사람이 없네. 다음에도 이렇게 오자.”

아니야. 파파라치라도 어디 있겠지. 여기는 호텔 사용하는 사람들 밖에 못오는 곳이니까 못 들어오는 거고.”

우리 쫓아다니는 파파라치 이제 없지 않나?”

다자이는 위스키 잔에 담긴 얼음을 하나 입에 물어 어눌한 말투로 츄야가 예전에 술 마시고 파파라치 카메라에 음식 던져서 전부 쫓아냈잖아. 그 뒤로 한 명도 안 쫓아다녀.’라고 설명하고는 얼음을 깨 먹기 시작했다. 나카하라는 기억 안 난다며 어깨를 으쓱였지만, 다자이는 사카구치가 그 사건을 무마시키느라 고생했었다고 넋두리를 하며 턱을 괴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그런 것만 기억 잘 한다?”

그때 츄야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가.”

키득거리며 말한 다자이는 레몬이 장식된 칵테일을 받아 홀짝이며 나카하라를 마주 보았다. 누가 보면 몇십 년 같이 산 부부인 줄 알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나카하라는 조심스럽게 깍지를 껴오는 다자이의 행동을 피하지 않았다.

첫 신혼여행은 별로였지만, 앞으로는 행복하게 해줄게.”

당연한 거 아니냐? 못하면 바다에 던져버린다.”

다자이는 살벌한 말을 하면서도 활짝 미소를 짓는 나카하라를 보며 마주 웃고는 나중에 츄야 허리 아파서 못 던질 때쯤 그래야지.’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나카하라는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며 중얼거리고는 운동 게을리하지 않고 나중에 늙어서도 너 정도는 던질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늙을 때까지 같이 산다는 거네. 다자이는 속으로 한 생각에 가슴께가 간질거려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나카하라와 함께라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웃어버리고는 나카하라가 응시하는 완연한 밤바다가 된 괌의 풍경으로 같이 눈길을 돌렸다.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우당탕탕 회장님!!.7

문스독/다자츄 2019. 6. 30. 18:42

쇼핑몰 로비 중앙 카페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자이는 마냥 신나는 표정으로 반쯤 마신 커피를 휘저으며 우연히 해외에서 마주친 사카구치와 오다에게 그래서 두 사람,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었나?’라고 질문했다. 나카하라는 너 때문에 좋은 시간도 전부 날아갔을 것 같다고 말하려 했지만, 불난 집에 기름을 부어넣는 꼴이었음으로 말을 아꼈다. 사카구치는 얼음이 가득 담긴 레몬차를 크게 들이키고 얼음을 소리 내어 깨물어 먹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오다와 나카하라는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카하라 씨, 그 셔츠는 뭡니까?”

아그작 소리를 내며 부서지던 얼음이 녹아 사라지고 사카구치가 조금 진정 되었을 때, 사카구치는 나카하라와 다자이가 입고 있는 분홍색과 파란색의 하와이안 셔츠를 보며 물었다. 다자이는 자신들의 패션을 불쾌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사카구치에게 안고는 입국심사 프리패스 패션도 모르나?’라고 물으며 자신과 같은 셔츠를 입고 있는 나카하라에게 팔짱을 껴왔다.

이렇게 완전히 관광객처럼 입고 있으면 입국 심사는 별로 안 걸린다네.”

입국 심사는 범죄자만 아니면 거의 다 들어옵니다만. 다자이 씨는 뭐 찔리시는 거라도 있으신가보죠.”

아니, 말 많이 시키면 별로잖아.”

다자이는 싸늘하게 맞받아치는 사카구치의 말에 투덜거리듯 대꾸하고는 입술에 빨대를 물었다. 오다는 오랜만에 뵙는 군요 나카하라 씨. 잘 지내셨습니까?’하고 나카하라에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나카하라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는 듯 밝게 인사하며 오다에게 다자이와 시간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행 행선지가 겹치는 것도 인연인데 언제 식사 한 번 하자고 말하며 두 사람에게 언제까지 묵는지 물으며 최대한 즐거운 여행을 보내기 바라는 듯이 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호텔에 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할래?”

아뇨, 저희는 아직 일정이 있어서요. 그리고 다자이 씨 달래주러 오신 거 아니십니까?”

사카구치가 나카하라에게 물음을 던지며 다자이의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다자이는 툴툴거리는 표정으로 풀어주긴, 우린 그냥 즐기러 온 거거든?’이라고 받아쳤다. 하지만 사카구치는 지지 않았다. 오다는 두 사람이 거의 언쟁 수준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화제를 전환해 나카하라에게 다자이와 함께하는 여행의 일정을 물었다.

저희는 일주일 정도 묵을 생각입니다. 나카하라 씨와 다자이 씨께서는 언제 돌아가십니까?”

? 우리? 아직 안 정했는데. , 다자이 언제 갈래.”

어차피 전용기니까 돌아가기 하루 전에만 말하면 되잖아. 그냥 좀 더 있을래.”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겠다는 듯이 말하는 다자이의 행동에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사카구치는, ‘저희는 예매해둔 비행기 표가 있어서요.’라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일 호텔 뒤에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하는 건 어떠냐? 그리고 너희는 밑에 수족관 가보거나 뒤에 바다로 가면 되잖아.’라고 제안했다. 물론 사카구치와 오다가 특별한 일정이 있었다면 힘들었겠지만, 나카하라는 어떻게든 이 두 사람에게 자신과 다자이가 (대부분 다자이의 몫이었지만.) 한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사카구치는 오다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보더니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카하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얼마 안 되는 휴가 쪼개서 온 여행인데, 많이 즐기다가 가라.’라고 말했다.

비행기가 별로면 자리 많으니까 전용기 타고 같이 가도 된다.”

아뇨, 다자이 씨랑 같은 비행기를 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 안 됩니다.”

뭔가 더는 권유할 수 없는 완강한 거절에 나카하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좁아터진 이코노미석이 전용기 좌석보다 좋을 리 없겠지만, 사카구치에겐 다자이가 있고 없고가 선택에 큰 폭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나카하라는 이제 자신들은 호텔로 돌아가 보겠다고 말하고는, 아직 살게 남아있던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자이는 무언가 아쉬워 보이는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뒤, 자신을 끌고 나가다시피 하는 나카하라의 손에 이끌려 쇼핑몰을 나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호텔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아서라, 안고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에게 손사래를 쳐 보이며 안 된다고 하고는, 곧장 호텔로 돌아갔다. 아까까지 맑고 푸른 바다가 펼쳐졌던 발코니에는, 주황빛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이제 저녁인가보다.’라고 중얼거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다자이에게 저녁을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다자이는 아까 먹었던 코코넛 크랩이 아직 소화가 안 된 것 같다며 그에게 손을 내저어보이고는 잔뜩 늘어진 자세로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조금 아쉬운 모양인지 가만히 석양을 바라보며 저녁 먹기 전에 한 번 걸어보고 식당가고 싶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발코니로 나갔다. 많은 가족들이 바다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모양인지 수영복과 래쉬가드 차림으로 풀 사이드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츄야, 옆에 와서 안 눕고 뭐해.”

누워만 있기엔 아까워서.”

다자이는 한참 더운 바람을 맞으며 발코니에 기대있는 나카하라를 뒤에서 끌어안고 그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갔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여기 계속 서 있는 거야. 다자이가 가만히 바다에 잠겨가는 해를 보는 나카하라에게 츄야는 경치가 예뻐서 계속 여기 있던 거야?’라고 물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 안았다. 나카하라는 투정부리듯 묻는 다자이의 행동에 웃어버리고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당겨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남겼다. 다자이는 감질나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다시금 고개를 숙여 나카하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천천히 혀를 내어 부드러운 입술을 쓸어보다 입술로 그의 입술을 베어물어보던 다자이는 유혹이라도 하듯 나카하라의 입술을 간질였다. 나카하라는 그의 재촉임 같은 행동에 웃어버리고는 그대로 그의 목에 팔을 걸어 안아 그의 입 안으로 혀를 넣어 얽어오기 시작했다. 해가 점점 바다 안으로 떨어지며 어둑한 밤하늘을 끌고 왔을 때야 두 사람은 입술을 떼었다. 나카하라는 한참을 타액을 섞어오며 입술을 비벼대었던 탓에 번들거리는 입술로 더운 숨을 내뱉고는 다자이를 향해 팔을 벌려 보이며 안아줘.’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별다른 대답없이 그를 그대로 안아 들었고, 나카하라는 그대로 낭창한 다리를 허리에 감아왔다.

오늘 따라 적극적이네.”

후우... 해외에서 하는 거라 그런가. 더 흥분되네.”

다자이는 달달하게 쏟아져 내리는 나카하라의 페로몬 향기를 들이쉬며 그를 더욱 품에 끌어안았다. 나카하라는 은은하게 자신을 감싸는 다자이의 향기에 드러난 목덜미에 입맞춰주고는 오늘도 숨막히게 할 거냐?’라고 물었다.

안 그래도 지금 엄청 노력중인데. 츄야가 유혹해서 무리일 것 같아.”

, 그럼 안되는데. 나 진짜 죽는다고.”

심각한 말과 다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나카하라는 셔츠 단추를 풀어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셔츠가 그대로 침대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를 침대에 눕혀 천천히 그를 내리누르기 시작했고, 나카하라는 그것마저도 즐긴다는 듯이 다자이의 목을 끌어안은 채 미소 지어 보였다. 온전하게 밤이 하늘 위로 내려앉자 각자 흘러나오던 페로몬은 언제부터 두 개였는지 모를 만큼 서로에게 섞여들기 시작했다.

 

***

 

밤을 지나 새벽, 아침이 다 되어서야 뒤엉켰던 두 사람이 결국 지친 듯 침대 위로 늘어졌다. 나카하라는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붙어오는 다자이를 간신히 밀어내었다. 이럴 때만 힘내서 들러붙고 난리야. 말을 내뱉을 힘도 없는 나카하라는 잠깐그만…….’이라고만 중얼거리며 자신을 당겨 안아오는 다자이를 최대한 밀어내며 몸을 침대시트로 감쌌다.

왜 츄야. 아직 향기 좋은데.”

하아...네가 틈도 안 주고 하니까 그냥 마구잡이로 흘러나오잖아... 나 조금만 쉬자.”

물론 나카하라가 말하는 조금만의 의미는 오늘은 끝이라는 뜻이었지만, 다자이는 끝이란 단어를 모른다는 듯이 그의 목덜미에 입 맞추며 그를 끌어안았다. 나카하라는 한숨을 내쉬며 도 예전 같지 않거든?’이라고 중얼거리고는 어제의 잔해가 널브러진 침대와 침대 아래를 바라보았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에게 너 콘돔 몇 개 썼냐?’라고 묻고는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는 그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다섯 개 이후로는 기억 안 나는데.”

“... 미쳤냐?”
다섯 번이라니. 어제 한 것만 세어도 손가락이 모자라는데. 나카하라는 그러다가 계획에도 없는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그를 다그쳤다. 다자이는 갑자기 혼나는 분위기가 된 상황에서 크게 뜬 눈을 끔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카하라는 그런 그에게 네가 회사 나갈래?’라고 물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신경질 적으로 쓸어 넘겼다.

미안해 츄야. 근데 빨리하자고 콘돔 집어 던진 건 츄야인거 알아?”

……내가 언제.”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말에 시치미를 떼며 다시 자리에 누워버렸다. 기분 좋아해서 해버린 관계임에도 이렇게 걱정거리가 하나 늘어버렸다. 마음의 틈이 생겨서일까. 평소 같았으면 딱 횟수를 정해두고 피임은 정확히 해가며 했을 관계였지만, 여행의 분위기에 휩쓸려 임신 걱정 없던 연애 시절마냥 몸을 섞었다는 생각에 기쁨보단 걱정이 앞섰다. 아직, 아직은 안 되는데. 나카하라는 다자이에게서 등을 돌려 누워서는 손톱을 입에 물었다. 다자이는 그런 그를 다시금 품에 끌어안고는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주었다.

츄야, 어제 노팅도 안 했으니까 임신 확률 거의 없는걸,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저번에 노팅 안 해도 임신한 사례도 있었단 말이야.”

다자이는 불안해하며 손톱을 무는 나카하라의 행동을 저지하며 그의 손에 깍지를 껴온다. 나카하라의 불안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인지 아무런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온 다자이는 나는 츄야가 싫으면 싫어.’라고 중얼거리며 그의 손등에 입 맞췄다. 나카하라는 대답 없이 그가 자신을 만지는 대로 가만히 누워 있다가, 문득 미안.’이라고 사과하며 몸을 돌아누웠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아이를 가지기 싫은 게 아니라…….”

츄야, 괜찮아. 난 츄야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돼,”

뭔가를 구구절절 설명하려하는 나카하라에게 고개를 저어보이던 다자이는, 미소를 띤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나카하라는 그의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대로 품에 안겨 들었다. 다자이가 답지 않게 어른스럽게 느껴진 나카하라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철부지였는데, 언제 이렇게 됐지. 자신이 더 철부지가 되어가는 기분에 한숨을 내쉬던 나카하라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다자이의 손길을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츄야, 츄야가 원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 우리는 가족이니까. 두 사람이 삐끗거리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거잖아?”

잠에 빠진 나카하라가 다자이의 다음 말을 들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다자이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천천히 머리부터 등을 쓸어내리길 반복하며 아침을 보냈다.

 

***

 

어째 더 피곤해보이십니다?”
, 좀 덜 쉬어서 그렇다.”

그렇다기에 는 목도 좀 쉬셨는데요.”

나카하라는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는 사카구치의 말에 됐어 너무 캐묻지 마라.’라고 대답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은 마치 바다 속에 와있는 듯이 장관이 펼쳐졌다. 나카하라는 둥글게 자리가 잡힌 안 쪽 자리에 안내를 해주는 웨이터에게 인사치레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마주앉은 사람들의 앞에 메뉴를 하나씩 들려주었다.

맛있는 걸로 먹어라. 내가 다 살 테니까.”

회장님이랑 이렇게 만나서 좋은 일도 있군요.”

사카구치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메뉴를 열자 나카하라는 나 따라다니면 콩고물이 떨어지는 거 몰랐냐?’라고 받아쳤다. 오다와 다자이는 신나는 표정이 되어 옆에 앉아있던 나카하라와 사카구치에게 연신 어떤 메뉴를 같이 먹는 게 좋을지 상의하기 시작했다.

츄야, 나 역시 랍스터는 다 먹고 싶은데.”

먹고 또 시켜. 또 한 접시 시켜두고 배부르다 울지 말고.”

다자이의 조름을 한마디로 떨쳐낸 나카하라는 곧바로 먹고 싶은 것을 몇 가지 추려내었다. 그리고 각자 주문을 마친 뒤 먼저 나온 술을 홀짝거리던 네 사람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카하라였다.

그래서, 너희는 어쩌다 괌으로 왔냐?”

나카하라의 질문에 마티니 안에 올리브를 먹던 사카구치가 오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사쿠노스케 씨가 가보고 싶다 해서 급하게 준비를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인이 괌에 갔다가 왔다는 말에 부러웠다고 설명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똑같은 질문을 되물은 오다는 기대가 찬 표정으로 다자이와 나카하라의 쪽을 바라보았다.

난 별거 없는데.”

뭔데 그래.”

그냥 TV에 나왔었어. 여행지 상품으로는 괌이 최고라는 홈쇼핑이.”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답하는 다자이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은 나카하라는 , 누가 가정주부 아니랄까봐 홈쇼핑을 보고 여행가자고 하냐.’라고 말하고는 눈물을 닦는 시늉까지 했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는데.”

그런데 홈쇼핑이었으면 분명 패키지여행이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두 분은 그냥 자유로 다니는 거 아닙니까?”

안고, 내가 패키지여행 같은 거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자이의 물음에 곧바로 수긍한 사카구치는 좋은 선택이었네요. 가이드가 무슨 죄겠어요.’라고 답하고는 바로 마티니를 홀짝거렸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식탁에는 식사가 가득해졌다. 네 사람은 적당히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네 사람이 이렇게 여행지에서 만날 일이 언제 또 있을까. 나카하라는 꽤나 의외의 조합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 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도 이렇게 모일 수 있으면 모이자.”

...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다자이 씨가 너무 떠들지 않는 다면 말이죠.”

안고, 다 들려.”

다자이, 안고에게 미운 털 박히면 안 좋다.”

오다까지 거들자, 다자이는 오다사쿠는 안고 편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라고 대답하고는 나카하라의 팔에 팔짱을 껴왔다. 후덥지근한 습기가 많이 누그러진 괌의 밤바람은 나름 상쾌하게 느껴졌다. 오다와 사카구치를 보낸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호텔 쪽으로 걸어갔다.

다자이, 고맙다.”

뭐가? 오늘 츄야가 쐈잖아.”

그냥 고맙다면 고마운 줄 알아.”

나카하라는 예전보다 크게 느껴지는 자신보다 어린 연인의 손에 깍지를 꼈다. 다자이는 영문도 모른 체 그와 함께 걸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나카하라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츄야, 사랑해.”

오냐. 나도 사랑한다.”

츄야는 무슨 대답하는 게 할아버지 같아.”

그렇게 장난 섞인 투닥거림을 나누며 걷던 두 사람은, 걱정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다자이는 왁왁 거리며 무어라 하는 나카하라의 이마에 아무렇지 않게 입 맞춰 주고는 웃어버렸고, 나카하라는 더위 때문인지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투덜대었다. 그렇게 열대야의 밤이 깊어 가면 깊어갈수록, 섬의 행복하게 반짝거리는 조명은 꺼질 줄을 몰랐다.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우당탕탕 회장님!!.6

문스독/다자츄 2019. 6. 23. 20:02

나카하라는 그 뒤로 삼 일간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집에서 일을 하는 (물론 자신만의 주장이지만.) 다자이가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였다. 휴가가 시작된 후로 삼 일 동안, 나카하라의 주된 일정은 먹는 것, 자는 것뿐이었다. 다자이는 그런 나카하라를 꼬드겨 어딘가로 나가고 싶다는 의견을 펼쳤지만, 다 수포로 돌아갈 뿐이었다.
“츄야, 그렇게 누워만 있다가 침대에 곰팡이가 생겨도 모르네.”
“그런 말을 네가 할 줄은 몰랐다.”
침대에 누워 키득거리던 나카하라는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누워 다자이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다자이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였지만, 혼자 나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나카하라는 ‘어디 볼일이라도 있냐? 장보러 가게?’라고 물으며 감자칩을 입에 물었다.
“오랜만에 데이트라도 갈 생각이었는데... 츄야가 다 망쳤다네.”
나카하라는 투덜거리는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졌는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응시했다. 마치 연애를 하던 때가 떠오르는지 가만히 다자이를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핸드폰을 들어 뭔가를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자신의 투덜거림에 반응하지 않는 나카하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뚱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야, 다자이,”
“츄야랑은 말 안 할 건데.”
“여행 갈래?”
“응?‘
흐름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 다시 나카하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자이는 무슨 말인지 그에게 물었다, 나카하라는 반쯤 누워있던 상체를 세워 앉아 기지개를 켜고는 조금 뜸을 들이며 말했다. ‘뭐 여행 자주 가지도 않고, 오붓하게 시간도 보내면 좋으니까.’라는 말로 포장을 하던 나카하라는 그래서 어떤지 물었다. 물론 다자이의 표정은 이미 긍정적인 답변을 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나카하라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난 좋아. 그래서 어디가 좋은데? 휴양지로 가자.”
다자이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의 다자이였다면 시큰둥한 목소리로 두 번째 허니문이라도 되느냐는 둥 반응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삼 일간 나카하라와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낸 터라 어디로라도 탈출하고 싶을 뿐이었다. 가서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고 마사지도 받아야지. 한껏 들뜬 듯이 나카하라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묻던 다자이는 뭔가 찾아보는 나카하라에게 문뜩 떠오른 행선지를 말했다.
“우리 괌으로 가자. 괌 어때?”
“아, 그럴까? 확실히 지금이면 사람도 없고 좋겠네.”
일본 사람들이 사랑하는 휴양지. 나카하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곧바로 괌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쉬러가는 여행은 그 조차도 들뜨게 만들었다. 신나게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꺼낸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옷은 뭘 챙길 건지 물었다. 나카하라는 일단 대충 짐을 챙기고 못 가져온 건 사자고 말하며 겨우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휴가 받을 거면 꼭 이렇게 받아야해 츄야?”
“세 시간 전이랑 너무 취급이 다른 거 아니냐?”
아까까지는 휴가를 받아서 자기만 한다고 면박을 주던 다자이가 신나하자 피식 웃은 나카하라는 강아지 같이 옷을 꺼내 캐리어에 던져 담는 다자이를 불렀다. 기분이 좋은 다자이는 평소의 다자이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곧바로 나카하라의 앞에서 ‘왜 츄야?’라고 물은 다자이는 품에 안겨오는 나카하라의 행동에 그를 안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말을 잘 들어봐라.”
“츄야가 평소에도 이렇게 귀여우면 생각해볼게.”
다자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나카하라를 내려다보다, 뻗힌 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에 입 맞췄다. 나카하라는 역시 연애 초창기의 분위기와 비슷한 느낌의 다자이를 보며, 자신만 늙어가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역시 그 안티 에이징 크림, 샀어야 했나. 가만히 생각해보던 나카하라는 자신의 뺨이나 이마에 연신 입 맞춰오며 ‘츄야, 오늘 따라 귀엽네?’라고 수작을 거는 다자이의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안 귀여워 보일 때도 있었냐?”
“응, 저번에 같이 놀자고 해놓고 자버렸을 때? 좀 안 귀여웠지.”
“뒤 끝 쩌네. 그 다음에 엄청 놀아줬으니까 됐잖아. 그것 때문에 허리 아파 죽겠다고.”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말을 맞받아치며 말했다. 다자이는 그런 나카하라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 빼고는 전부 귀엽다고 중얼거리며 옷을 하나하나 캐리어 쪽으로 던져 넣었다. 나카하라는 그런 다자이에게 ‘많이 귀여워해라. 아니면 국물도 없어.’라고 말하고는 자신도 짐을 하나하나 넣기 시작했다.

***


“덥고 습하네.”
“이정도면 덜한 편인데. 진짜 더울 때는 나다니면 죽는다.”
현란한 하와이안 셔츠를 빼입고 나타난 두 사람은 공항을 나와 자신들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리무진에 오르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카하라의 요구에 입은 하와이안 셔츠를 펄럭이던 다자이는 ‘어서 숙소 가서 쉬고 싶다.’라고 중얼거리고는 차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늘어진 야자수들과 무성한 수풀들은 이국적인 모양새를 내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창문에 기대있는 다자이에게 일단 짐부터 풀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물었다. 다자이는 잠시 생각이라도 하듯 대답이 없다가, ‘그냥 침대에서 에어컨 바람 쐬면서 누워있고 싶은데.’라고 대답했다.
“야, 그건 집에서 하는 거랑 똑같잖아.”
“하지만 여기는 해외잖아. 이국적인 정취는 창문너머로도 잘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츄야랑 침대에서 노는 것도 좋은데.”
나카하라는 뻔뻔스럽게 말하는 다자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조금만 쉬고 나갈 거리고 말한 나카하라는 파란 하늘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백화점이라도 갈까. 하지만 저렇게 투덜거리는 다자이를 데리고 나갔다가는 별로 좋은 결과는 얻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고민하던 나카하라는 다자이에게 밥부터 먹자고 제안했다.
“게 먹자. 너 게 좋아하잖아. 코코넛 크랩 어때.”
“에, 코코넛 크랩? 그거 맛있데?”
다자이의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한 나카하라는 쾌재를 부르며 코코넛 크랩을 먹은 사람들이 올린 블로그를 그에게 찾아 보여주었다. 다자이는 커다란 게다리를 가진 코코넛 크랩에 사로잡혀 어서 이것을 먹기위해 나가야한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카하라는 도착과 동시에 짐을 가지고 호텔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가며 작게 웃었다.
코코넛 크랩은 성공적이었다. 껍질을 가르자 나오는 부드러운 속살은 정말 어디에서도 먹기 힘든 맛이었다. 입이 짧은 다자이조차도 접시가 깨끗이 접시를 비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카하라는 그렇게 맛있었냐고 물으며 배불러서 움직이지도 못하겠다고 말하는 다자이에게 조금 걷자고 말했다. 다자이는 배불러서인지 아까보단 이타적인 모습으로 ‘그래 뭐, 배부르니까 좀 걷자.’라고 나카하라의 제안을 수긍했다. 다자이는 은근슬쩍 나카하라의 손을 잡고 괌의 시내를 걸었다. 낮 시간대여서인지 날씨는 꽤 더웠지만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고 시내에서 눈에 띄는 것을 같이 구경하며 천천히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하지만 햇볕의 열기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는지 곧바로 백화점에 들어온 두 사람은 에어컨으로 완벽하게 시원한 안을 돌아다녔다.
“이건 어떠냐? 너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츄야 취향... 엄청 별로야.”
‘사준다고 해도 뭐라 하네.“
나카하라는 자신이 가리켰던 정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자이를 응시했다. 분명 잘 어울릴 것 같은 데를 연발하던 나카하라는 아무런 말없이 다른 매장 쪽으로 걸어가는 다자이를 따라 걸었다. 다자이는 이 매장 저 매장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입힐 옷들을 보는 나카하라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뭐라도 건져야겠다는 할인 판매전에 참전한 사람과 같이 백화점을 돌아다니던 그는 결국 딱 좋은 시계를 발견하고 그건 어떤지 다자이에게 물었다.
“옷이 싫으면 이건 어때?”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않고 시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들지만, 나카하라를 어떻게 놀릴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나카하라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다자이의 모습에 ‘그냥 갈까?’라고 물으며 다시 다른 매장의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냐. 나 이거 좋아 츄야.”
돌아서는 나카하라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한 다자이는 어서 보러 들어가자며 그를 매장 안으로 이끌었다. ‘커플 시게로 맞출 거지?’ 다자이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거린 나카하라는 매장 직원에게 다자이와 본 시계를 부탁했다. 가격이 많이 나가는 시계는 아니지만 이렇게 같이 나와서 고른다는 게 더 의미 있는 거니까. 기분 좋게 시계를 보며 매장을 나선 나카하라와 다자이는 반쯤 꺼진 배와 아픈 발로 인해 백화점 광장에 있는 카페에 음료를 사 앉았다.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아이들과 함께 있는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많이 보였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나카하라는 ‘직원들한테 괌으로 여행 갔다고 하면 놀랄 수도 있겠다.’라고 중얼거렸다.
“왜?”
“거의 가족 단위로 오는 곳이기도 하고... 사실 우리 주변에 재수 없는 인간들은 괌에 잘 안 오잖냐. 일반 사람들이랑 부대낀다고.”
“우린 그러려고 온 거잖아. 그리고 우리도 가족인데, 츄야.”
나카하라는 연유가 잔뜩 들어간 커피를 휘젓는 다자이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뭐... 그렇지.’라는 말로 시큰둥하게 넘겼다. 결혼은 한 사이이지만 아이도 없고 딱히 연애할 때와 변함이 없기에 연인 이상, 부부 미만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던 나카하라는 당연히 가족이라는 듯이 말하는 다자이의 한마디에 상기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다자이는 일부러 모른 척을 하며 분수대에 손을 뻗고 있는 아이를 구경했다.
“난 아이는 별로인데, 츄야 닮은 애는 좀 보고 싶긴 해.”
“난 너 하나 간수하기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다자이가 바라보는 쪽을 같이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너 하나만 있어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는 말이야.’라고 덧붙이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고를 많이 쳐서 힘들다는 말인 줄 알았다고 장난을 치려했지만 굳이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연인을 넘어서 부부로 가는 과정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이국적인 땅에서 서로를 더욱 알아가던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어버렸다.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한참을 그 광장 안 커피숍에 앉아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구경하고, 백화점에서 준비한 공연도 보며 가만히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이제 일어날 준비를 하며 다음 행선지를 정하려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안고, 하루에 너무 많이 돌아다니면 좋지 않다. 짐도 많으니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건 어떤가.”
“하지만... 아직 사쿠노스케 씨 바지를 덜 봤는걸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시간 내서 나오겠어요. 이렇게 해외 나왔을 때 쇼핑도 하고 그래야죠.”
“그럼 잠깐 앉기라도 해라.”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익숙한 목소리에 서로 눈을 마주보며 잠시간 고민했다. 물론 다자이의 생각과 나카하라의 생각의 전혀 달랐지만,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생각하던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나카하라가 다자이를 말리려는 손이 더 빨리 나갔지만, 그 다자이가 누구던가. 입이라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놀릴 수 있는 남자가 아니던가.
“안고! 읍.”
곧바로 입이 막혔지만 두 세 자리 뒤에 있던 두 사람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외침이었다. 나카하라는 한숨을 내쉬며 삐뚤어진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들었다. 분명 죽일 듯한 눈빛이겠지. 한숨을 내쉬며 사카구치와 오다를 보며 손을 흔들던 나카하라는 차마 사카구치와 눈을 마주 할 수 없었다. 그의 옆에 있던 다자이만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자네들도 여행 온 건가? 이게 무슨 인연인가!’라고 말하며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네 사람은 휴가 차 나온 여행이 이렇게 파란만장 해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인 오다와 신나는 표정인 다자이의 사이에 선 사카구치와 나카하라는 불안한 눈빛을 나누며 남은 이번 여행의 일정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우당탕탕 회장님!!.5

문스독/다자츄 2019. 6. 9. 18:37

일주일 중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다자이의 불만은 이미 머리끝까지 올라 쳤고, 부하 직원들의 원성은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카하라는 에너지 음료를 입에 머금고, 침침해진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 모습을 본 사카구치는 괜찮은지 묻기 보단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이제는 커피도, 에너지 음료도 받지 않을 지경까지 된 나카하라에게는 차라리 차가 나을 것이라는 그의 판단이었다. 나카하라는 고맙다는 말을 할 힘도 없는지 고개를 약하게 까닥였다. 아까부터 진동이 울리는 개인 핸드폰의 화면을 확인하던 나카하라는 핸드폰을 뒤집어 버리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다자이 씨 입니까?”

나카하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 한 모금 삼킬 힘조차 없어 입에 담긴 에너지 드링크를 조금씩 나눠 삼키던 그는 분명 짜증나서 전화하는 거야. 이따가 하면 되니까 걱정 마라.’라고 말하며 서류에 사인을 한 뒤 다른 서류 뭉치 위로 쌓아두었다. 사카구치는 조금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나카하라가 이정도로 다자이에게 무심하게 나온 적은 처음이기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카하라는 오늘은 정시에 퇴근하자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남은 서류 뭉치 중 가장 급하다고 메모가 되어있는 건부터 처리하기 시작했다. 회계감사와 회사 본연의 일, 게다가 합병 건까지 겹쳐 이렇게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남편마저 토라졌다. 이 처럼 안 좋은 타이밍이 또 있을까. 물론 다자이가 토라지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서도, 그는 나카하라가 회사 일에 치중해 자신에게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이 꽤나 마음이 상한 듯 보였다. 그래서 사람을 이렇게 들들 볶는 거겠지. 나카하라는 잠시라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을 붙이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역시 사람은 자신 스스로가 한계에 달하면 살려고 하는 구나. 그렇게 생각한 나카하라는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전부 읽고 사인까지 마친 뒤 메모를 남겼다.

안고, 집에 남는 방 있냐.”

있어도 안 됩니다. 다자이 씨가 기다리실 거라고요. 어서 가서 일단 주무시고 대화 좀 나눠 보세요.”

이럴 때만 다자이 생각을 하다니 너는 누구 비서냐. 입 앞까지 나온 말이 결국 뱉어낼 힘조차 없어 들어갔다. 나카하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도로 몸을 기댔다. 분명 다자이는 오자마자 전화를 왜 안 받았는지 닦달 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밥을 먹고 씻을 새도 없이 자신에게 안겨 외로웠다고 투정을 부릴 것이 눈에 훤했다. 나카하라는 이 상황에서 그의 투정을 받아 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한편으로, 어서 그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 다자이 새끼가 입만 다물었으면 좋겠다. 속으로 중얼거린 나카하라는 만연필로 서류에 사인을 하다가 문득 든 의문에 사카구치에게 물었다.

“너희 사표는 내가 수리해주는데, 내 사표는 누가 수리해주냐?”

회장님께서 사표 내시려면 주주총회부터 열어야 할 겁니다. 후임도 데려다 두시고, 후계자 수업으로 인수인계까지 마치신 뒤 사표 내실 수 있을 겁니다.”

누가 한다고 했냐. 왜 이리 겁을 줘.”

나카하라는 그냥 조용히 회사 다니다 휴가나 펑펑 몰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조금 신경질 적으로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나카하라는 서류를 처리하는 동시에 사카구치에게 일정표를 가져다 달라고 하고는, 처리한 서류들을 전부 파일로 정리했다. 사원들이 하나 둘씩 찾아와 서류를 찾아가고, 나카하라는 조금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일정표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그가 보아야할 서류는 많았지만,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나카하라는 다음 주부터 아무것도 잡혀있지 않은 달력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사카구치에게 내일부터 휴가 나가도 되냐?’라고 물었다. 사카구치는 휴가를 직접 받아서 가보는 것을 본 적이 없던 그가 휴가 이야기를 꺼내자 곧바로 자신의 일정을 확인했다.

내일부터 나가시면 앞에 이틀 정도는 몇 가지 결제 할 것이 남을 수도 있어서 회사를 잠깐 들려주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메일로 확인해도 괜찮은 거면 그날부터 쭉 휴가 잡아줘. 남은 거 다 써야지.”

철야 근무가 역시 사람 잡는 데는 효과적이군. 워커홀릭이나 다름이 없었던 나카하라 회장이 긴 휴가를 떠났다고 말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깐깐하던 임원들조차 젊은 사람이 저렇게 일하다가는 단명할 거라는 말이 돌던 그였다. 사카구치는 그럼 전부 사용하시는 것을 알고 휴가로 잡아두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자신의 일정표에도 빨간 줄을 그어두었다. 회장인 그가 나오지 않는 다면 비서인 자신도 휴가나 다름이 없었기에, 사카구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휴가 날짜를 세어보았다.

어서 들어가서 다자이 화나 풀어줘야지……. 분명 엄청 토라졌을 거라 며칠 가지고는 감당 안 될 거라고.”

한숨 섞인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서류를 가지고 들어오는 사원에게 어느 부서인지 묻고 이미 처리 된 서류를 전부 넘겼다. 사원은 아직 신입인 모양인지 어정쩡하게 서류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여 보이며 그의 사무실을 나갔다. 나카하라는 마치 중년 아저씨라도 된 사람 마냥 풋풋해보여서 좋다고 중얼거렸고, 사카구치는 나이차이가 얼마 안 난다는 것을 그에게 일러줄까 했지만 그만 두었다. 점점 서류가 적어질수록 집에 가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전화에 불이 나게 전화를 하던 다자이도 제풀에 지쳤는지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나카하라는 거의 다 끝나가는 서류들을 바라보다가, 이곳저곳 전화를 돌린 뒤 한숨 쉬고 있는 사카구치에게 다자이가 좋아할 만한 식당에서 포장을 부탁해달라고 말했다.

데이트라도 하고 싶은데 이 꼴로 나가면 분명 마약한 줄 알거야.”

그 정도는 아닌데요.”

곧바로 유명 초밥 집에 전화를 걸며 말한 사카구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저 너무 일해서 시체 같아진 것뿐입니다.’라고 말한 사카구치는 차라리 마약보단 시체가 낫다고 중얼거리고는 퇴근시간에 맞추어 초밥을 주문했다. 따로 서류가 더 들어오지는 않을 테니 오늘은 정시 퇴근 가능하겠는걸. 시계를 확인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는, 다시 말 없이 서류를 한참 들어다 보고 있는 나카하라를 방해하지 않고 저리 된 서류를 부서별로 나눠 정리하기 시작했다.

 

***

 

다자이, 나 왔다.”

게살 회와 초밥 정식에 좋아하던 술까지 사들고 온 나카하라는 적막함이 가득한 현관을 느끼며 집으로 들어왔다. 다자이는 어디 갔나. 그럴리 없겠지만 정말 아무도 없는 것같이 삭막한 집안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카하라는 주방에 음식을 두고 일단 1층 방들을 살폈다. 물론 경험상의 다자이는 1층에 잘 있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어디 숨어 있다가 찾지 않는 모양새라도 된다면 사랑이 식었다며 잔소리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카하라는 1층 방을 전부 살핀 뒤, 곧바로 2층 침실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자 미미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알파 향기에 여기 있었다고 중얼거린 나카하라는 바로 침실문을 열었다.

“...츄야, 왜 전화도 안 받았어.”

다자이의 목소리는 방 한가운데에 쌓여있던 옷 무더기 안에서 들렸다. 나카하라는 이게 다 뭐냐고 묻기도 전에 그 옷더미를 뒤져 다자이를 찾았다. 마치 모양새가 유명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쿠션과 인형 더미에서 아기를 찾는 할머니의 장면 같았지만, 나카하라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옷을 한움쿰씩 집어 뒤로 던졌다. 전부 내 옷이잖아. 이 미친놈이. 속으로 욕지기를 하던 나카하라는 몸을 웅크리고 옷더미 제일 아래 있던 다자이를 일으켰다. 가뜩이나 지친 몸에 남편 놈까지 말썽이라고 중얼거리던 나카하라는 그대로 자신을 당겨 안아버리는 다자이의 힘에 그대로 옷더미 위로 넘어졌다. 나카하라는 자신을 품에 안고 그리웠다는 듯이 뺨을 맞대는 다자이를 가만히 올려다보다 끌어안아주었다. 다자이의 품에 누워 있던 나카하라는 몸을 짓누르는 피곤함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의 페로몬 향 때문일까, 회사에서 자던 쪽잠과는 다른 의미로 기운이 나는 기분에 아까보다는 잘 깨어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느끼기 위해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나카하라는 쌓여있는 옷더미가 푹신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더욱 끌어안아 깊이 안겼다.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한참을 안겨있던 나카하라는, ‘이 옷들은 다 왜 꺼낸 거냐.’라고 물으며 그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츄야 향기가 그리워서. 이렇게라도 하고 있던 거야. 나 불쌍하지 않아?”

전혀. 이렇게 남편도 있고, 돈도 많이 벌어오잖아. 뭐가 불쌍해.”

나카하라는 부스스한 다자이의 머리칼을 헤집듯이 쓸어 넘기며 웃었다. 그는 나카하라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카하라는 온 몸을 감싸오는 그의 페로몬이 나쁘지 않았지만, 조금씩 느껴지는 허기짐에 어서 일어나자고 그를 재촉했다. 하지만 다자이는 별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렇게 있겠다면서 안겨있던 그는 결국 일어나지 않을 심보였는지 싫다고 고개를 저어보였다.

, 밖에 초밥도 사왔는데 상해.”

초밥이 대수인가. 자네만 있으면 난 상관없어.”

게살 회도 가져왔는데. 너 그거 좋아하잖냐.”

다자이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게살 회에 이기지 못한 것인지, ‘어서 먹으러 가자 츄야.’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카하라는 자신을 안아 일으키는 다자이의 손길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너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못 지나치겠지?’라고 놀리듯 말했다. 두 사람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옷가지들을 뒤로 한 채, 함께 주방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근 일주일 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계속했다. 오다와 함께한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회사에서 엄청나게 많은 서류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라던가. 두 사람은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느꼈음에도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분명 포장해온 음식이었지만 식당에서 바로 먹는 것 못지않게 맛있었고, 오랜만에 함께 마주 앉은 자리가 나른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 나 휴가 냈어.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나야 뭐... 집에만 있어도 좋은데. 나 요리 연습하는데 먹어 줄 수 있어?”

영원한 안식을 이렇게 주려고 하는 구나. 그래서 보험금이 얼마라고?”

장난스럽게 받아친 나카하라는 뚱해진 다자이의 표정에 알겠다며 손사래를 치고 웃어버렸다. 한 삼 일간은 누워만 있겠네. 병실 행만 아니면 좋겠구만. 속으로 중얼거린 나카하라는 신나게 게살 회를 먹는 다자이의 술잔에 술을 한 잔 더 따라주고는, 저 위에 옷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건 왜 저렇게 해놓은 거야. 누구보고 치우라고.”

츄야가 안 들어온 탓이잖아. 둥지 만들 법도 하다고.”

투덜거리며 대꾸한 다자이는 젓가락을 내려두며 술을 홀짝거렸다. 이미 취기가 오른 듯이 보이던 나카하라는 붉어진 얼굴로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좀 참지.’라고 중얼거리며 나른한 눈을 껌뻑였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전화도 받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고 중얼거리고는 곧바로 술잔을 비웠다. 나카하라는 다시 그의 술잔을 채워주고는 자신의 술잔도 채웠다. 다자이는 이미 취한 듯 보이는 나카하라의 손을 저지 했지만, 나카하라는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술잔을 넘치도록 가득 채웠다.

피곤하면서 왜 자꾸 술을 마셔. 어서 씻고 자자 츄야.”

으응……. 나 아직 안 취했어. 그리고 오늘 따라 남편이 귀여워 보이 길래……. 같이 좀 놀까 했는데 싫어?”

논다고? 다자이는 잔뜩 피곤에 절어있던 사람이 뭘 하고 논단 말인가. 다자이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카하라를 바라보며 푹 쉬고 싶을 거 아니야.’라고 그에게 말했다. 나카하라는 자신을 걱정하는 다자이의 모습을 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입고 있던 흰 셔츠 단추를 하나 두 개 푼 나카하라는, ‘그래도 오랜만에 품에 안기니까 좋더라고. 너는 별로였냐?’라고 물으며 턱을 괸 채 그를 응시했다. 다자이는 코끝을 자극하는 향을 흘리며 자신에게 웃어 보이는 나카하라의 모습에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이렇게 치고 들어오는 게 어디 있어. 작게 웅얼거린 다자이는 식탁 위에 가지런히 있는 나카하라의 손을 깍지 껴 잡고는 그의 손등에 입 맞췄다.

하다가 자면 나 정말 울 거야.”

네가 우는 것도 보기 나쁠 것 같지는 않은데.”

츄야 성격 나쁘네.”

자연스럽게 나카하라를 안아 침실로 향하던 다자이는 모르고 결혼했냐. 불만이 왜 이렇게 많아.’라고 대꾸하는 그를 보며 작게 키득거렸다. 얼마만의 함께하는 침실인가. 옷더미가 무자비하게 뒤엉켜있는 어지러운 모습인 침실이라도, 나카하라와 함께하니 나름 멋있어 보였다. 물론 나카하라는 언제 다 치우냐며 욕지기를 해대었지만, 다자이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목욕물을 받고 올 테니 목욕부터 하는 게 어떤지 물었고, 나카하라는 욕조에서 한판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의 동침에 들떠있는 것은 유혹당한 다자이뿐이 아니었다. 나카하라는 옷가지를 좀 치워두고 푹신한 시트 위로 몸을 뉘였다.

, 너무 좋다.‘

얼마 만에 누워보는 침대야. 그렇게 침대 시트 위를 굴러다니던 나카하라는 미미하게 느껴지는 다자이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붉혔다. 술기운에 기분 좋게 달아오른 몸이 시원한 시트에 닿자 곧바로 나른함이 몰려왔다. 나카하라는 욕조에 차오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무겁게 감기는 눈을 연신 껌뻑거렸다. 조금은 감고 있어도 되려나. 그 생각을 끝으로 나카하라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물을 가득히 받은 뒤 입욕제까지 푼 나카하라는 금세 잠이든 그에게 야속함을 표하면서도 곤히 자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사진을 찍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는 건 반칙이지 않나.”

자신을 유혹하며 열었던 셔츠 자락을 다시 여며준 다자이는 옆에 쌓여 있던 옷가지를 치우고 그의 옆에 누웠다. 나카하라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는 소리를 듣던 다자이는, 그대로 나카하라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움에 술을 얼마 먹지 않았음에도 잔뜩 취한 기분이었다. 다자이는 한 시간도 자기 힘들었던 일주일을 끝으로 드디어 피곤함을 느끼고는 나카하라를 품에 안은 채 늘어지는 몸을 그에게 기대었다. 품 안 가득 느껴지는 그의 향기가 몸을 더욱 나른하게 하는 기분이었다. 다자이는 거스를 힘도 없다는 듯이 눈을 감고는 그대로 품에 안긴 나카하라에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잘 자, 츄야.”

목소리에까지 잠이 묻어나는 기분에 작게 웃던 그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고, 두 사람은 다른 의미로 밤을 함께했다.

posted by 송화우연

 

 

오랜만에 하는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일찍 잠에든 나카하라는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나른하게 잠에 취한 상태의 그는, 따뜻하게 맞닿는 온기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떠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살폈다. 아직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해 초점이 없는 눈을 연신 깜빡이던 나카하라는 잘 잤나, 츄야?’라고 묻는 다자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푹 자는 츄야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너는이 새벽에 왜 깨어있는 거야.”

해가 길어진 계절이 되어가는 중에도 어둑한 창밖은 아직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보였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물음에 대답대신 작게 웃어보였다. ‘그래도 평소보단 잘 잤어.’다자이는 속삭이듯 말하고는 나카하라의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겨 이마에 입 맞췄다. 나카하라는 평소에도 잠에 잘 들지 못하는 그가 조금 걱정 되는지 더듬더듬 손을 뻗어 뺨을 매만져 주었다.

못 자겠으면 깨우지.”

잘 잤다니까 그러네.”

다자이는 자신을 쓰다듬는 나카하라의 손을 겹쳐 잡은 채 눈을 감았다.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고, 두 사람은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타지에서의 첫 새벽을 보낸 두 사람은, 다시 그대로 잠이 들어 느지막한 아침에 눈을 떴다.

이번에 먼저 눈을 뜬 사람은 나카하라였다. 유리창으로 되어있는 벽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얼굴을 찌푸린 그는, 다시금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다자이는 정말로 새벽 내내 잠을 들지 못했던 것인지 이제야 이불을 몸에 두른 채 잠에 빠져있었다. 나카하라는 오래 잠이 들어서인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스트레칭을 하며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 시내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역시 닮은 듯 하면서 뭔가 다르단 말이야. 크게 펼쳐진 전광판이라던가, 높고 낮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도심이라던가. 정감 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사다둔 음식이 전혀 없어 아침부터 나가 사 먹어야하는 것이 확정이었다. 하지만 커피는 포기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비치된 캡슐 커피를 한 잔씩 내린 그는, 아직 잠들어 있는 다자이의 옆에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두고는 자신은 테라스로 나가 더욱 가까이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 때문에 고생한다는 다른 후기에 비해 오늘 한국 하늘은 깨끗하기만 했다. 나카하라는 가만히 숲에 둘러 쌓여있는 호텔 주변을 둘러보다, 며칠 있다가는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생각하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 다자이. 이제 일어나. 해가 중천이다.”

나카하라의 거친 모닝콜에 몸을 뒤척이던 그는, 조금만 더 자고 싶다 웅얼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나카하라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씻고 나올 때까지 정신 차리라고 말한 뒤, 옷가지를 하나씩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나카하라는 지금이 두 번째 하는 샤워인데도 불구하고 점점 익숙해지는 호텔 구조에 작게 피식 웃었다. 이러다가 집같이 느껴지면 어쩌지. 시답지 않은 걱정을 하며 머리를 감던 그는, 평소보다 오래 걸린 샤워를 마치고 샤워 가운만을 입은 채 욕실을 나왔다. 다자이는 정신을 차리는 중인 것 같았다. 이리저리 굴러 시트에 얼굴을 박고 엎드려 있던 그는 나카하라의 인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나 안자고 있어.’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카하라는 어서 몸뚱이부터 일으키라고 잔소리를 해대며 얼굴에 기초 제품을 발랐다.

오늘은 뭐 할 거야 츄야?”

글쎄……. 너는 뭐하고 싶은데?”

자유 여행인 만큼 최소한의 계획을 가지고 온 두 사람은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분명 하고 싶은 것들을 목록으로 적어왔었지만, 막상 무엇부터 해야 할지는 고민이 되기 십상이었다. 나카하라는 가만히 자신의 수첩을 펴서 적어 놓았던 목록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일단 아침을 먹어야하는데.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침은 호텔에서 먹고 가자. 막상 이 근처 나가면 한국에서만 파는 음식 먹어야 하잖아.”

그래, 그럼 아침은 여기서 먹고 이참에 쇼핑부터 싹하고 다시 호텔 와서 쉬다가 나갈까? 여기 동네는 밤에 더 멋지다는데.”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딱히 쇼핑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카하라의 최대 즐거움 중 하나를 뺏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카하라는 사야할 목록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한국은 마사지 기계가 많다네. 그것도 한 번 보자.’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마사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어서 호텔에서 된장국과 쌀밥을 먹고 조금 포만감을 가진 상태가 되었으면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행지에서 배를 곯는 것은 꽤나 서글픈 일이었으니까.

일단 아침밥부터 먹고 츄야 가고 싶은 데는 다 들려보자.”

다자이는 약 3시간 뒤에 자신이 뱉은 말에 후회했지만,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

 

다자이! 여기!”

어디 백화점이라도 가서 명품 쇼핑이라도 할 줄 알았던 다자이는, 명동 번화가 중심에서 가게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나카하라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카하라는 가게마다 들어가 마스크 팩을 종류별로 사고 있었다. 이건 누님 드릴 거, 이건 보스, 이건 누구, 이건 누구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물건을 사는 그에게 너무 똑같은 것만 사는 거 아니야?’라고 묻던 다자이는 다 다른 거라고 설명하는 그에게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은 곳인데 오늘은 평일 낮이라 비교적 사람이 적다고 설명하던 나카하라는 이정도면 되었다며 두둑하게 들린 쇼핑백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시원한 거 먹으면서 다른데 가자.”

또 뭐 살게 있어?”

, 아직 남대문 시장은 안 가봤잖아.”

다자이는 그에게 지금 산거 그 시장에 팔러 가는 건 아니지?’라고 물어보려 했지만, 분명 한 대 맞은 것이 분명했기에 말을 아꼈다. 나카하라는 천천히 명동 번화가를 나와 큰 도로를 따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중간에 보이는 프랜차이즈 밀크티 전문점에서 음료를 하나씩 물고 나온 두 사람은, 더운 기운이 조금 가셨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걸어 나갔다. 건널목을 건너고, 큰 백화점을 지나(이때 다자이는 여기는 가지 않는지 물었지만, 나카하라는 나중에 라고 말 할 뿐이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는 사람마냥 두리번거렸다. 어디가 끝인지 모를 만큼 길게 이어진 상점들, 길 한복판에 큰 가판대를 두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일본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나카하라는 잠시간 둘러보다가 양말이 종류별로 있는 상점 앞에서 가판대에 걸린 양말들을 바라보았다.

츄야, 나 양말을 이렇게 많이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그러게. 요새 많이들 사간다는데 너도 애들 줄 거 몇 개 골라가.”

벌써 캐릭터 양말을 몇 가지 고른 나카하라가 다자이에게 말하자, 다자이도 나름 귀여워 보이는 양말을 한 켤레씩 고르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아츠시 군에게, 이 귀여운 토끼는 쿄카 쨩. 그리고 나비는 요사노 씨, 타니자키 남매는 똑같은 양말로 사다줘야겠군. 그렇게 하나씩 고르던 두 사람은 금세 쌓인 양말 더미를 보며 웃었다. 여행지에 와서 양말을 사가는 사람이 우리라니. 다자이는 속으로 우습다고 생각하며 계산을 마쳤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양말을 들고 나와 나카하라에게 뭘 샀는지 물었다.

그냥 내 거랑 부하들 거. 보스 거랑 누님 거 몇 개.”

다자이는 꽃무늬가 화려한 버선을 여러 개 산 나카하라에게 그거 설마 츄야가 신으려고?’라고 되물었다. 아무리 츄야의 패션센스가 꽝이라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나카하라는 자신을 놀리듯이 말하는 다자이에게 아니라고 소리치며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 변명하기 시작했다.

내건 아니고 누님이랑 보스 드리게. 되게 따뜻하데.”

모리 씨가 그거 신고 있는 거 사진으로 찍어 보내줘.”

싫거든. 내가 왜.’ 나카하라는 다자이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며 놀리듯 대답하고는 점점 시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점점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맛있는 냄새와 음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종 거리 음식들, 그리고 식당. 게다가 건어물을 펼쳐놓고 파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다자이는, 멸치가 가득한 상점을 가리키며 나 이거 사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멸치는 왜?”

사장님이 좋아하셔.”

사장님은 멸치가 아니라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거지만……. 항상 멸치로 고양이를 유혹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후쿠자와를 생각하던 다자이는, 제일 작은 상자의 멸치를 샀다. 한국 멸치는 뭔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분명 받고 고양이에게 줘볼 생각에 신나할 후쿠자와의 얼굴을 생각하던 다자이는 그거 염분 있어서 고양이 주려면 삶았다가 줘야하는데.’라고 말하는 나카하라에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그러면 다시마 국물 내실 때 넣어 끓이시라하지 뭐.”

다자이의 시큰둥한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카하라는 건어물 상점들 사이사이에 위치한 관광객용 먹거리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는 들어가 보자며 그를 끌고 들어갔다. 아까 가게에서 보았던 한국 김이 먹기 좋게 묶음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상상도 해보지 못한 허니 버터 아몬드와 같은 과자도 많이 팔고 있었다.

츄야, 이거 김 과자래. 근데 우리나라 김 과자랑 좀 다르게 생겼다.”

먹고 싶으면 사봐.”

쿨하게 말한 나카하라는 다자이가 들고 있던 김과자를 바구니에 담았다. 선물용, 먹어 보고 싶었던 과자를 두 바구니 가득 담은 두 사람은 이능력을 최대한 쓰지 않고 어떻게 들고 갈지 걱정하며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나카하라와 다자이의 손에는 이제 그 무엇도 들 수 없을 만큼 짐이 가득했다.

우리가기 전에 여기도 한 번 더 오자. 다음에는 백화점도 들리고.”

진심이야?”

다자이는 자기는 두고 가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혼자 호텔에 남는 것은 싫었다. 그가 없는 호텔이라니 여행을 온 의미가 없잖아. 투덜거리면서도 알겠다고 대답한 다자이는, 택시 정류장에 길게 늘어져 있는 택시 중 하나를 잡아타고 짐을 두고 나오기 위해 호텔로 돌아갔다.

 

***

 

나카하라는 낮 동안의 쇼핑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한층 더 신나보였다. 다자이는 이제 살 것이 거의 없어졌다고 말하는 그에게 그렇게 많이 사놓고 더 살게 있어?’라고 되물었다.

당연하지, 여행을 왜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츄야와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고 맛있는 것도 먹으려고 왔지.”

그래서 맛있는데 데려가려 하잖아.”

나카하라는 연신 투덜거리는 다자이를 끌고 시청 공원을 가로질렀다. 초여름의 햇볕을 받아 푸릇하게 빛나는 잔디를 지나간 두 사람은, 양쪽으로 크게 자리 잡은 호텔 건물 사이로 길을 찾아 가며 큰 길과 이어져있는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나카하라는 많은 한식집 가운데에서도 정갈하게 보이는 가게를 보고는 찾았다고 중얼거리며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다자이는 이제 한국 음식 먹는 거야?’라고 물으며 직원이 안내해준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가이세키 요리점과 같이 되어있는 좌식은, 안이 뚫려 있어 편안히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완벽한 좌식이었다. 푹신한 방석을 깔고 조금 어색하게 양반다리를 한 나카하라는 정 자세로 밥 먹어야 할 것 같은 곳이네.’라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곧바로 상이 차려졌다. 천천히 하나씩 나오는 일본 요리와는 다르게 상에 가득 차려진 기본 반찬들을 보며 이걸 어떻게 다 먹으려는 건지 묻던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건넨 전을 하나 받아먹어 보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배고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막상 먹으니 허기짐이 느껴졌다. 고기 완자와 각종 전들이 처음에 나오고, 불고기 양념을 재워둔 소고기와 함께 나온 씻은 배추김치로 말은 주먹밥. 그리고 맑은 고깃국과 식사용 밥. 그리고 맑고 시원한 동치미까지. 이곳에 와서 먹었던 식사 중 가장 배불리 먹은 두 사람은 한국 사람은 정말 하루 종일 먹는 다는 데 사실 인가봐.’라고 중얼거리며 후식으로 나온 식혜를 홀짝거렸다.

그러게... 많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푸짐할 줄은 몰랐다.”

근데 다 맛있었단 말이지.”

가만히 벽에 기대앉은 그는, 말랑거리는 떡을 디저트용 포크로 살살 눌러보다가 입에 넣었다. 보들하고 쫄깃한 떡 안에는 달콤한 팥소가 들어있었다. 나카하라는 식혜 안에 밥알을 휘젓는 다자이에게 앞에 유명한 길이 있다는 데 좀 걸을까?’라고 물었다. 다자이는 소화도 시킬 겸 괜찮다고 말하고는 아직 배부름에 몸을 가누지 못하니 조금만 있다가 가자고 그를 설득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던 두 사람은 겨우 자리를 옮겨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은빛 벽돌들이 반짝이는 길에, 푸른빛이 도는 기와가 얹어진 길은, 그 어디에도 없을 산책로였다. 중간 중간 보이는 소나무가 어우러지며 사진으로 남긴다면 손색없는 작품이 될만한 풍경도 눈에 들어왔다.

안 와봤으면 진짜 아쉬울 뻔 했네. 배부르게 먹기를 잘했다.”

그러게, 정말 예쁘다.”

나카하라는 벽을 중간 중간 만져보며 말하고는 뒤 따라오는 다자이를 돌아보았다. 다자이는 그런 나카하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다가, 그가 신나 보이는 미소를 짓자 마주 웃어보였다. 이런 여행을 하기위해 츄야랑 왔지. 조금 속도를 내 나카하라를 따라잡은 다자이는 그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걱정되는 사람마냥 손에 깍지를 껴잡았다. 나카하라는 가만히 손을 잡고 같이 가.’라고 말하는 다자이에게 바람이 새는 소리를 내며 웃어보이고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고개를 숙이게 해 뺨에 입 맞췄다. 고등학생이라도 된 듯 풋풋한 스킨십에 웃어버린 다자이는 얼굴을 붉히며 사람이 없으니까 해 준거야!’ 라고 소리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상으로는 길게 보였던 길도, 뭔가 함께 걸으니 짧다고 느껴지는 듯 했다. 나카하라는 택시대신 버스를 타보자고 말하며 버스 노선표가 주르르 늘어져있는 곳에 서서 이리저리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디 가게 츄야?”

우리 호텔 언덕 아래에 경리단 길 있잖아. 거기 가보고 싶어서. ... 이태원 가는 버스가 있는데 이걸 타고 이태원부터 가볼까.”

다자이는 서울 투어 버스를 알아보며 들어보았던 거리 이름에 흥미를 가지며 그와 함께 버스 노선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알아볼 수 없는 단어였지만 뭔가 정감 가는 느낌에 영어라도 어눌하게 발음해보던 다자이는, 검색 끝에 이태원으로 가는 버스를 찾아내었다. 게다가 남산 길을 지나간다니 그보다 더 좋은 코스는 없을 거라 말하던 나카하라는 바로 온 버스를 가리키며 그에게 어서 타자며 그를 이끌었다.

 

***

 

우리 고궁 투어 가기로 한 날은 언제지?”

그거 날짜 정하기만 하면 돼. 언제가 좋아?”

다음 일정을 체크하며 길을 걷던 두 사람은 한강진역이라고 쓰여 있는 지하철 입구를 지나 조금씩 세련된 건물들이 들어서는 거리로 점차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하나하나가 특색 있게 느껴지는 거리는 건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나카하라는 요새 입소문으로 유명하다는 커피 전문점을 찾아 골목길로 들어갔다.

츄야, 그런데 여기가 이태원이야?”

이태원 끝이래. 이리로 쭉 가면 중심가라는데?”

골목길 바로 앞에서 찾은 카페로 들어선 두 사람은, 특이한 인테리어로 이루어진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며 커피와 초코 밀크를 한잔씩 사서 나왔다. 한 번 쯤 죽치고 앉아있고 싶을 만한 카페인 것 같다고 말한 나카하라는 달콤하다 못해 진하게 입에 붙는 초콜릿에 놀란 눈을 하고 빨대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평소에 단건 입에 잘 안대면서 잘 마시네.”

응 완전 맛있어.”

고개를 끄덕거리며 빨대를 젓던 나카하라는 천천히 이태원 중심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태원은 어떻게 생각하면 이상한 동네와 같이 보였다. 일본 라멘, 프랑스 빵 집. 볼링장, 화덕 피자 전문점과 나가사키 카스텔라 전문점, 터키 과자점이 쭉 늘어선 거리는 여기가 이태원...?’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천천히 거리를 걷던 두 사람은 별의 별 나라가 전부 섞여있는 거리를 둘러보며 신기함에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나라이기에 더욱 특별해 보이는 걸까. 나카하라는 결국 다 마신 음료 컵을 버리고 터키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채 다자이와 함께 걸었다. 해가 길어져서인지 저녁 시간대임에도 하늘은 아직 파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태원 거리를 지나며 본 케밥을 하나씩 손에 들고 걷던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거리 한복판에서 보이는 성인용품점에 호기심을 가지며 구경을 하기도 하고, 유럽에서 파는 유리 공예 물품을 파는 전문점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군데를 오가며 구경하다가 이태원 거리의 끝이 거의 다가올 때쯤에서야 핑크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예쁘다고 중얼거렸다.

츄야, 여기 카페 예쁘다.”

다자이가 가리킨 곳은 반짝거리는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를 파는 가게를 옆에 둔 카페였다. 아담했지만 온 창이 유리로 되어있었고 중간 중간 보이는 식물들이 카페를 더욱 아늑하고 푸근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다리 아픈데 잠깐 앉아 있다가 갈까?”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즉흥적인 판단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얼마 없는 자리를 잡아 음료를 시켰다. 다자이는 걷는 도중 흘린 땀을 식히는 나카하라에게 즐거운지 물었다. 나카하라는 당연한 소리를 왜 묻는 거냐며 그를 타박했지만, 표정은 어린 아이와 같이 기쁜 모습이었다.

츄야랑 여행 오니까 즐겁네. 이제 어디를 가도 츄야가 없으면 허전할 것 같아.”

오냐 평생 같이 있어줄 거니까 걱정마라.”

그거 프러포즈야?”

착즙해서 나온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나카하라가 다자이의 물음에 사례가 들렸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당황한 모양새였다. 다자이는 아무렇지 않게 나카하라에게 휴지를 건네고는 난 무조건 좋아.’라고 냉큼 대답했다. 겨우 기침을 멈춘 나카하라는 그런 건 좀 무드 있게 하게 해줘라.’라고 말하며 입가를 닦아내었다. 다자이는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서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며 도시 사이에 일몰을 보고 있는 것도 나름 무드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지 뭐 어때?’라고 말하며 그의 손을 맞잡아 오고는 손등을 살살 쓸어보았다.

사람 많은데서 풍기문란 저지르지 마라...”

아까 먼저 뽀뽀한 사람은 누구더라?”

다자이는 붉어진 나카하라의 뺨을 보며 소리 내 웃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둘만 서로를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다자이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가슴 속에서 중얼거리며 그의 손을 깍지 껴잡았다. 분홍빛을 흩뿌리던 하늘은 점차 암청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두 색이 오묘하게 섞여 더욱 예쁘다고 생각하던 두 사람은 사람이 많아진 이태원 입구 거리를 걸어 나가 경리단 길로 향했다. 경리단은 또 다른 느낌의 거리였다. 조금 더 아기자기한 거리의 느낌이랄까.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꽃집이나, 큰 솜사탕을 파는 것을 구경하던 나카하라는, 줄이 늘어선 츄러스 가게를 지나 많은 사람이 가는 골목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안은 다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리저리 반짝이는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나, 작은 개인 카페, 그리고 향수 공방 등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늘어져 있었다. 게다가 일본에서 많이 보던 우유 아이스크림도 팔고 있는 모습에 일부러 저거 우리나라에도 많이 팔던데.’라고 하며 아는 척을 했다.

골목길을 지나 경리단 큰길로 나오자, 답지 않게 큰 교회가 하나 있었다. 주택가와 맞물려 있어서인지, 저녁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두 사람은 교회를 건너 천천히 호텔이 있는 언덕이 어느 쪽으로 가야 있는지 지도를 살폈다. 그 순간, 옆에서 맡아지는 고기 냄새에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맥주 컵 위에 감자튀김과 고기가 같이 나오는 컵에 담긴 음식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그 쪽으로 향했다.

한국 사람들은... 먹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같아.”

그러니까. 어떻게 들고 다니면서 이런 걸 먹을 생각을 하지.”

시원한 맥주를 빨대로 빨아 마시고 곧바로 고기를 먹은 나카하라는 한국에서 파는 기상천외한 음식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먹고도 이렇게 들어간다니 믿기지가 않네. 다자이는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며 우리 여기는 가까우니까 또 오자.’라고 말하며 더위를 잊게 해주는 맥주를 마셨다. 마냥 신나기만 한 한국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자튀김을 입에 물고 한국은 배달 음식도 다 맛있데.’라고 말하며 내일은 꼭 호텔에서 뭔가를 시켜 먹어보자고 말했다. 다자이는 먹으면서 먹는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고, 나카하라는 살짝 오른 술기운에 얼굴이 벌개져서는 왜 웃어!’라고 소리쳤다.

지금 츄야 얼굴만 보면한동안 울 일은 없을 것 같아. 상상만 해도 너무 재미있어서.”

그렇게 장난스럽게 대답한 다자이는 그의 주먹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왁왁 거리며 쫒아오던 나카하라는 결국 다자이를 잡아오며 기분 좋게 웃어버렸다. 아쉽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서로가 있었기에 한없이 즐거운 두 번째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posted by 송화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