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은 꽤나 순조로웠다. 진이 빠지게 고생하며 남자를 보필하였던 그 날 이후로, 남자는 다자이와 나카하라에게 마음이 열린 것인지 수업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불러 흥청망청 놀러 다니고 술을 마시기 일쑤였다. 물론 그에 따른 고생도 같이 뒤따라 왔지만 말이다.

“츄야, 그 인간은 머리에 우동사리라도 들어서 이런 간단한 자료조사조차 하지 않는 건가?”

빠르게 타자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던 다자이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다시 치켜 쓰며 이리저리 참고 자료를 들춰보고 있는 나카하라에게 물었다. 나카하라는 이미 진절머리가 났다는 듯이 ‘그냥 닥치고 해. 해줘야 뭐 파티에 초대되던 할 거 아니야.’라고 읊조리고는 두꺼운 전공 책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 평소 같았다면 한방에 기절 시킨 뒤 묶어놓은 채로 신문을 했겠지만, 최대한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니 마음 속으로만 그를 기절시켜 던지는 상상을 하던 나카하라였다. 다자이는 이를 바득거리며 펜으로 연신 그 남자의 시험 과목 필기 노트를 적는 나카하라를 보며 최대한 조용히 있는 편이 이롭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아무런 말없이 그저 타자를 칠뿐이었다.

“임무만 완성해보자고... 그 새끼 밤에 반쯤 족친 다음 학교 나가 줄 테니까.”

아득바득 힘을 줘 필기를 써내려가던 나카하라의 중얼거림에 다자이는 속으로 가짜 신분도 전과가 남는지 물어보려 했으나, 한마디라도 잘 못 말했다가는 그 남자보다 자신이 먼저 죽을 까 두려워 입을 열지 않았다. 다자이가 조금씩 도와줘서인지, 필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역시 지능 관련 센티넬이라 그런가, 꽤 하네.”

다 된 정리 노트를 읽던 나카하라는 다자이를 보며 말했다. 다자이는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우리 부서 모든 사람들의 등록 번호까지 외우고 있는데, 이정도 수업하나 기억하는 게 어려울 것 같나?’라고 말했다. 그의 잘난 척에 코웃음을 친 나카하라는 ‘그래 너 잘났다.’라고 대꾸하고는 위장용으로 쓰는 큰 뿔테 안경을 다시 썼다. 평소 쓰지도 않던 안경을 쓰고 오래 있는 것이 어색한지 안경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익숙하게 안경알을 닦는 다자이에게 ‘이번 건, 얼마나 더 걸릴 것 같냐.’라고 물었다.

“음... 일단 신뢰의 반열에 들기는 했지만.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 한 2주 정도는 더 진을 빼지 않을까 싶네. 게다가 잔머리가 워낙 비상해서 우리는 이용당하다가 팽을 당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다자이의 노골적인 실패 가능성에 대한 발언에 불쾌한지 혀를 차던 나카하라는 펜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좀 더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없나?’라고 물었다. 나카하라의 질문에 잠시 생각 중인 것인지 아무런 말을 않던 다자이는 하인 노릇 더하고 싶다면야 그 집안에 사용인으로 취직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며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비꼬아 말했다.

“그 망할 새끼. 이거 끝나면 정말로 반 죽여 놓을 거야.”

다자이의 대답이 화를 더욱 돋군 것인지 나카하라는 아까보다 더욱 살기를 띤 표정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 다자이는 같이 막막해 지는 기분에 한숨을 내뱉다가 ‘자네 때문에 나까지 부정적이게 되지 않나. 어차피 장기 임무였으니 자네가 최선을 다하게나.’라고 하며 최대한 초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아, 츄야. 오늘의 하인 노릇 말인데. 자네 여동생이 놀러 와서 안 된다고 말하는 거 어떤가? 같이 약속을 잡아놔서 힘들다고 말이지.”

‘뭐? 여동생? 그딴 설정 마음대로 넣지 말라고.’ 다자이는 자신이 만든 변명에 투덜거리는 나카하라의 모습에 ‘나는 이미 외동이라 말해버려서 내 형제 자매는 무리라네. 그리고 아프다는 변명은 들키기 쉬우니까 말이야.’라고 그를 설득시키며 여동생은 누구로 하는 것이 좋을 지 생각해보자며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러다가 여동생 보러오면 어쩔 건데. 누구를 부르려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나카하라의 물음에 다자이는 손사래를 치며 그렇게 대충 사는 남자가 궁금해 할 리가 없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런 다자이의 말을 쉽게 믿기는 힘든지 그를 빤히 바라보며 고민하던 나카하라는 ‘아니면 죽여 버릴 거야.’라고 말하며 여전히 고민되는 듯이 머리칼을 헤집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빠르게 다가왔다. 이미 끝내놓은 노트정리와 과제들을 챙긴 나카하라와 다자이는 아까까지만 해도 불만 가득이었던 표정을 풀고 최대한 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수업이 전부 끝난 캠퍼스를 지나가는 도중인데도 둘을 알아보는 사람은 꽤나 많았다. 남자의 옆에 있어서인가, 둘을 아는 척하는 무리가 꽤나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그럼에도 친절하게 인사하며 평소의 연기를 유지했다. 둘이 기숙사에 다다랐을 무렵, 남자는 담배라도 태우고 있던 것인지 기숙사 초입에 서있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친근하게 ‘선배!’라고 불렀다. 남자는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뛰어오는 둘에게 잘 왔다며 둘이 가져온 것을 받아갔다. 남자는 둘이 가져온 자료들은 열어보지도 않은 채 그저 고맙다고 말했다. 다자이는 고맙다고 말하는 그에게 그저 할 일을 한거라며 손사래를 치고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 오늘 분량의 자료정리와 과제는 내일 같이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나카하라의 여동생이 와서 오늘은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최대한 무해한 미소와 함께 말하는 다자이의 모습에 토가 쏠린다는 생각을 하던 나카하라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선배의 눈초리에 ‘상경한 저를 보러 온다며 얼마나 난리인지 몰라요.’라며 다자이와 맞장구를 쳤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장난 식으로 나카하라에게 ‘여동생, 예쁘냐?’라고 묻고는 한 번 보고 싶으니 언제 데려올 수 있는 지 물었다.

“나카하라 동생이면 판박이이려나.”

은근히 관심을 보이는 남자의 반응에 식은땀을 흘리던 다자이는 ‘그냥... 평범합니다. 닮기 닮았던가...?’라고 중얼거리며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나카하라는 예상과 다른 그의 반응에 속으로 다자이에게 쌍욕을 하며 ‘별로 닮았다는 말 못 들어봤어요!’라고 거들었다. 남자는 최대한 얼버무리려는 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보였다. 남자는 나카하라를 기분 나쁘게 훑어보고는 씨익 웃으며 ‘파티라면 오겠지? 여자들은 파티라면 환장하니까 말이야.’라고 말하고는 어떤지 물었다. 둘은 그의 입에서 나온 파티라는 단어에 순간 벙찐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약 2주간을 그의 노예처럼 살고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술집 근처를 배회하며 그에게 아는 척을 하기를 수 십 번, 있지도 않은 여동생 이야기를 지어내어서야 이렇게 쉽게 파티에 참가할 수 있게 되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둘은 표정을 최대한 관리했다. 나카하라는 그에게 ‘동생이 무척 좋아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배.’라고 말하며 마음속에서 쥐어짜낸 인류애를 담아 미소를 자아내었다. 남자는 크게 웃으며 이정도야 쉽다며 그를 치켜세워주는 둘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나카하라와 다자이는 남자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초대장을 보내주는 것까지 확인 한 후, 어서 가보라는 그의 말에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서둘러 돌렸다. 그가 여동생에게 관심을 가지면 다자이를 죽인다고 하였지만, 이 상황은 뜻밖의 횡재였다. 나카하라는 마지못해 다자이에게 잘했다고 말했다. 아주 작게 말한 터라, 나카하라는 그가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자이는 이미 그의 칭찬을 들었는지 히죽이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연신 자신의 계획이 철저하고 계산적이었다고 설명하는 다자이의 잘난 척을 들어주며 오늘만 참자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임무를 최대한 완수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하며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

사카구치는 얌전히 누워 링겔을 맞고 있는 모리에게 ‘기운은 좀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모리는 옅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걱정할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카구치는 안 된다며 그의 말을 자르고 그의 맥박을 다시금 확인하고 다른 팔로 연구용 혈액을 채혈 했다.

“내가 오래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사카구치군 자네 덕분인 것 같군.”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 모리는 ‘요즘 오다군의 가이드는 어떤가? 츄야군이 없으니 다른 S급 가이드를 붙여주긴 했는데 여간 걱정이 돼서 말이지.’라고 물으며 사카구치를 돌아보았다. 사카구치는 그의 물음에 한숨부터 내쉬고는 ‘일단 안정화 자체를 너무 힘들어해서 매번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점, 그리고 최대치의 힘을 내기 힘든 점을 보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예상했던 부정적인 대답에도 모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카구치는 그의 생체 정보가 변했는지 확인하며 ‘오다 요원이 상성에 맞는 가이드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울 것 같아 걱정입니다.’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모리는 그의 한탄스러운 대답이 재미있는지 피식 웃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요새 드는 생각인데 말이지. 없으면 만들어도 되는 거 아닌가 싶네.”

그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흘려들은 사카구치는 그랬으면 이렇게 자기가 연구할 필요조차 없지 않았을 거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후쿠자와도 검진을 할 때가 되었으니 같이 와서 서로의 힘의 상성이 어떻게 안정화 되는지 모니터링을 해봐야한다 권했다. 안고의 잔소리 같은 검사내용을 듣던 모리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아직은 나이에 비해 정정하다는 말을 수치로 듣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군.’이라 말하며 웃었다. 사카구치는 그의 대답에 그래도 다행이라 말하며 여러 가지 결과가 적혀있는 차트를 닫았다.

“후쿠자와 요원과는 곧 오도록 하지. 이번 폭동사건 때 이후로 조금 과도기를 걷고 있는 것 같으니 검사가 필요할거야. 그리고 사카구치군, 언제나 열심인 것은 알지만 건강은 챙기게. 오다군이 걱정하니 말이야.”

모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리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한 사카구치는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연구용으로 뽑아 둔 모리의 혈액 앰플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보석에 끌리기라도 하듯 앰플을 매만지던 그는, 아까 모리가 중얼거린 말을 다시 떠올렸다.

“없으면 만들면 된다...라.”

모리가 중얼거렸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던 사카구치는 앰플을 내려놓고 다른 연구원에게 혈액을 보관하라 시킨 뒤, 자료를 들고 검사실을 나섰다

posted by 송화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