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요쥰 2세 정리

2021. 1. 2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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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츄] 나와 너의 사계.4

문스독/다자츄 2020. 1. 13. 00:56

봄이 오는 소리는 별다른 게 아니다. 읍내에서 씨감자를 팔고 비닐하우스에서 기르던 모종들을 하나둘씩 꺼내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일 때, 정말 봄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카하라는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에 낀 장갑을 벗고, 모종의 이파리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아직 여린 이파리가 힘없이 찰랑거렸다. 나카하라는 모종을 한 판 구매하여 옆에서 걷고 있던 다자이의 팔에 걸어주었다. 다자이는 별다른 말 없이 모종들을 바라보며 ‘잘 커야 할 텐데.’라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아직 봄이 오지는 않았지만, 시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봄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 온다는 것은 분명 겨울과의 이별이었다. 나카하라는 은은하게 남은 아쉬움에 고민스러운 얼굴로 시장을 나서려 했다. 분명 겨울이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집이 비좁아 코타츠를 꺼내지는 못해도 겨울이라면 꼭 해야하는 것. 그것은 특정한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나카하라는 그걸 까먹고 있었다니 말이 안 된다며 중얼거리고는 읍내 시장에서 두부와 곤약, 그리고 숙주와 얇게 저민 고기를 장바구니에 담고 이제 됐다며 다자이에게 어서 가자는 듯이 손짓했다. 다자이는 양손이 전부 모종으로 묵직했다.

“츄야, 이거 언제 다 심게? 허리 부서지는 거 아니야?”

“안 부서져. 너도 같이 심을 거니까 내 걱정은 마라.”

‘그건 듣도 보도 못한 소리인데.’ 다자이는 자신도 동참시킨 밭일을 상상하다 고개를 젓고는 어떻게 도망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하지만 나카하라의 부탁에서 도망친다면 다음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 벌써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다자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카하라는 히터가 너무 세다며 버튼을 눌러 끄고 창문을 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을 에던 차가운 바람은 조금씩 녹아내린 것인지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나카하라는 상쾌한 산 공기를 담아두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조금 속도를 줄여 산길을 지나가는 다자이에게 속도를 올려보라고 말했다. 나카하라의 요구에 다자이는 ‘엇, 정말 그래도 되나? 쿠니키다 군이 절대 과속하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대답하며 커브 길을 안정적으로 돌았다.

“나랑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올려! 비밀로 해줄 테니까.”

나카하라는 빠르게 달리는 차에서 시원한 공기를 그대로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보기에 험준한 산길이 아닌 이곳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운전대를 잡은 다자이를 보챘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보챔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몇 번을 나카하라에게 되묻고는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액셀을 강하게 밟으며 빠른 속도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앞 좌석에 앉아있음에도 그대로 뒷좌석까지 밀려버리는 압력을 받고 눈 앞이 깜깜 해지는 것 같았다. 뺨을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산 공기는 느껴지지 않고 지옥 문턱의 공기가 그의 코끝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나카하라는 커브 길을 따라 흔들리는 자신의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큰 소리로 다자이를 부르며 그에게 운전을 멈추라고 이야기했지만, 다자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이 우악스럽게 운전했다. 나카하라는 시골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자동차는 나카하라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제 속도를 찾았다.

“너, 다시는 운전하지 마.”

“에, 그러면 츄야는 누구랑 읍내를 가나?”

‘걸어서라도 나 혼자 간다.’ 나카하라는 하늘의 모든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며 다자이에게 말했고, 다자이는 한결 상쾌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일탈이었다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들리는 시끌벅적한 해프닝에 산은 기뻐 보였지만, 나카하라는 몇 년이 늙은 기분이었다.

 

***

 

아까의 과속 사건으로 인해 피곤해진 정신을 다잡은 나카하라는 사 온 모종을 온기가 있는 창고에 넣어두고 음식 재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아까 나카하라에게 몇 번 쥐어 박힌 부분을 연신 문지르며 아프다는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벼운 잎채소들부터, 무거운 계란을 전부 들여오던 나카하라는 엄살을 그만 부리고 밥이 먹고 싶으면 어서 움직이라고 말했다. 이게 21세기 농노지 뭐야. 다자이는 입을 비죽 내민 채 중얼거리며 바구니 안에 물건을 깔끔하게 냉장고 안으로 넣었다. 나카하라는 무슨 일로 말을 잘 듣냐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다자이는 뭔가 강아지라도 된 기분이었지만, 운전에 이어 입을 잘못 놀리면 분명 저녁밥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노닥거릴 시간도 없이 쫓겨날 거라는 생각에 아무런 말 없이 거실에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츄야, 밥은?”
“내가 네 엄마인 줄 아냐, 진짜.”

하지만 나카하라는 투덜거리면서도 식사 준비를 했다. 읍내에 아침부터 다녀왔음에도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밖은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겨울은 이게 문제라니까, 낮이 짧아. 나카하라는 곧 오게 될 봄은 그러지 않을 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재료를 씻고 준비했다. 전에 사둔 쌈배추는 먹기 좋게 썰어두고 청경채는 잎을 전부 떼어둔다. 그리고 숙주와 쑥갓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손질을 해두고 다른 뜰채 바구니에 올려두었다. 다자이는 언제 자리를 바꾼 것인지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 나카하라가 채소를 씻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파리에 먼지 하나도 안된다는 듯이 깨끗한 물에 여러 번 채소를 씻던 나카하라는 마지막으로 물에 곤약을 담아두고는 시린 손에 숨을 불어넣으며 2인용 무쇠 냄비를 찬장 아래에서 꺼냈다.

“다자이, 창고에서 간이 가스레인지 좀 꺼내와 줘.”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말에 군소리 없이 곧장 일어나 가스레인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찾아왔다. 나카하라가 꺼낸 냄비를 본 것만으로도 그가 무슨 요리를 할지 짐작한 것인지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나카하라는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하는 다자이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냄비를 닦아내었다. 작은 종지 그릇에 달걀을 담아오는 것으로 저녁 식사 준비를 마쳤다. 나카하라는 무쇠 냄비를 간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고 그의 곁에 비계덩어리를 같이 두며 다자이에게 불을 켜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준비되었다는 듯이 불을 켜고 비계로 냄비에 기름칠한 뒤,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달궈진 냄비에서는 고기가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카하라는 육수를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며 조금 서두르는 모양새로 다자이가 앉아있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자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나카하라가 결정하도록 기다렸다. 나카하라는 어느 정도 고기가 익자, 간장을 부었다. 지글거리는 고기에 간장이 스며드는 모습이 꽤나 먹음직해 보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육수 조금과 먹고 싶었던 채소들을 차곡차곡 쌓고, 옆에는 곤약과 두부까지 올려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수를 더 부은 뒤 잠시 뚜껑을 닫아버린 나카하라는 ‘오랜만이야.’라고 말하는 다자이의 말에 웃어버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시간이 가장 기대되더라.”.”

“엇, 나도. 뭐부터 먹지하고 고민하게 되잖아.”

두 사람은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뭐부터 집을지에 관심이 몰려있었다. 나카하라는 숙주와 고기였고, 다자이는 일단 두부를 그릇으로 먼저 가져온 뒤 두부가 식을 때까지 고기를 먹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그게 뭐냐며 서로의 대답을 비웃었지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기전골은 모두가 배불리 먹는 메뉴이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올라가는 고기와 채소들, 그리고 마지막에 올라오는 음식은 뭐든 상관없었다. 찐득한 소스에 볶은 볶음밥이라던가, 너무 배부르다 싶으면 달걀과 육수를 넣어 죽을 끓인다는 것이 나카하라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 일단 이 식사를 마치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냄비 뚜껑에서 김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자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종지에 달걀을 까 넣어주었다. 나카하라는 고맙다고 말함과 동시에, 달걀을 빠르게 풀고 다자이의 달걀도 똑같이 풀어주었다. 이제 곧 냄비 뚜껑이 열릴 시간이었다. 달짝지근한 간장의 냄새가 강해지자, 나카하라는 셋을 센 뒤 냄비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는 아직 숨이 죽지 않은 쑥갓과 배추가 고기 위를 아슬아슬하게 배회하고 있었고, 숙주는 고기와 뒤엉켜 있었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말했던 대로 숙주와 고기를 함께 집어 달걀물에 살짝 담갔다. 그리고 금방 빼낸 뒤,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뜨겁고 달달한 간장의 향과 달걀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흩어지며 금세 식욕을 돋았다. 다자이는 아직 두부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곤약을 먼저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김이 나는 곤약을 넣기 전, 고기를 한 점 들어 그대로 달걀물에 담그고는 고기에 달걀옷을 입혀 한입에 넣었다. 행복이란 이런 맛이 아닐까? 따뜻하고 든든한 고기와 채소에 부드러운 달걀의 조화. 나카하라와 다자이는 한동안 아무런 대화 없이 전골에만 집중했다. 채소가 부족하면 채소를 더, 고기가 부족해지면 채소를 가장자리로 밀어놓고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째 고기인지 세기 힘들어졌을 때, 다자이는 ‘겨울이 가기 전에 행복한 만찬이네.’라고 중얼거리며 나카하라를 바라보았다.

“원래 봄이 오기 전에 한 번 이렇게 먹어야 해. 봄에는 일하니까 밥 챙기기가 힘들단 말이야.”

“츄야가 일 시킬 거 생각하니까 더 많이 먹어야겠다.”

다자이는 쑥갓을 한입에 넣으며 웃어버렸다. 나카하라는 오랜만에 농사일할 생각에 조금은 막막했지만, 오늘은 고기전골의 날이니 다른 걱정은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나카하라는 자신의 모친이 말하던 날씨가 추울 때 든든히 보충을 해주어야 이번 일 년을 잘 보낼 수 있다는 미신과도 같은 말을 생각하며 열심히 고기로 젓가락을 옮겼다. 뭐, 농사야 미래의 내가 알아서 잘하겠지. 나카하라는 막연하지만 든든한 생각을 하며 열심히 먹는데 집중했다. 절반가량 배가 찼다고 생각하며 젓가락이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을 때, 시골에 와서는 한 번도 울려본 적 없는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츄야, 츄야 거 같은데?’라고 말했지만, 나카하라는 전화 올 곳이 한 군데도 없었기에 의문스럽기만 했다. 받을까 받지 말까 고민하던 전화를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을 때, 나카하라는 조금 후회가 되었다.

“누군데 그래?”

나카하라는 연락처를 지웠음에도 익숙한 전 애인의 전화번호를 가만히 응시했다. 역시 받지 말자고 결정하여 전화를 뒤집어 놓았지만, 한 번 울린 전화는 끊임없이 오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나카하라의 표정에 ‘뭐…. 빚쟁이라도 돼?’라고 물었지만 나카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퇴색될 때는 말 못 할 쓰림이 있다. 나카하라는 곤약을 건져내 먹으며 ‘그냥 전 애인이야.’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전 애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란 분위기였다. ‘전’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전 애인의 존재만으로 이곳에 저 배낭 하나만을 들고 내려왔다던 나카하라가 뭔가 도시에 남기고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말을 아꼈다. 나카하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가 보아왔던 나카하라는 딱히 그 전 애인이라는 사람에게 미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 분위기가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별거 아니야. 다 끝났는데 왜 구질구질하게 전화를 거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니까.”

“저쪽은 츄야에게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 아, 물론 나는 잘 모르지만.”

“권태기에 저쪽이 바람피워서 헤어졌는데.”

다자이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왜 저런 놈이 츄야를?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왜 쓸데없이 그런 말을?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눈치를 보며 고기전골의 불의 세기를 조금 줄이고 ‘우리 천천히 먹자.’라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나카하라는 고기를 몇 점을 겹쳐 집어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나카하라의 전 애인과의 연애는 오래갔다면 오래간 연애였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나카하라가 극복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자신의 감정을 자로 재는 듯한 행위였다. 그의 ‘너에 대한 감정은 이 정도인 거야?’, ‘너는 나한테 별로 해주고 싶지 않아?’와 같은 말들은 나카하라의 사랑을 날카롭게 잘라내었다. 나카하라는 ‘내가 시간 내서 더 해주면 되지, 뭐가 그렇게 손해라고.’라는 생각으로 그의 요구를 하나둘씩 들어주며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그것은 나카하라 자신조차 좀먹는 일이었다는 것을 이곳에 내려오기 바로 직전에 알아차렸다. 사랑조차 날카롭다면 대체 무엇이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조금 메마른 상태에서도 이상함을 느꼈던 나카하라는 사랑을 자로 잰 듯이 뚝뚝 끊어 줄 수 없었던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무음으로 해도 끈질기게 전화하는 한 번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전화받을까?”?”

“어... 츄야가 하고 싶은 대로? 욕을 쏟아부어도 좋고, 츄야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봐.”

달이 채워지고 줄어가는 시간 동안, 나카하라의 마음에는 많은 것들이 채워졌다. 아직도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감정도 분명히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이곳의 따뜻한 햇빛을 받으면 금방 사그라지는 마음이었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에게 볶음밥이든 죽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후식으로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해두고는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다자이는 자신이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었지만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나카하라가 처음 왔을 때보다 밝아졌다는 것은 그의 눈에도 보이는 발전이었지만, 갓 골격을 쌓은 탑처럼 위태로운 것이었다. 게다가 한 번 무너진 적이 있으니, 다자이의 눈에는 더욱 불안해 보였다. 나카하라 아주머니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다자이는 문득 떠오르는 나카하라의 모친을 생각하며 그가 미리 다져둔 당근과 쑥갓, 그리고 파를 냄비에 볶았다. 간장 소스가 가득한 냄비에서는 맛있는 향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분명 따뜻한 차를 끓여주며 잘했다고만 하실 텐데, 그건 좀. 다자이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흰쌀밥을 볶던 다자이는 육수를 넣어 죽을 만들까, 아니면 볶음밥을 할까, 잠시간 고민했다.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채소들은 금세 밥과 뒤엉켜 맛있는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자이는 창 바로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걸으며 전화 통화를 하는 나카하라를 훔쳐보았다. 추운 겨울바람 사이로 날리는 입김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듯이 보였다. 다자이는 육수를 냄비에 부어 넣고 주걱으로 붙은 밥을 잘 풀어내어 죽을 만들 준비를 하였다. 추운 날에 아프면 안 되니까. 천천히 육수에 밥이 녹아들 듯이 풀어내고는 나카하라가 들어올 때까지 저어가며 정성스럽게 죽을 준비 하였다.. 나카하라는 생각보다 빠르게 전화를 마치고 들어왔다. ‘어우, 춥다.’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팔뚝을 쓸어내리던 그는, 다자이가 죽을 만들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으며 주걱을 뺏어 들었다.

“잘했어?”

“응, 욕이나 퍼부어 주려다가 그냥 이야기 좀 나눴다.”

정말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나카하라는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냐?’라고 다자이에게 되물었다. 다자이는 마음을 읽힌 건 아닐지 걱정하며 말을 돌렸지만, 입이 근질거리는 것은 나카하라인 것 같았다.. 나카하라는 죽을 덜어 다자이에게 먼저 건네주었다. 다자이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죽을 먼저 받고는 자신의 죽에 남은 달걀을 풀어 넣는 나카하라를 보며 자신도 똑같이 따라 했다. 나카하라는 죽을 한 입 먹은 후에야 조금 속이 풀린다고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지금 고향에 와있고, 네가 없어도 행복하다고 말했어. 좀 생긴 연하남도 있다고 네 이야기도 팔아넘기듯 말하기도 했고.”

“그랬더니?”

나카하라의 입에서는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행복. 사실 이곳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그가 이곳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자이는 긴장이 한결 풀린 표정이 되어서는 나카하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카하라는 그러자 아무런 말도 안 하고‘아, 그렇구나.’라던가 ‘응.’으로 대꾸하던 자신의 전 애인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면 재미있어했다. 나카하라는 소소한 복수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다자이의 생각에는 지금 전화를 건 그 ‘전 애인’이라는 작자에게는 가장 큰 복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활짝 미소를 지으며 죽이 맛있다고 말하는 나카하라에게 다자이는 평소보다 장난스럽게 자신이 잘 만든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카하라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계산보다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행복했고,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는다면 그것에도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풍족함을 느꼈다. 나카하라는 굳이 연애한다거나 특정한 사람이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도시에서였다면 어땠을까 고민하던 나카하라는 이미 두고 온 과거는 아직 꺼내 보지 말자며 생각을 묻어두었다. 역시 이 행복의 진원지는 앞에 앉은 갑자기 나타난 이상하면서도 재미있는 남자 때문이었을까. 나카하라는 문득 다자이를 보며 생각했지만, 기분 좋게 웃는 그에게 죽을 더 떠주느라 금세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잊어버렸다. 사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없었다. 나카하라는 꽉 찬 배를 두드리며 등을 벽에 기대었다. 어깨에 가득 올려두었던 짐 중 하나를 내던진 기분이었다. 다자이는 한결 가벼운 표정의 나카하라에게 ‘잘 먹었어?’라고 물었다. 나카하라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대화할 때마다 김이 나는 추운 겨울은 이제 꼬리만을 남긴 채 봄이 올 자리를 천천히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곧 오는 봄에도 천천히 채워보자고 생각하며 다자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봄에도 잘 부탁한다.”

다자이는 이 인사가 농사만을 부탁하는 인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도. 잘 부탁해, 츄야.”

다자이의 시선 끝, 나카하라의 웃는 얼굴에는 이미 봄이 온 듯싶었다. 두 사람은 밖의 겨울을 대신해 곧 오게 될 봄을 대비하여 미리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을 꺼내놓고 있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다자츄]나와 너의 사계.3

문스독/다자츄 2020. 1. 10. 23:41

다자이, 너는 왜 여기 퍼질러져 있냐?”

피난 온 거라네. 누가 여기 있는지 물으면 절대 대답해주지 말게나, 츄야.”

네가 여기 있다고 제일 먼저 소리칠 거다.’ 나카하라는 그에게 내뱉으려던 말을 새우전병과 함께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씹어 삼켰다. 이곳의 겨울은 시간이 지나가듯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스쳐 간다. 고구마를 굽는 장작 소리와 차가운 바람의 향. 나카하라가 멍하니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도시를 처음 올라갔을 때와 상반되었다. 굉장히 추울 때 왔다고 느꼈는데 이젠 그냥 그렇네. 나카하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의 군식구나 다름이 없어진 다자이는 담요를 몸에 두른 채 노곤하게 난로 근처에 누워있었다. 다자이와 먹은 밥그릇 수도 이제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다자이는 이따금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주일에 서너 번은 나카하라에게 찾아왔다. 초반에는 집에 먹을 음식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했지만, 함께 읍내에 나가도 사는 것이 없으니 먹을 것이 궁핍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자이의 말이 가장 신빙성이 있을 때는 일을 피해 도망 왔을 때였다. ‘츄야 나 좀 숨겨줘! 일을 끝냈는데 또 일을 주려고 하잖아!’라는 외침과 함께 현관을 박차고 들어오던 나날이 며칠간 계속되자, 나카하라는 이제 정말 밧줄로 다자이를 묶어 다시 농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사자인 다자이는 별로 진지해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카하라는 다가오는 봄에 무엇이 어울릴까 잠시 고민했다. 이맘때의 겨울은 봄을 위해 분주해지는 시기였으니 말이다. 나카하라는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겉옷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 넓은 마당의 한 켠에는 큰 텃밭이 있었다. 두 사람이 먹기에는 좀 많지 않은가 싶은 텃밭. 나카하라의 모친은 그곳에서 열린 농작물로 일 년을 보내기도 하고, 몇 소쿠리를 나누어 옆집에 가져다주며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언제나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하던 모친의 말이 생각났지만, 방구석에서 난로를 끼고 잠든 다자이를 생각하니 엄마,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 망친 것 같아요.’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이번 봄에는 뭘 심을 생각이야?”

언제 나온 건지 모를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가만히 텃밭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이 잘 골라두었다며 텃밭 앞에 앉았고 어쩌다 굴러 들어간 작은 돌을 텃밭 밖으로 빼냈다. 나카하라는 그가 자신의 혼잣말을 들었을지 걱정하다가, 그의 물음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텃밭을 바라보았다.

감자? 5월에 고구마 순을 심어도 좋고.”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봄 감자 좋지. 맛있겠네.’라고 중얼거렸다. 다자이가 다른 건?’이라고 묻는 말에 다자이는 또다시 고민에 빠진 듯이 텃밭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어렸을 적 자신이 보아왔던 텃밭처럼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토마토를, 그 뒤에 나눠진 공간에는 배추와 당근을 심어야겠다고 대답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아 행복한 상상을 하던 나카하라는 파종하려면 허리가 휘어지겠네.’라고 장난스럽게 말한 다자이에게 당연히 너도 도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봄이 온다는 생각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어.”

아까까지는 퍼질러 자느라 기분이 나빴냐?”

나카하라는 텃밭 아래 앉아 겨울 햇볕을 맞으며 중얼거리는 다자이에게 쏘아붙이고는, 감기라도 들면 귀찮아지니 어서 들어가자고 그를 재촉했다. 다자이는 군소리 없이 그를 따라 들어와서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뭘 할 줄 알고 거기 앉아있는 거냐며 그에게 핀잔주었지만,, 다자이는 이제 여기가 자신의 지정석이라는 말을 하며 어서 뭐라도 해보라는 듯이 나카하라를 바라보았다. 다자이의 말대로 이제 그곳은 다자이의 자리였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오래된 사이는 아니었지만, 다자이는 이미 이 집에서 어느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츄야가 요리하는 걸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그러냐?”

, 능숙하지 않아서 한 번에 몇 가지 요리를 안 해서 그럴지도.”

나카하라는 따라붙은 다자이의 말에 그대로 굶고 싶냐?’라고 대꾸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얼마 전 읍내에서 사 온 채소들과 먹을거리들이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큰 연근을 꺼냈다. 다자이는 굳이 나카하라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요리를 할 때는 아무런 간섭도, 질문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카하라는 연근에 묻은 흙을 잘 털어내고 연근을 씻었다. 흙에 뒤덮여 있던 연근이 드러나자 나카하라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칼을 들고 천천히 껍질을 잘 벗겨내었다. 연근은 썩은 곳이 없이 매끈했고, 나카하라는 다른 연근도 똑같이 손질하였다. 연근의 껍질을 전부 벗겨낸 뒤, 나카하라는 묵직한 나무 도마를 꺼냈다. 자신의 어머니 시절부터 쓰여왔던 도마인지라 군데군데 칼집이 많이 보였다. 나카하라는 도마를 물로 한 번 씻어낸 뒤 면포로 닦아내고 연근을 올렸다.

그 도마, 정겹네.”

다자이의 혼잣말 같은 한마디를 뒤로한 채 나카하라는 칼을 놀렸다. 조금 둔해 보이더라도 두께를 맞추어 천천히 연근을 예쁜 모양으로 썰어내었다. 어디 하나 부서지거나 깨지지 않은 동글동글한 모양새로. 분명 한입 물면 아삭 거리는 식감이 시원하게 퍼질 것 같았다. 연근이 천천히 썰리며 나무와 칼날이 맞닿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지,, 나카하라의 손놀림은 조금씩 경쾌해지며 빨라지기 시작했다. 연근을 전부 썰어내고 물에 담가 둔 나카하라는 혼탁해지는 연근 물을 확인하고 조용히 앉아있는 다자이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자이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나카하라가 요리하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미있냐?”

, 나쁘지 않아.”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거지, 나쁘지 않아는 또 뭐래. 나카하라는 그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냄비에 물을 가득 담아 불 위에 올렸다. 따다닥 가스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고 금방 불이 올라왔다. 나카하라는 냄비를 올린 채 식초를 냄비 안에 대강 부어 넣고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 물이 어느정도 끓기 시작하자 나카하라는 바로 연근을 전부 넣었다. 연근 하나하나가 뜨거운 물과 만날 수 있도록 한 번 섞어준 뒤, 그대로 뜰채를 이용해 연근을 건져내었다. 연근에서 물을 빼내고, 나카하라는 연근을 담글 물을 준비했다. 식초와 유자청 그리고 마지막에 넣을 통후추 한 줌. 나카하라는 일단 식초와 유자청을 잘 섞고 맛을 봐가며 설탕을 넣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물이 완성되자, 그것을 끓여두고 연근을 미리 소독해둔 병에 차곡차곡 담았다. 겹쳐 놓는 것보다는 조금 삐뚤빼뚤하게 담아 잘 물들 수 있도록. 나카하라는 피클 물이 식을 동안 다자이의 앞에 앉았다. 다자이는 이제 곧 완성되는 건지 물으며 저건 얼마나 있다가 먹을 수 있는지 물었다.

하루 정도만 냅두면 돼. 우리 엄마가 안 해줬냐?”

자주 해주셨어. 그래도 츄야가 만든 건 어떨지 궁금하네.”

미소를 띤 표정은 나른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했다. 나카하라는 따뜻하게 끓인 보리차를 다자이에게 건네주며 우리 엄마랑은 뭐 하고 지냈냐?’라고 넌지시 물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질문에 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마치 더 궁금해했으면 좋겠다는 듯이 나카하라를 바라보다가 눈꼬리를 휘어 웃고는 보리차를 홀짝거렸다.

밥 먹고, 텃밭도 가꾸고 그랬어. 정말 별거 없었는데.”

별거 없었다는 것 치고는 엄청나게 그리워하는 것 같아서.”

츄야도 그리워서 돌아온 거 아니야?”

나카하라는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다자이의 질문에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하다 전부 식은 피클 물을 확인하겠다는 명목으로 자리를 피했다. 식어서 미지근해진 피클 물은 너무 신맛이 강했다. 나카하라는 혀를 타고 올라오는 신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유자청을 한 번 더 물에 풀어 넣었고, 다자이는 그런 나카하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자이의 말처럼, 나카하라는 분명 어디선가 전해져 오는 따뜻함이 그리워 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따뜻함은 나카하라가 지긋지긋해 하던 시골의 정취와 고요함에서 흘러나오던 것인지, 아니면 나카하라의 모친에게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열쇠가 딱 맞는 자물쇠를 찾듯이 나카하라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나카하라는 달달해진 피클 물을 한번 맛본 뒤, 그대로 연근이 담긴 병에 담았다. 많이 끓여서인지 세 병을 채웠는데도 작은 병으로 하나 더 나왔다. 나카하라는 이제 됐다고 중얼거리며 병 입구를 젖은 면포로 잘 닦은 뒤, 병을 닫았다.

하루만 지나면 맛있어질 거다.”

, 아삭거리겠는데.”

손이 많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피클은 겨우 세 병이 나왔다. 한 병은 다자이와 함께 농원에 가져다줄 생각이었으니 자신이 먹을 것은 두 병뿐이었다. 이 유자 연근 피클은 몇 계절을 갈 수 있을까. 나카하라는 잠시 고민하듯이 병을 바라보다가 일단 병들을 비교적 서늘한 곳으로 옮겨두었다. 하얀 연근이 유자의 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이 계절의 묘미라고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병에 묻은 물기를 깨끗하게 닦아내고는 개수대를 정리했다. 나카하라는 방금 전 외면했던 다자이의 질문에 대한 답을 다시 곱씹어 생각했다. 솔직히 대답해보자면 나카하라는, 그리웠다. 뼈저리게 그리웠지만 무슨 아집이었는지 내려갈 수 없었다. 자신의 모친이 그리웠고 이곳의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삭막한 도심의 공기와 시끄럽고 반짝거리는 화려한 것들은 그 속에 있을 때 잠깐 정도 위안이 되었지만, 속을 따듯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나카하라는 텅 빈 자신을 바라보며 이 모습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되뇌었고, 그 모습이 익숙해 질리 없었기에 도망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츄야, 그런 표정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어떤 표정이길래? 나카하라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미간을 매만졌다. 다자이는 뭔가 동요하는 표정으로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래.’라고 얼버무린 나카하라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기에, 나카하라도 더 이상의 할 말이 없었다. 아직 해가 묵어가도록 먼지가 쌓인 마음을 드러내기에는 다자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편안하게 츄야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니까.”

너는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알고 말하는 거냐?”

나카하라의 질문에 어깨를 들썩여 보인 다자이는 나는 모르지, 초능력자도 아니고 내가 츄야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라고 대답했다. 나카하라는 더욱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도대체 뭘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지껄였는지 말해보라며 그를 타박했다. 하지만 다자이는 그의 타박이 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지, 그에게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까 밭에서도 그렇고, 요리도 그렇고 혼자 잘 생각해서 척척 잘 결정하고 움직이면서 츄야는 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모른다고 생각해?”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자신이 싫다고 여기던 것이 사실은 가장 소중했던 것이었으니까. 이 문제는 다자이가 앞에 있고 없고를 떠나, 자기 자신의 약한 모습을 직면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카하라의 꾹 닫은 입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다자이도 억지로 그의 말문을 트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자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나 보리차 한 잔만 더 줄 수 있어?’라고 물었고, 나카하라는 컵을 가져가 보리차를 따라 가져왔다. 살짝 김이 나는 컵을 그러잡은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기분 좋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츄야 보다 엉망이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

나카하라는 훌훌 털어버린 듯이 말하는 다자이가 조금은 신기한 것인지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자이는 아주머니도 그랬으니 나도 딱히 물어볼 생각은 없다면서 보리차를 홀짝였다. 나카하라는 왜 그가 자신의 모친을 그렇게 그리워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훔쳐본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굳이 모친을 언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린 날의 나카하라는 시골이 지긋지긋하고 이 적막이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시끄럽고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트리 장식에 걸려있는 커다란 별이나 전구들과 같이 모두의 시선에 들만한 무언가가.

유자 빛이 나는 연근도 행복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카하라의 영문 모를 중얼거림에 다자이가 작게 웃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어른이 아닌 것은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하여 전부 어른은 아니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얼굴에 남은 옅은 그림자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가 모른 척 해주었듯이, 자신도 모른 척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피클을 만들었는데 유자차 향이 난다, .”

유자 연근 피클이잖아, 츄야

연근 피클 때문인지 주방 곳곳에서는 아직 유자의 향이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그 실없는 소리를 시작으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나누며 보리차를 한 잔 더 마신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깊은 비밀을 나누거나, 어렸을 때처럼 비밀 일기장을 쓴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나카하라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배고프냐? 귤이라도 가져다줄까?’라고 물으며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를 챙겨 일어났다.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양하지 않겠다는 듯이 식탁에 턱을 괸 채 냉장고 문을 여는 나카하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깨에 잔뜩 지고 돌아온 짐을 덜어낼 때는 언제나 든든하고 따뜻한 한 끼가 중요하지. 다자이는 비가 오던 날 무거운 표정으로 찾아온 자신을 반겨주던 나카하라의 모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한마디에 많은 일이 변화했기에, 잊지 못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모친을 만났을 때의 자신을 회상하다가, 그대로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 또한 지금을 그저 추억으로만 지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다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나이기에. 그때의 자신과 자금의 자신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만 같은 사람이듯이. 모든 선택이 진정한 자신을 뜻하는 것은 아니니까. 다자이는 왜 그런 표정으로 보냐?’라고 묻는 나카하라에게 아까보다 기운이 난 것 같길래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하고는 키득거렸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장난에 마치 그를 언제 칠지 모른다는 듯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다자이는 그가 정말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을 피하지는 않은 채 가만히 토끼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 때리려고 했나, 츄야? 때리기에는 너무 잘생긴 얼굴 아닌가?”

퍽이나 그런 얼굴이다. , 이거 들고 어디 좀 가자.”

나카하라는 아까 만든 피클 중 하나를 작은 쇼핑백에 담았다. 흰 무지 쇼핑백이어서인지 선물 모양새가 나지는 않았지만, 나름 깔끔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건네는 쇼핑백을 받아 들고 영문을 모른 채 집을 나섰다. 대낮이었던 하늘은 점점 어둠을 덮고 있었다. 추운 날씨가 힘들었는지, 나카하라는 빠르게 어둠을 덮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겨울도 끝물인데 아직 해지는 게 빠르네.’라고 중얼거렸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에게 어디를 가는지 물었다. 하지만 나카하라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어차피 아는 곳이니 그냥 따라오라고 말하며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그의 소매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다자이는 점점 가까워지는 익숙한 길목에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바로 앞에 보이는 **허브라는 간판이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자신의 허브농원으로 보이자, 다자이는 이건 좀.’이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들어가야지. 내일 저 유자 피클이랑 국수해줄게.”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내일은 땡땡이치지 말고 일하고 와라.”

나카하라는 그를 끌고 가다시피 하여 농원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밖 청소를 마무리 짓고 있던 한 청년이 ‘다자이씨, 어디에 있다가 오신 거예요. 쿠니키다 씨가 어서 결산 서류 정리하라고 눈에 불을 켜셨다고요!’라고 말하며 나카하라와 다자이에게 다가왔다. 청년은 가까이 다가와서야 나카하라를 발견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나카하라는 조금 어정쩡한 모습으로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자신을 나카하라라고 소개했다.

, 나카하라 아주머니 아드님이신가 보네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나카지마 아츠시에요. 저번에 고기 조림 너무 맛있었어요!”

나카지마는 요즘 보기 힘든 순수한 청년 같았다. 나카하라는 변변치 않은 솜씨였다며 스스로를 낮추고 다자이가 들고 있던 유자 연근 피클을 건네며 직접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카지마는 감사의 말을 몇 번이고 전하며 이렇게 있지 말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자고 말하고는 다자이의 한쪽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아 잡았다.

“다자이 씨.‘

나카하라는 몇 분 전 그를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철회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오죽 다자이가 도망갔으면 저러려나라는 생각으로 나카지마를 포장하며 사무소에 도착한 나카하라는 뭔가 호통을 치려다 자신을 발견하고 입을 다문 남자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앞집에서 살게 된 나카하라입니다. 다자이는 저희 집에 있었습니다. 빨리 보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이런 모습을 처음에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나카지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이곳이 회사나 아이의 장래를 맡기는 학원 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시골의 허브농원이었고, 이야기의 대상은 학생이 아닌 성인 남성이었다.

두 사람, 날 너무 애 취급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애 같이 굴지마.“

나카하라의 타박에 쿠니키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카하라는 내려온 지 꽤 되었는데도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왔다며, 쿠니키다에게 직접 만든 유자 연근 피클을 건넸다. 뭔가 소소한 물건이라도 직접 만든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선물이었다. 다행히도 쿠니키다와 나카지마는 선물이 마음에 드는 듯이 잘 넣어놓고 먹겠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나카하라는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혹시나 모를 다자이의 가출에 대비해 쿠니키다와 나카지마의 전화번호를 받았고, 불신의 표본이 된 다자이는 우는 척을 하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다자이, 내일 작업 다 끝나면 와. 국수해줄게. 쿠니키다 씨랑 나카지마 씨도 같이 와서 드세요.“

배신자들이랑은 거기 안가.“

다자이의 중얼거림은 아랑곳하지 않은 세 사람은 두런두런 수다를 나누었다. 나카하라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대화를 나누다가 밤이 머리끝까지 어둠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농원을 나설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다자이가 아닌 사람과 수다를 떨어보네. 나카하라는 조금 들뜬 마음을 고이 접어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에 담아두었다. 마치 고요함과 적막 속에서 보물 찾기를 하여 얻은 즐거움 같았다. 돌아가는 길은 가로등이 군데군데 밖에 없어 길이 많이 어두웠지만, 나카하라는 걸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익숙하게 발걸음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찾던 곳이 나올 테니까. 나카하라는 겨울밤을 비추는 자신의 집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마음을 품에 안고 그리움을 비우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녀왔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나카하라는 자신을 감싸는 온기에 뺨을 녹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posted by 송화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