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안고 론리전 준비

2018. 7. 2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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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각에 협회에 남아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의학 연구실에 남아있었으니 다른 곳들은 어두컴컴한 것이 정상이라. 회의를 마친 모리는 분명 꺼져있어야 할 훈련실을 바라보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 누군가는 끄고 갔을 터인데 전부 불이 꺼진 사이에 홀로 켜진 불을 바라보던 모리는 으스스함을 뒤로하고는 훈련실의 문을 열었다.

“아... 끝났나 보군.”

훈련이 끝나 쉬고 있던 것인지 벤치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후쿠자와가 모리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리는 여태껏 집으로 가지 않고 뭐 한 거냐고 그에게 물으면서도, 협회 내에서 그를 본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후쿠자와는 그저 ‘혼자 집에 가는 걸 별로 안 좋아했던 게 기억나서.’라고 대꾸하고 흘러내리는 땀을 대충 수건에 닦아내었다.

“그래도 이렇게 늦게까지 무리하면 몸에 안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나이도 생각해하지 않겠습니까?”

모리는 그를 놀리면서도 걱정을 담은 말투로 이야기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모리가 손을 잡아오자마자 몸 군데군데 엉켜있던 실타래 같은 힘이 금세 부드럽게 풀어지며 흩어지는 것을 느끼던 후쿠자와는 자신을 도로 벤치에 앉히는 모리의 행동에 자신의 앞에 서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또 폭주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만.”

후쿠자와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준 모리는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손에 깍지를 껴왔다. 닿는 접촉면이 더 커지자 마치 얼레빗을 만난 머리카락과 같이 엉켜있던 힘들이 풀어져 나갔다. 후쿠자와는 기분 좋게 전해져오는 그의 힘에 그를 채근하듯 그대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어리광 부리는 유키치는 오랜만이군요.”

“일 터다만.”

기분이 좋으면서도 단칼에 잘라내는 후쿠자와의 말에 피식 웃은 모리는 ‘내가 그런 것을 신경 썼다면 팀원들에게 우리가 같이 산다는 말은 왜 했겠습니까?’라고 대꾸하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둘은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잠시간을 서로에게 맞닿아 있었다. 모리는 자신의 어깨에 기댄 후쿠자와가 잠든 것은 아닌지 간간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후쿠자와는 그때마다 ‘누군가 와서 들으면 볼만 하겠군.’이라 비꼬듯 말하고는 생각났다는 듯이 그에게 작은 사탕 상자를 건넸다.

“부탁한 것. 너무 많이 먹다가는 당뇨라도 오는 거 아닌가.”

모리는 ‘잘 관리 하고 있으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만? 유키치야 말로 뼈가 나가지 않게 조심해야 될듯 한데요.’라고 받아치고는 그가 건넨 상자를 받아들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일 듯이 새빨간 사탕을 하나 꺼내든 모리는 그것을 그대로 입에 넣어 굴렸다. 이와 맞부딪혀 도록도록 소리를 내는 사탕이 마음에 드는지 ‘체리 맛이네.’라고 중얼거리며 웃던 모리는 사탕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려는 듯 한쪽 눈을 감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예전보다 양이 줄었군요.”

“뭐든 예전과 같지는 않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 모리가 말하자, 후쿠자와는 가만히 깍지 낀 그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모리는 그의 말에 ‘하긴, 예전만한 것이 없긴 하죠.’라고 답하고는 연신 사탕 상자를 흔들고 들여다보며 안에 든 사탕의 수를 세었다. 상자가 흔들릴 때마다 사탕과는 다른 소리가 간간히 났지만, 둘 중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

“츄야, 좀 웃게나...”

다자이는 살벌한 표정으로 드레스 펄럭거리며 레이스가 많은 것이 짜증나는지 투덜대는 나카하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카하라는 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로, 핑크빛 립글로즈가 반짝이는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도착했다는 기사의 말에 바로 차에서 내려버렸다. 뒤늦게 따라 내린 다자이는 금세 다른 사람처럼 변한 나카하라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바라보며 경력은 무시를 못하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츄야,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 건가?”

소녀풍의 팔랑거리는 분홍색 드레스 자락을 바라보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른 다자이는, 작게 그의 귀에 속삭이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하게 빨리 걸으라는 말 뿐이었다. 다자이는 하는 수 없이 그를 에스코트 하듯 천천히 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그의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듯한 성대함이 느껴졌다. 휘황찬란한 입구에는 이미 유명 인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잠재적 범죄자들도 많네.”

나카하라의 중얼거림에 안 그런 사람도 있었냐고 우스갯소리를 한 다자이는 앞에서 초대장을 확인 하는 가드들에게 초대장을 건네고는 천연덕스럽게 ‘기대되지? 이런 파티는 처음이잖아.’라고 나카하라에게 물었다. 나카하라는 진심으로 대답해야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다자이가 연신 ‘응?’이라고 되묻는 통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엄청 화려해서 기대 되요. 올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시발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육두문자가 튀어나오지 않게 꾹꾹 누른 나카하라는 다자이를 올려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다자이는 어서 들어가자며 안은 그의 허리를 살며시 당겨오고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화려한 파티장 답지 않게 감시망이 촘촘하게 잡혀있는 내부는 누가 어디로 가든지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꽤 어렵겠는데. 카메라가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샴페인을 나카하라에게 건네며 중얼거린 다자이는, 천천히 둘러보자며 그를 에스코트 하듯 팔짱을 낀 채로 파티장 내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카하라는 파티장 구석구석을 지키고 서있는 가드들을 보고는 ‘저 안에 들어가려면 역시 방법은 하나인가.’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부탁해 칵테일 잔을 한잔 받아내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챈 것인지 ‘그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두는 편이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어이, 다자이. 그리고 이쪽이... 나카하라 여동생인가? 진짜 닮았네. 나카하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카하라를 찾던 남자는 이미 술을 꽤나 마신 것인지 얼굴이 붉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TV에서나 볼법한 모델 같은 여자가 둘에게 미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카하라는 아파서 오늘 나오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이쪽이 나카하라네요.”

웃으며 나카하라를 가리키며 말한 다자이는 미소를 지으며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츄야의 모습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거짓말은 그렇게 못하더니 이런 연기는 수준급이군. 입 밖으로 내기 뭐한 칭찬을 삼킨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아무렇지 않게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다가 잠시 마실 것이라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감시 카메라의 궤도와 촬영 범위를 생각하면 건물 내부로 침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구석구석 사각지대를 떠나지 않고 지키고 서있는 가드들과, 많은 인파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수상하게 행동하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었다.

“이러려고 내가 온 거겠지.”

천천히 인파가 적은 화장실 쪽의 복도를 걸어가던 다자이가 중얼거렸다. 다자이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화장실을 못ㅍ본 척 지나쳐 복도 끝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금세 끝날 줄 줄 알았던 복도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다자이는 이리저리 얽혀 있는 복도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며 주변 감시카메라가 일제히 향하는 방향을 확인했다. 아, 여기서 나올 때가 됐는데. 다자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엇을 찾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조금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다자이가 발걸음을 향하던 곳에서 이곳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며 그를 제지하는 가드가 복도의 끝 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여기가 화장실이라고 해서 왔는데... 화장실은 어디죠?”

당황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가드에게 물은 다자이는, 이러한 실수가 많았던 모양인지 의심없이 그대로 길을 따라 나가라고 하는 그의 말에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저 평범한 남자가 파티에 처음 와서 범할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한건지 다시 돌아 들어가는 가드를 힐끔이던 다자이는 그의 발자국 소리로 거리가 얼마나 되는 지 가늠하며 복도를 벗어났다. 다자이는 복도를 나와 테라스처럼 꾸며진 2층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1층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일을 어찌 마무리할 지 생각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이 난 것인지, 한쪽 커프스단추를 떼어내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예상외로 이야기가 쉽게 마무리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 한숨을 내쉰 다자이는 즐겁게 미소를 지으며 칵테일을 홀짝이는 나카하라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저 어색한 모습도 끝이겠군 그래. 평생 한번 볼까 말까한 미소를 응시하던 다자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드는 나카하라의 모습에 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자이가 층을 내려와 나카하라에게로 가자, 나카하라는 능청스럽게 찾아다녔다고 이야기하며 다자이의 팔에 팔짱을 껴왔다. 다자이는 애교 있게 이야기하는 나카하라의 말에 걱정 말라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미안, 길을 잃었었어. 우리 이제 춤출까?’라고 물으며 나카하라의 손을 잡았다.

“뭐 좀 찾았냐.”

인파 사이에서와 달리 거리를 둘 수 있는 무도회장에 들어온 둘은, 생각보다 능숙하게 스텝을 밟았다. 그 와중에 마음이 급한 나카하라가 먼저 다자이에게 묻자, 그는 천천히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며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 조금 당겨 안았다. 나카하라는 최대한 밀착한 뒤 다자이를 올려다보며 어서 말하라는 듯이 그의 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복잡하게 이어진 복도, 일정한 간격과 각도 마다 설치되어 사각 지대조차 없는 감시 카메라, 그리고 다자이가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나온 가드,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저택의 보안실은 다자이가 지났던 복도의 가장 안쪽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보안실이 통제가 가능하다면 정보를 빼오는 건 일도 아니라고 설명하던 다자이는 ‘그 정보가 보안실에 있을 수도 있지.’라고 답하며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나카하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런 저택에 보안실 같은 것이 있는 게 더 이상하다 중얼거리고는 작전은 몇 가지인지 물었다.

“지금은 한 가지. 원래 몇 가지가 더 있었는데 뒤처리가 거의 없는 건 이것 밖에 없어.”

‘눈에 띄면 곤란하다고 했으니 조용히 가자고.’ 다자이의 말에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그럼 이제 뭐부터 해야 하는지 물었다. 다자이는 그의 말에 아까 떼어낸 납작한 동전 모양의 커프스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고는 ‘고양이 목에 방울부터 달아야지?’라고 대답했다. 노랫소리에 천천히 리듬을 타듯 움직이던 나카하라는 그의 말에 영문을 모를 표정으로 동전을 응시했다. 가만히 동전을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다자이가 눈동자로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오는 그 남자의 모습에 도로 다자이의 어깨를 잡고 밀착해서는 ‘이런 건 좀 직접해줘라...’라고 읊조렸다. 다자이는 이 재미있는 걸 빨리 끝낼 수는 없다고 중얼거리고는 나카하라를 놀리듯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미소 지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부제-결국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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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하라와 다자이는 생각지도 못한 당사자의 연락에 나온 지 벌써 30분이 흘러가고 있었다. 앞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며 석고대죄라도 하는 것일까, 다자이는 정적을 참다못해 ‘오다사쿠, 무슨 일이 있는 건가?’라고 물었다. 오다는 그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녹아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손에 쥔 채 고민하던 그는, 답답하다며 어서 말하라는 나카하라의 추궁에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겨우 떼었다.

“내 생각이지만... 안고가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다. 둘은 안고와 같은 학교이니 힘든 일이 있으면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오다의 진지한 말에도 불구하고, 나카하라는 어련하겠냐는 표정을 지은 채로 한숨을 내쉬며 빨대를 잘근거렸다. 다자이는 차마 겨우 그것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있었는지 물을 수 없어 그에게 ‘안고? 별일 없는 줄 알았는데. 오다사쿠가 알아챌 정도면 무슨 일이지?’라고 되물었다. 오다는 다자이의 물음에 한숨과 함께 천천히 몇 가지 정황을 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카구치는 비록 아침과 점심은 회사를 다니는 오다와 먹지 못하니 수업이 끝나고 저녁만큼은 그와 같이 먹곤 했는데, 요즘은 계속해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며 식사 자리를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왔다고 말해도 눈길 한번을 안 주고, 자신이 들어오지도 않은 초저녁인데 먼저 잠자리에 들어버린 적도 횟수가 많아지고 있으며, 게다가 주말마다 어딘가 가기 시작한 듯한데, 행선지를 물으니 얼버무리며 나간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마치 드라마에서나 봤던 바람피우는 애인의 정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그의 설명이 믿기지 않는지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오다사쿠...그게... 내 생각에는 안고가...”

“바람피우는 거 아니냐.”

선수 치듯 다자이보다 먼저 말한 나카하라의 말에 미간을 좁히던 다자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고지식한 사카구치가 그런 행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셋 중 아무도 없었지만, 늦바람이 무서운 것이니 나카하라와 다자이는 말을 아낄 뿐이었다. 오다는 둘의 대답에 놀란 듯 보였지만, 그저 ‘안고가 그럴 리가. 분명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겠지.’라고 대답하고는 장난을 받아주듯 가볍게 웃어보였다. 나카하라와 다자이는 자신들의 말을 장난이라는 듯이 받아치며 웃는 그의 모습에 더욱 심각해져갈 뿐이었다. 분명 오다가 말한 정황들은 그런 오해를 하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연인을 굳게 신뢰할 뿐인 오다의 마음에 금이 가게 하기는 싫었던 다자이는 ‘그래, 바람일리 없지. 무엇하면 안고에게 물어보게나.’라고 말하며 지어지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지어보였다.

“너희들도 바쁠 텐데 내가 실례했군. 그래 다자이, 네 말대로 직접 물어보는 편이 훨씬 간단할 것 같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속 시원한 표정이 된 오다는 둘에게 연신 고맙다며 인사했다. 비록 그의 이야기를 들은 둘은 마음에 천근만근이 된 뒤였지만 말이다. 나카하라는 ‘야... 이런 일로 다시 불러내면 알아서 해라 진짜...’라고 대꾸하면서도 속에 담아놓은 말을 꺼내지 못해 답답한 것인지 입술을 잘근거렸다. 오다가 회사 일로 먼저 돌아가고, 둘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누가 먼저랄 새 없이 사카구치를 봐야겠다며 핸드폰을 꺼냈다.

***

“오늘은 안 됩니다.”

단호한 것이 평소의 사카구치와 다름이 없었다. 다자이는 ‘정말?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 했는데.’라고 말하며 천연덕스럽게 그를 불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카구치는 전화상으로도 그의 시커먼 속내가 느껴지는 것인지 ‘다자이씨, 당신이랑은 뭐가 되었든 안 먹습니다.’라고 대꾸하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급하게 찾아봐야할 자료 때문에 도서관으로 가던 그는, 뜨겁게 내리쬐는 땡볕에 닿지 않도록 최대한 그늘로 돌아서 길을 걸었다. 사카구치는 원래도 체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요새 들어 쉽게 지치는 탓에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도서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사카구치는 졸업 논문 때문인 건지 두꺼운 책들을 양팔 가득 끼고 있는 나카하라의 모습에 ‘나카하라씨가 도서관에서 보이시니 익숙지가 않네요.’라고 인사대신 장난 가득 섞인 말을 던졌다. 나카하라는 시비조가 아닌 장난이 가득한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그러는 너야말로 도서관 밖에서 보는 게 얼마만이냐.’라고 받아쳤다.

“점심먹자고 전화했는데 계속 통화 중이더라?”

“말도 마세요. 다자이씨가 무슨 속셈인지 자꾸 저녁먹자 해서 혼났습니다.”

둘은 도서관 로비 앞에서 두런두런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잠시간 더위를 피했다. 나카하라는 손부채질로 땀을 식히며 졸업 논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카구치에게 ‘오다는 잘 지내냐?’라고 물으며 화제를 바꿨다. 사카구치는 그의 물음에 이상한 낌새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미소 지었다.

“요새 자주 일찍 들어 와줘서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오기 전에 와있다니까요.”

애인자랑을 섞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사카구치의 모습에 나카하라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최대한 정리하려 힘썼다. 오다의 걱정과는 전혀 다르게 사카구치는 서로의 관계에 동요하지도 않는 모양새였다. 나카하라는 설마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 미묘한 차이는 자신이 알아채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나카하라가 생각을 구겨 넣은 이불과 같이 정리 했을 무렵, 사카구치는 그에게 다자이와는 잘 지내는지 물었다. 나카하라는 그의 물음에 잠시 버퍼링이라도 걸린 화면과 같이 그를 바라보다 겨우 웃음 섞인 대답을 꺼냈다.

“나? 나야 언제나처럼 지내지. 우리는 그렇게 싸우면서도 잘 지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너야 말로 무슨 일 있으면 꼬박꼬박 말해. 오다한테 못 말하겠으면 나한테라도 말해도 되니까 담아두지 마라.”

그의 마른 등을 토닥이며 말한 나카하라는 시간 뺏은 거 아니냐며 그를 어서 도서관에 들어가게 했다. 사카구치는 의외로 든든하게 와 닿는 그의 말에 고맙다며 작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천천히 도서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이상해보이지는 않았을까, 자꾸 캐묻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을까 걱정을 쌓아가며 그와 등져 걷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오늘 오다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에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을 하며 걷던 그는, 갑자기 뒤에서 붙잡는 인영에 놀랄 틈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하아...나카하라씨 저녁에 시간 되십니까?”

그 짧은 거리를 뛰는 데도 숨이 찬 것인지 천천히 숨을 고르던 사카구치의 물음에 나카하라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시간이 있다는 대답을 했다. 사카구치는 그럼 저녁이라도 먹자고 나카하라에게 제안하며 자료 조사가 끝나면 전화라도 달라며 그에게 전화기를 가리켜보였다. 나카하라는 이게 잘 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도서관에 들어가는 사카구치를 응시했다.

***

사카구치와의 식사는 대부분 서로의 연인을 대동하여 먹는 저녁식사였다. 이렇게 단 둘이 먹은 식사는 손에 꼽았는데, 나카하라는 그래서인지 사카구치의 의도를 파악하기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 속이 안 좋아져서 그만...”

나카하라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죽 메뉴판을 바라보며 자신도 죽을 좋아하니 상관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이제 저녁 먹으면서 은근슬쩍 오늘 있던 일을 꺼내면 되는 거야. 속에 꼭꼭 담아두는 것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다고 생각하던 나카하라는,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만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제가 요즘 고민이 있어서요.”

나카하라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릴 수도 있었을 무렵,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머뭇거림과 함께 입을 뗀 사카구치의 이야기에 나카하라는 ‘응?’이라고 되물었다. 다자이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나. 다시금 혼란스러워지는 나카하라의 머릿속은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알아. 근데 우리 나이 때에는 그런 사람 많잖냐.”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나카하라가 후회하고 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나카하라는 스스로의 입을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더는 이상한 말을 뱉지 않도록 입술을 잘근거렸다. 하지만 그의 대답이 정곡을 찌른 듯이 놀란 얼굴을 한 사카구치는, 그에게 ‘알고 있으셨던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나카하라는 말라가는 입 때문인지 물을 연달아 두 번을 따라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아. 우리 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오다한테만 잘 설명하고 정리하면 되지.”

달래듯이 이야기하는 나카하라의 말에, 사카구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숙였다. 나카하라는 그 모습이 괘씸하면서도 벌써 몇 년 째 오다와 사귀어왔을 그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다독여 주었다.

“나카하라씨는...제가 임신한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그래서 너 그 알파는 언제부터 만난 거냐?”

서로 동시에 입을 떼어 질문했다. 겹쳐 들린 단어 사이사이가 더욱 둘을 어지럽게 만든 것인지, 둘은 누가 먼저랄 새 없이 무슨 말인지 되물어왔다. 사카구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카하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제가 임신한 거 알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나카하라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잖아, 망할 다자이! 속으로 다자이를 욕하며 얼버무릴 말을 찾던 나카하라는 ‘혹시 다자이씨도 알고 계신 겁니까?’라고 재차 물어오는 사카구치의 물음에 고개를 거세게 저어보였다. 사카구치는 그의 대답에 안심이라도 한 것인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확실해지면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직 졸업도 못했고... 약하다는 말도 많이 들어서 처음에는 유산될 줄 알았으니까요.”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안고의 모습에 의심했던 자신 스스로를 때리고 싶다고 까지 생각을 한 나카하라는 ‘그래, 많이 먹고 힘내라. 그래도 오다한테는 빨리 말하는 게 좋겠다. 걱정하니까.’라고 말해주며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사카구치는 안 그래도 빠른 시일 내에 말하려 했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자신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입도 뻥긋하지 말아 달라 나카하라에게 협박성이 짙은 부탁도 했다. 나카하라는 알겠다고 말하면서도 아직까지 그가 바람을 피운 흔적을 찾아 헤매는 다자이를 생각하다 한숨을 내뱉었다. 무거운 비밀 덩어리가 가슴에 얹어진 기분이었다.

***

사건은 결국 넷이 만나기로 한 술자리에서 벌어졌다. 물론 부른 것은 넷이었지만, 사카구치는 남은 일이 있다며 불참한 자리였다. 오다는 ‘졸업 논문 때문에 이래저래 바쁜 모양이더군.’이라 말하며 그가 나오지 못한 것을 재차 설명했다. 나카하라는 답지 않게 건강을 챙긴다며 쪽잠을 자며 하는 그의 모습이 기억나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에-.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시킨 칵테일을 휘휘 저어대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한 다자이의 물음에 나카하라는 심장에 돌덩이가 더 얹어진 기분이었다. 저 화상이. 오다는 ‘다자이,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 아닌가?’라고 말하며 그의 악의 담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기도 전에 그를 저지했다. 물론 나카하라도 그의 옆에서 생사람은 잡지말자며 다자이가 더는 말하지 못하게 말렸다.

“하지만 오늘 낮에 안고가 다른 남자랑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봐서 그런지 계속 의심되는걸.”

“야, 너 진짜... 의심할 걸 의심해라. 걔 진짜 아니야.”

나카하라는 도가 지나쳐 가는 다자이의 발언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카하라의 부정에도 다자이는 ‘서로 이야기 나누다가 언제 다시 보자고 하던데, 이번에는 학교 밖에서 보자고 하더라고?’라고 자신이 본 장면들을 오다에게 술술 불어대었다. 나카하라는 답답하다는 말로도 모자라게 꽉막혀있는 가슴을 치며 전부 뱉어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제발 함구해 달라고 말하던 사카구치의 부탁 아닌 부탁이 떠오르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랠 뿐이었다.

“또 누가 알아. 둘이 이미 사귀고 있을 줄. 그치, 오다사쿠?”

다자이가 놀란 얼굴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오다에게 흑심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과 동시에, 나카하라의 맥주잔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다자이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빗겨지나가 테이블에 큰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야! 내가 아니라고 하잖아! 왜 자꾸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다니는 거야 그 자식 진짜 오다밖에 모른다고.”

“그러는 츄야도 저번에는 나랑 같이 의심하더니, 뭐라도 본거야?”

나카하라는 정곡을 찌르며 치고 들어오는 다자이의 물음에 입에 꿀이라도 발라 붙인 듯이 입술을 닫아버렸다. 아무런 대답을 못하는 나카하라의 모습에 ‘봐, 츄야도 딱히 믿는 구석은 없는 거 아니야?’라고 대꾸하고는 오다에게 자신이 가진 심증을 더욱 내비치기 시작했다.

“에이씨... 야, 진짜 아니라고. 정말이라니까? 야, 오다 니도 쟤 말만 듣지 말고 뭐라고 좀 해봐!”

“근데 츄야는 어디서 뭘 봤기에 자꾸 아니라고 하는 건가? 궁금하네.”

나카하라는 깐죽거리는 말투로 ‘응? 뭐 더 확실한 거라도 본 건가? 아니면 그냥 든 생각인건가? 설마 후자는 아니겠지?’라고 연신 자신에게 묻는 다자이의 미간에 주먹을 꼽아 넣고 싶다 생각하며, 말을 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머리를 헤집으며 앓듯이 신음했다.

“응? 츄야, 신빙성이 없으니 꼭꼭 숨기며 아무런 말 안하는 거 아닌가?”

이젠 사카구치의 문제를 떠나 다자이와 나카하라의 싸움같이 되어버렸다. 오다는 사이에서 둘을 저지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불이 붙을 대로 붙은 기름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카하라는 진정하듯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오겠다며 자리를 잠시 떠났다. 오다는 ‘네가 심했다. 다자이.’라고 말하며 반쯤 남은 술을 그대로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야, 둘 다 따라 나와.”

술기운 때문인 것인지, 다자이의 놀려서인지 열 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던 나카하라는 오다와 다자이에게 따라오라 말하고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오다와 다자이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가며 그저 궁금증만을 키워갈 뿐이었다.

***

“아니, 술 먹고 헛소리하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전부 데리고 오신 겁니까. 참 고맙습니다.”

“야, 그래도 네 약속 안 깼다? 나, 입도 벙긋 안했다고.”

오다와 다자이는 영문 모를 말들을 하며 투닥거리는 나카하라와 사카구치를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나카하라가 둘을 데려온 곳은 오다와 안고가 같이 사는 빌라였다. 오다는 연신 나카하라와 투닥대는 사카구치를 바라보다 그를 부르며 일단은 자리에 앉혔다. 그가 중재하자, 언제 투닥대기라도 했었냐는 듯 둘은 조용해 졌다.

“일단... 내가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며칠 전, 다자이와 나카하라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이야기, 그리고 서로 나누었던 말들을 그에게 전했다. 그에 대한 상황 설명과 더불어 의심한 것마저 사과한 오다는 ‘안고, 내게 말 할 것이 있다면 숨기지 말아줘.’라고 말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모은 손을 꽉 쥔 사카구치를 가만히 응시했다. 사카구치는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심호흡을 하고는 잠시 물건을 가지러 가겠다며 일어났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다자이가 뭔가 있다며 중얼거린 탓에 나카하라는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입을 다물게 했다. 오다가 들고 나온 것은 수첩과 작은 막대였다. 산부인과에서 처음으로 나눠준 임신수첩과 검사 스틱. 오다와 다자이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 튀어나와서인지 그저 그것과 사카구치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처음 갔었을 때, 착상이 제대로 안 되서 유산 할 거라기에 말을 안 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잘 뱃속에 있다고 합니다.”

앞뒤를 다 잘라먹고 한 말임에도 그들 중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오다는 그대로 그를 끌어안으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고, 다자이는 ‘츄야만 이렇게 큰일을 알고 있었던 거라니 좀 자존심 상하는데.’라고 투덜거리며 사카구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평소 행실을 생각하세요, 다자이씨.”

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오다를 토닥이던 사카구치는 다자이에게 쏘아붙이며 바로 앞에 보이는 그의 이마에 입 맞춰 주었다. ‘설마 우는 건 아니죠?’ 장난기가 섞인 말투로 말하며 웃은 사카구치는 고맙다와 미안하다를 연신 중얼대는 오다에게 ‘저도 늦게 말해서 미안해요. 많이 사...사랑하니까 뭐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채로 웃어보였다. 오다는 그가 웃는 모습에 그대로 입술에 입 맞춰오며 그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둘의 기쁨에 젖은 애정표현을 같이 기쁜마음으로 바라보던 다자이와 달리, 나카하라는 이럴 거였으면 사람 답답하게 숨기지 말고 그냥 말하지 왜 사람을 고생 시킨 것인지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저 둘의 행복한 시간을 위해 소파에 기댄 채로 행복해 보이는 둘을 바라보며 다 잘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posted by 송화우연

어제 '계절의 한조각을 잘라내었다,' 라는 진단에서 나온 사과 무스와 오늘 진단의 말차 몽불랑을 넣어 글을 썼습니다. 오다안고 제발 행복하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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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주는 눈인사와 작업 중인 자신을 힐끔거리는 눈빛, 그리고 그 다음 주의 첫 날은 아망드 쇼콜라. 두 번째 날은 레몬 마들렌, 세 번째 날은 피스타치오 마카롱과 라즈베리 마카롱, 그리고 벌써 찾아 온지 한 달이 된 지금은 온전한 케이크 한 조각이 서비스로 나왔다. 정성이 가득 들어간 듯 보이는 무스케이크를 가만히 바라보던 제철인 사과 무스라며 설명을 해주는 알바생을 보던 사카구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다시 알바생에게 접시를 건넸다.

“저... 항상 챙겨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러면 제가 죄송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에이, 선생님께서 항상 찾아와 주셔서 사장님도 기쁜 마음에 준비하시는 걸요. 죄송해하실 필요 전혀 없어요!”

밝게 웃으며 손을 내젓는 알바생은 사카구치의 은근한 사양에도 불구하고 접시를 그대로 그의 앞에 둔 채로 카운터로 돌아갔다. 오늘은 조금 이르게 주방 일을 마친 것인지 카운터에 나와 있던 사장은 알바생이 밝게 웃는 것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사카구치는 건네받은 사과 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철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캐러맬 때문인지 장식 된 슬라이스 사과는 보기 좋은 금빛을 띄고 있었다. 사카구치는 뭔가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라도 된듯 마음이 무거웠다. 알바생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사장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무거운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가만히 사과 무스를 바라보던 사카구치는 차마 무스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카운터 쪽을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친 남자는 특유의 옅은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그런 그에게 서비스직의 미소를 지으며 마주 고개를 까닥인 사카구치는 심란해진 마음으로 포크를 들었다. 아삭거리는 슬라이스 사과를 포크로 조심히 입으로 가져간 그는, 겉에 입혀진 캐러멜이 사과를 더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디저트를 음미했다. 부드러운 커스터드와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사과 조각,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바삭한 크럼블의 조화가 잘 어울려진다고 생각하던 그는, 무스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시 한 조각을 잘라내 입에 담았다. 점점 사라져 간다는 것이 아쉬울 무렵, 눈이 마주친 남자는 가만히 디저트를 먹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카구치는 마주친 눈을 피할 새도 없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마주하는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그 남자 쪽이었다. 남자는 무안하게 시선을 밑으로 깔고는 사카구치의 시선이 거두어질 때까지 이리저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졌다. 사카구치는 어린 아이처럼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의 모습이 답지 않게 귀엽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자네에게 수작 부리는 것 같다고?”

“아니...수작까지는 아니고... 그냥 관심은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야, 그 사람도 그 사람인데 니도 관심 있는 것 같은데?”

‘뭐... 관심정도야 가벼운 거죠.’ 오랜만에 모인 나카하라와 사카구치, 다자이는 맥주를 홀짝이며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았다. 그 와중에 그들의 시선이 모인 곳은 연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카구치의 새로운 연애 근황이었다. 사카구치는 그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손을 내저어 보였지만,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은 하이에나들은 그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잘 생겼나?”

“네 취향이냐? 아니 근데 너도 취향이라는 게 있었구나.”

“그거 실례입니다만.”

사카구치는 그들의 집요한 질문에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집 근처에 연지 1년이 넘어가는 카페의 주인이었는데, 사카구치가 작업을 하기위해 방문 할 때마다 주문한 음료 외에 서비스를 많이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생각보다 별거 없는 이야기에 다자이는 사카구치가 전혀 잘 못 짚었다는 듯이 손을 내저어 보였다. 다자이는 ‘그 정도는 단골이라면 충분히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안고도 이런 거에 두근거리면 어쩌자는 건가?’ 라고 말하고는 관심이 떨어졌다는 듯이 안주로 나온 마른 오징어를 질겅거렸다. 나하라는 그런 다자이의 불량한 태도에 더 들어보기라도 하자며 그의 어깻죽지를 아프지 않게 때려 그를 일으켰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그런 서비스를 한 달 내내 주는 가게는 본 적 없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첫 일주일은 그저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매일 같은 시간 나오는 구운 과자들과 케이크들을 진열하던 그는, 사카구치가 들어오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큰 덩치에 검은색 린넨 앞치마를 걸친 것도 잘 어울리던 남자는, 그가 오면 직접 원두를 갈아 드립커피를 내려 주었다. 원래 직접 전부 하시는 거냐고 물을까 했으나, 주방에서 나온 알바생이 ‘사장님, 지금 머랭이 죽어가는 데요?’라는 말에 허둥지둥 주방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원래 그가 있을 곳은 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네가 오면 항상 카운터에 나와 있다는 거지? 거참 얼굴 좀 보고 싶네.”

사카구치는 나카하라가 구운 오징어를 가위로 석둑석둑 잘라내며 하는 말에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보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물었다. ‘뭐 내가 어쩔게 있나, 그저 우리 안경 선생이 좋다는 남자 얼굴만 봐도 흑자지.’라고 대꾸한 나카하라는 자신이 대신 말을 전해줄까라고 묻는 다자이에게 허튼 훼방 놓지 말라 경고했다. 사카구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연애가 전부 이렇다면 절대 사양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새 맥주 캔을 땄다.

“뭐, 만일 그게 안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해도 안고가 좋다면 한번 밀어보는 것도 좋지 않나?”

‘그러다가 몸정 먼저 들 수도 있지만-.’ 손이 심심했던 것인지 땅콩을 하나하나 까기 시작한 다자이가 태평하게 이야기하자 나카하라가 그의 등짝을 아프게 내려쳤다. 안고는 잘했다며 더 때리라고 말하고는 ‘그게 쉬웠으면 벌써 사귀었습니다.’라고 무던하게 대꾸했다. 특히나 사람 만나는 일이 적은 작가이다 보니 항상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그였다. 새로운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었던지 기억을 더듬어보던 사카구치는 업무 차원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있지도 않았던 지라 생각을 빠르게 접었다.

“뭐... 그래 너도 좀 사람 만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렇게 방구석 폐인이 안 되려고 밖에 나가서 작업하는 거 아니었냐?”

나카하라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사카구치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정곡을 찔린 사카구치는 나카하라에게 ‘그래도 일은 빈틈없습니다. 마감도 꼬박꼬박 맞추는데 작가의 소양은 이정도면 합격 아닙니까.’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카하라는 맞는 말에는 동의를 해주어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도, 좋은 글을 위해서 경험한다고 생각하지 안고?”

“제가 뭘 쓰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다자이씨.”

인기 미스터리 수사물 작가 사카구치 안고는 ‘그 남자가 다음 용의자로 점찍어둔 남자입니까.’라고 장난스레 물으며 피식 웃었다. 사카구치의 답지 않은 장난에 같이 키득거리며 웃은 나카하라는 후속 작품으로 연애 소설이라도 써보라며 그를 부추겼다. 사카구치는 나카하라의 시시껄렁한 말에 웃으며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손을 내저어보였다. 사카구치는 거의 빙가는 맥주를 홀짝거리며 진짜 연애 소설을 쓰기 전에 그 남자와 단판이라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은근하게 넘어간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다자이와 나카하라의 말을 경청했다.

***

“오늘은 좋은 밤이 들어와서 말차 몽블랑이시라고 하시네요. 저도 아까 먹어봤는데 밤이 정말 맛있어요!”

사카구치는 특유의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는 알바생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또 뭔가 거창한 게 나왔다. 사카구치는 그가 건네는 접시를 바라보며 이걸 어쩌면 좋은지 부터 생각했다. 보드라워 보이는 아래 케이크의 위에는 진한 말차의 색을 담고 있는 크림이 꽤나 정성을 들인 것인지 가지런한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저... 성함이...”

“아, 나카지마입니다.”

꽤나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던 알바생은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실까요?’라고 사카구치에게 되물었다. 사카구치는 가만히 접시에 담긴 몽블랑을 바라보다 마음을 다잡기라도 하는 듯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다시 나카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사장님 좀 불러주시죠.”

나카지마는 사카구치의 부탁이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그런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카구치는 당황하여 자신의 말을 확인하려는 듯이 ‘네?’라고 반문한 나카지마에게 다시 사장님을 불러 달라 부탁한 뒤, 몽블랑 접시를 자신의 앞에 놓았다. 나카지마는 최대한 빠르게 주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카구치가 커피를 홀짝이고 있을 무렵, 주방 안에서는 조금 큰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지 굳이 돌아보지 않은 사카구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하며 가을 낙엽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부르셨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무던했다. 사카구치는 급하게 나온 것인지 뺨 안쪽에 미처 지우지 못한 밀가루 자국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사카구치가 앉으라고 이야기하자,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앞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남자는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그저 카운터 쪽 나카지마만이 시선을 던지는 그에게 응원의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사카구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짙은 초록빛의 말차 몽블랑을 응시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시다면... 제가 바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몽블랑이 문제라고 생각한 것인지 죄인처럼 앉아있던 그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사카구치는 그런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인지 몽블랑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성함, 어떻게 되실까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남자는 불안함에 모으고 있던 큰손을 꼼지락거리며 ‘오다 사쿠노스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다씨, 제가 여기서 먹은 디저트 값만 해도 꽤 나가겠더군요. 오다씨의 솜씨가 나쁜 것도 아니어서 더 죄책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려고 드린 것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사카구치는 뒤의 말을 잇지 못하며 마치 혼나는 아이라도 된 듯 고개를 숙이는 오다를 바라보며 정말 답지 않은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커피를 홀짝이던 사카구치는 포크를 들어 과감하게 말차 몽블랑을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아직 말차가 섞이지 않아 흰 부분의 크림이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아 내렸다. 안고는 역시 맛있다며 중얼거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고수하려 하며 그에게 ‘그래서 그런데, 언제 퇴근 하시나요?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어서 여쭙는 겁니다.’라고 먼저 선수를 치듯이 물었다. 오다는 그의 질문에 놀란 듯이 고개를 퍼득 들었다. 안고는 다시 몽블랑을 크림과 가득 떠 입에 넣고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야...카페가 끝나면...아니 지금도 될 것 같습니다.”

귀를 이쪽으로 집중하고 있던 것인지 나카지마가 멀리서 그에게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다녀오라고 그에게 전하는 모습을 힐끔이던 오다는 그에게 ‘저는 언제든지 괜찮습니다.’라고 대답을 바꾸었다.

“제 이름은 사카구치 안고입니다.”

그가 만든 단 것에 길들여지기라도 한 건지 움직이는 포크를 멈추지 못하고 말한 사카구치는, 오다를 마주보며 ‘주신만큼 식사를 대접할 생각이니까 사양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했다. 경고조인 말투였지만 그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오다는 손을 뻗어 그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 주고는 ‘저야말로 사양하기 싫습니다만.’이라 대꾸하며 평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간 가까워진 얼굴과 큰 손에 놀란 것인지, 다른 두근거림 때문인 것인지 얼굴을 붉힌 사카구치는 ‘무엇을 드려도 잘 드셔주셔서 기분이 좋았습니다.’라는 오다의 말에 대답 없이 몽블랑 안의 밤을 한입에 넣어버렸다. 포슬포슬, 가슴에서 흩어지는 조각들이 무엇인지 알아가던 그는,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에 입을 열수가 없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오늘은 주로 다자츄네요. 아직 사귀지도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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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에게 보고를 마친 나카하라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힘없이 의자에 기대 있었다. 고개까지 젖히니 영락없는 시체 같다고 생각하던 다자이는 한숨만을 푹푹 쉬는 나카하라에게'지원자라도 받았으면 좋겠는데. 일반인은 없는 건가?'라고 물었다. 나카하라는 다자이가 입을 열자마자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너는 닥쳐. 보스가 더 이상 기밀 임무에 인원 늘려서 일 벌리지 말고 있으라 하시니 말이야. 오다라도 데려다가 쓰란다.'라고 말하며 엄지손톱을 잘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다사쿠라도 여동생 역할을 시키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카하라의 기분이 좋아지라고 한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자이의 농담은 역효과였다. 제발 조용히 하고 있으라고 말하던 나카하라는 입을 열 힘도 없는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으로 위협을 대신했다. 이제는 아예 책상에 머리를 대고 엎드린 나카하라는 차라리 위험 지대에 파견 되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위장으로 쓰이는 핸드폰이다 보니 그저 남자에게서 온 연락이거나 광고 전화일게 분명하다 생각하며 가만히 휴대전화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는 전화를 무시할지, 아니면 받을지 고민을 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쥬세이입니다."

"츄야군, 역시 오다군은 조금 무리일 것 같으니 츄야군이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네. 일단 훈련에서 돌아오는 요원 중 차례대로 지원을 알아보고 있으니 힘써주게나."

'일반전화이니 이만 끊겠네. 코요가 도움이 필요하면 세이프 하우스에 들리라더군. 고려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카하라가 대답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 모리의 전화는 나카하라의 걱정만을 키울 뿐이었다. 원망스럽게 끊긴 전화를 바라보던 나카하라는 신경질 적으로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지고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다자이를 향해 따라오라 말하며 기숙사를 나섰다.

***

"보스, 제가 가봤자 여동생은 무립니다만."

"그 정도는 나도 안다네. 그저 긴장 풀라고 농담한거니까 말이야."

'오다군이 여동생이라니 전혀 위장이 안 되지.' 모리는 손사래를 치며 웃고는 오다에게 걱정 말라고 이야기 했다. 그에 반해 오다는 모리와 다자이 사이에 끼어 고생하고 있을 나카하라의 얼굴이 생생한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업무 보고를 마쳤다. 새로 발견된 가이드가 도주 중 생포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모리는 듣던 소식 중 제일 반가운 소식이라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 또한 평범하게 지냈던 대학원생이었다. 대부분의 가이드나 센티넬은 청소년기에 발현되어 시설로 보내지는 것이 대부분이니 이 나이 대의 초기 발현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다자이도 그렇고... 요 몇 년 사이에 성인 발현이 늘었군요. 가이드이던 센티넬이던 말입니다."

"그만큼 세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거겠지. 그렇다고 청소년 발현자가 줄어든 것도 아니지 않나."

안정제를 맞은 그는 의학실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원체 몸이 약해 주기적으로 받곤 했던 정밀 검진에서 가이드 판정을 받은 그는,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그를 데리러온 요원들을 피해 달아나서는 종적을 감추었었다. 작전부는 다자이의 도움으로 몇날 며칠 동안 위성사진을 찾은 결과 그를 생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워낙에도 말랐던 몸이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도망 다닌 흔적으로 가득 했다. 모리는 의학팀에게 최대한 치료를 부탁하고는 깨어나거든 전부 나가있으라 명령한 뒤, 보고를 하러 온 안고에게 그의 상태를 물었다. 센티넬과 같이 안정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 사람과 확연히 달라진 힘과 파동이 그에게 혼동을 주며 정신 착란까지도 갔을 수 있다고 설명하던 안고는 그의 몸에 치료되지 못해 잘게 남은 상처를 응시하며 요원들에게 쫒긴 경험도 스트레스에 한 몫 했을 거라 말했다.

"그러게 다자이처럼 다짜고짜 잡으러만 가면 안 됐는데 말이지. 시간이 워낙 없다보니 실수 했군."

모리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책임자를 적는 란에 스스로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차라리 센티넬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리는 '아쿠타카와군이 잘 버텨줘서 다행이군.'이라 중얼거리고는 사카구치에게 그의 유전 정보를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사카구치는 미리 준비해둔 아쿠타카와의 유전 정보가 띄워진 화면을 넘겨주며 그에게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했다.

“변하기 시작한 세포와 아직 남아있는 세포가 공존하고 있어 아직 불안정 합니다. 성인 발현이기에 이 부분은 시간이 좀 걸릴 듯 합니다.”

흥미롭다는 듯이 세포들이 떠다니는 화면을 바라보던 모리는 ‘불안정하다면 기다려야겠지.’라고 중얼거리며 그의 신체 구조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사카구치는 ‘기다린다 해도... 직접 받아들이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니 여유롭게 잡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직접 해결 방안을 만들 수 있는지 묻는 모리에게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풀어보지 않은 문제이지만 분명 어떻게든 해답은 찾아 낼 것이다. 하지만 사카구치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리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지 입술을 차마 쉽게 떼지 못했다.

“자네라면 분명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모리의 은근한 부추김에 다시 시선을 피하며 미간사이에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린 사카구치는 마지못해 ‘한 번 해보겠습니다만... 가능 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리는 마지못해 한 그의 대답에 웃으며 ‘너무 심각한 것 같군, 안고 군. 그저 새로운 분야를 연구한다 생각하면 되지 않나?’라고 되물으며 아쿠타카와가 누워있는 산소 탱크를 최대한 어둡게 만들었다.

“그저...요즘 생각할 것도 많고 신경써야할 문제들도 많아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마치 무거운 짐 위에 짐을 더 얹은 듯한 부담감이 몸을 답습하는 듯 했지만, 사카구치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최대한 괜찮은 말로 포장하여 어물쩍한 상황을 넘겼다. 비밀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보니 의심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쉬이 의심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왜인지 묻는 다고 하더라도 그의 보안 등급이 자신보다 훨씬 위인만큼 말 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리라. 사카구치는 ‘고맙군.’이라고 대답하며 미소를 지어보이는 모리를 바라보며 마지못해 마주 미소 지은 채로 아쿠타카와의 병실을 나왔다.

***

잔뜩 짜증이 난 채로 건물을 나오던 나카하라는, 위장임무 철직을 잊지는 않은 모양인지 건물 밖을 나서자마자 숨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선한 얼굴을 한 채로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그 뒤를 따라오던 다자이는 빠르게 나가는 그를 성큼성큼 따라가며 발걸음을 맞추었다.

“쥬세이-, 어딜 가는 지는 말을 해줘야지 않겠나.”

위장용 이름으로 나카하라를 부르며 뒤에서 어깨동무를 한 다자이는 고개를 숙여 ‘츄야, 세이프 하우스로 가는 건가?’라고 작게 속삭여 물었다. 나카하라는 목덜미에 닿은 그의 팔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오랜만에 닿는 자신의 힘이 없이 눌러왔던 욕구를 풀어내자 그가 어깨동무를 한 팔을 쳐내고는 그보다 앞서 걸어 나갔다.

“아, 요즘 못했더니 조절이 안 되는군. 미안해.”

다자이의 사과에 ‘필요하면 재깍재깍 이야기해. 그 정도로 담아두지 말고.’라고만 대꾸했다. 다자이는 들키기 싫었던 모양인지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려버리고는 빠른 속도로 캠퍼스를 벗어나는 그와 발걸음을 맞추지 않고 조금 떨어져 그의 뒤를 밟았다. 모퉁이를 돌고, 다시 상점가 쪽으로 향한 뒤, 사람이 점점 사라지자 다시 모퉁이를 돌아 상점마저도 없는 주택가로 들어섰다. 복잡하게 얽힌 경로로 가는 통에 그를 놓칠까 싶던 다자이는 그대로 나카하라의 뒤통수에 시선을 두었다. 다자이는 꽁지머리로 묶어놓았던 머리가 풀어져가는 것도 모른 채로 열심히 걸어가는 나카하라의 모습이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펭귄과 비슷한지, 아니면 사막을 횡단하며 영역을 정비하는 햄스터와 같은지 고민했다. 그렇게 다른 생각에 잠겼을 무렵, 타운하우스가 몰려있는 주택가로 들어가는 나카하라를 놓칠 뻔 한 다자이는, 조금 느려진 그의 옆으로 걸어가 다시 발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누님이 오신 거라면 역시 하나인가.”

주택가이지만 가장 안쪽이라 입주민조차 드문 곳, 알록달록한 타운하우스의 끝자락에 동떨어진 주택 한세대가 가장 안 쪽 숲의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둘은 익숙하게 도어락의 번호를 풀었다. 나카하라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이미 예상한 것인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한숨으로 막막한 심정을 풀어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잡입 할 거고. 이번 일 틀어지면 너나 나나 같이 죽는다.”

‘그리고 이번 임무 중에 사진 찍지 마. 찍으면 너만 죽여 버린다.’ 나카하라의 으름장에 고개를 끄덕거린 다자이는 미리 구비해두었던 정보 처리용 초소형 카메라를 어쩌면 좋을지 생각하며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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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구치 안고는,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침대 옆자리에 누워 있는 누군가의 인영에 눈을 비볐다. 아직 깨지 않은 잠과 얽힌 현실이 와 닿지 않는 것인지, 그는 안경을 끼고 덩치가 있어 보이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뒷모습, 붉은 빛이 도는 머리칼도 그의 것이 분명했다.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 그는, 손을 뻗어 상의를 입지 않은 남자의 등을 쓸어보았다. 따뜻하게 손끝으로 닿아오는 체온이 현실감이 느껴지자, 안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옆에 앉은 낯선 남자의 곁에서 천천히 떨어져 침대 옆에 넣어둔 총을 찾기 위해 뒤적거렸다.

안고? 오늘은 쉬는 날이니 자도 될 텐데 말이지…”

잠이 가득 묻어나는 낮은 목소리가 남과 동시에 사카구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일리가 없잖아. 호신용 총을 찾기 위해 허공을 휘젓던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사카구치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뒤척거리던 남자는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고는 그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물론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사카구치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굳어버렸다.

사쿠노스케씨…”

분명 그가 떠난 지 10년째 되던 어제, 항상 그러던 대로 하루만이라도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린 탓일까. 아니라면 역시 열심히 대가를 신께서 주신 것일까. 사카구치의 머릿속에서 차마 전부 담아내지 못한 생각들이 뒤엉켜 그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알리 없는 오다는, 다시 그를 끌어안으며 조금만 자고아침 해줄 테니까조금만 참아 , 안고…’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10년이 지나도록 잊은 없는 시원한 바디 위시향이 끝에 맴돌자, 사카구치는 진짜로 그인 것을 깨달았다. 만일 꿈이라도 일찍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자신을 끌어안고 잠이 오다의 가슴팍에 기대 다시금 눈을 감았다. 

                                                             

 

***

 

안고. 이제 아침이다만. 아까 깨우지 않았나.”

행복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함과 잠시, 다시금 들려오는 오다의 목소리에 사카구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것인지, 앞치마를 입고 침대 옆에서 자신을 깨우던 오다의 얼굴을 더듬어보던 사카구치는 당신이 여기 있는 겁니까…?’라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오다는 사카구치가 사색이 얼굴로 자신에게 묻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여기우리 집이지 않나?’라고 대꾸하며 어서 밥을 먹자고 그를 재촉했다. 역시 너무 열심히 당신만 생각하고 살아서 신이 선물이라도 걸까요. 속으로 삼킨 질문을 차마 그에게 물을 없었다. 사카구치는 오다가 뜨겁게 내린 커피를 건넬 때도, 토스트를 구워 버터를 발라 때도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자이군의 지독한 장난이 아닐까 생각하던 그였지만, 그에게도 오다는 가벼운 사항이 아니었기에 금방 의심을 접었다. 오다는 평소와 다르게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카구치의 시선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것인지, 식빵을 우물거리며 오늘은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라고 물었다. 사카구치는 의외의 질문에 시선을 떨어트리며 커피를 식혀가며 홀짝였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제 다시는 그를 없다면 함께 하고 싶은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그의 대답을 기다려주던 오다는, 반쯤 그의 커피잔에 평소 그의 취향대로 각설탕을 하나 떨어트렸다.

사쿠노스케씨가 작업하는 하루 종일 구경하게 해주십쇼.”

터무니 없는 사카구치의 대답에 하루 종일? 그거 위험한데.’라고 답한 오다는 토스터기에 다시 식빵 두 개를 넣었다. 의외의 대답에 뭐가 말입니까?’라고 반문한 사카구치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는 빤히 바라보았다.

안고 네가 작업하는 보는 날은 작업은 하나도 못하고 마지막은 침대로 가 버리게 되니까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도 거의 끝내놓았으니 상관은 없겠지.’ 사카구치는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하며 아무렇지 않아하는 오다의 모습에 그의 몫까지 얼굴을 붉혔다. 사카구치는 못하는 말이 없어조용히 해요.’라고 대꾸해버리고는 남은 커피를 홀짝거렸다. 간단히 챙긴 아침을 뒤로하고, 다시 내린 커피를 가지고 오다가 작업을 하는 서재로 향했다. 오다의 작업은 딱히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단순했다. 그저 그가 담아둔 감정을 원고지에 쏟아내는 것이랄까. 사각거리는 만년필소리와 단정한 그의 글씨가 원고지를 채워 나가는 것이 보기 즐거웠다. 사카구치는 집중하고 있는 오다의 모습을 한시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 빤히 바라보았다. 평생을 그리워할 모습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터무니 없는 일로 다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카구치는 흘렸던 눈물이 많아서인지 눈물은 이상 흐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저녁은 카레가 어떤지 물었다. 오다는 마음에 든다는 옅은 미소를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잉크가 조금씩 번져 까맣게 변하는 , 다음 장으로 넘겨 흐트러진 원고지, 그리고 집중하고 있는 진지한 눈빛. 그 와중에도 간간히 고개를 들어 사카구치와 눈을 마주하며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어주는 통에 사카구치는 고개를 저으며 열심히 하십쇼. 이대로도 충분히 즐겁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시간 동안 서로에게 매진한 것일까. 요코하마 앞바다가 조그맣게 보이는 너머로 노을이 져갔다.

배고프지 않나, 안고.”

늦은 아침을 먹어서인지 건너 점심 걱정을 하던 오다의 말에도 고개를 젓던 사카구치는 이게 좋아요. 사쿠노스케씨 보고 싶으니까.’라고 말하며 컵을 손에 쥐었다. 오다는 나는 어디 가지 않는다만.’이라 대꾸하며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사카구치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평소와는 다른 사카구치를 걱정하던 오다는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그에게 물었다. 사카구치는 머리를 쓰다듬는 오다의 손을 끌어내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손에 뺨을 부볐다. 오다는 그런 그의 반응에도 아무런 없이 그를 쓰다듬어주며 자신의 맞은 편에 앉은 그를 안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사쿠노스케씨. 당신이 없이 제가 어떻게 살죠.”

그가 떠난 , 1 간을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했다. 일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생활 조차 힘들 정도로 병들어갔다. 당신을 잊어볼까 생각이라도 참이면 당신의 기일이 돌아왔고, 나는 울지 않을 없었는데. 차마 쏟아낼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통에, 사카구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메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갈 새라 말을 멈춘 그는, 그대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얕게 떨리는 사카구치의 어깨를 끌어안아주던 오다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그저 그를 토닥여 주기만을 반복했다.

나는네가 나를 잊고 새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게 쉽지만은 않겠지. 나도 불가능 같다.”

네가 없는 아침은 있을 없을 같으니까.’ 눈물을 참아내느라 새빨개진 사카구치의 얼굴을 쓸어주던 오다는 고개를 숙여버리는 그의 행동에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허리를 끌어안은 오다는, 그의 귀에 속삭이듯 달래주며 붉어진 뺨에 입맞춰주었다. 

그래도자주 올 거다. 네가 보고 싶다고 한다면 올 테니까.  너무 많이 울지 말고그저 계절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려줬으면 좋겠군.”

네가 매일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사카구치는 자신을 달래는 그의 목소리에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그를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다시 눈을 마주치면 꿈이 깨버릴 까봐, 정말로 일어났을 때는 축축하게 젖은 베개만이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아있을까 겁이 그는, 그저 그가 어디로 가지 못하게 안고 있을 밖에 없었다.

 

posted by 송화우연

사카구치 안고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정시 퇴근에 어색하게 집으로 들어섰다. 작년에도 이런 정시 퇴근은 딱 한 번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낸 그는, 오다가 즐겨 사오던 감자와 고기를 식탁위에 올려두고 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

“야채를 먹기 좋게 썬다...”

메모지의 첫 번째 문장을 그대로 읽은 그는, 냉장고 안에서 당근을 꺼내고 막 사온 감자를 물에 씻어내었다. 덕지덕지 묻어있던 흙들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것을 보던 그는, 바로 얼마 전에 나카하라가 알려준 대로 감자 껍데기를 벗겨내었다. 평소에 해왔던 일이 아닌 만큼, 그의 손놀림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카레를 누구보다 즐겨먹는 오다나, 요리를 꽤나 하는 나카하라만큼 능숙하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감자를 깎아야할까 생각해보던 그는, 손끝을 빗겨나간 감자 칼의 섬뜩함에 다시 감자를 깎는 일에 집중했다. 모난 곳도 전부 처리한 감자와 당근을 바라보던 그는 관리가 잘 된 나무 도마와 칼을 꺼냈다. 평소 오다가 자주 요리하던 카레에는 큼직한 당근이 주였지만, 사카구치는 조금 더 작은 편이 먹기 편했다. 손이 다치지 않게 손가락을 주먹을 쥐듯 모은 그는, 천천히 당근을 썰어가며 규칙적이게 도마를 내리치는 칼의 소리가 유지되도록 노력했다. 둔탁하게 부딪히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소리였다. 요리는 항상 오다가 해서인지 그에게 이렇게 가까이 들릴 일이 없던 소리지만, 가까이에서 듣는 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에 써는 양파는, 눈이 맵기 전에 써는 게 좋다는 말을 오다에게 여러 번 들었었다. 하지만 칼을 거의 처음 잡아보는 사카구치에게는 역부족이었으리라. 눈에 그대로 와 닿는 매운 내가 참기 힘든지, 눈물을 그렁거리며 눈가를 훔치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양파를 써는 것을 멈추었다. 흐를 듯 말듯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을 훔치던 사카구치는 다시 칼을 고쳐 잡고 아까보다 빠르게 양파를 썰어버렸다. 모양은 엉망이었지만, 사카구치에게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후... 당신 말대로 양파를 빨리 썰려면 일단 써는 법이라도 쉬는 날 연습해둬야겠네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 그는, 오목하게 파인 팬을 가져와 버터를 녹였다. 적당히 뜨거운 온도에 버터가 거의 녹아가자 고소한 냄새가 점점 퍼졌다. 사카구치는 기름처럼 흐르게 되었을 때, 양파를 먼저 넣고 주걱으로 볶기 시작했다. 타거나 눌러 붙지 않게 이리저리 볶던 그는, 양파가 숨이 죽어 먹음직스러운 금빛이 되자 감자와 당근을 넣고 버터를 한 숟갈 더 넣었다. 버터와 양파향이 섞인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 어쩔 수 없이 군침이 돌게 된다는 그의 말이 와 닿는 순간이었다. 사카구치는 아까보다는 천천히 주걱으로 채소를 뒤적거리며 익혀갔다. 채소가 반쯤 익었을까. 오다가 하던 대로 물을 조금 부어넣은 사카구치는, 치킨 스톡을 팬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채소를 더 푹 익히려는 것이겠지만, 이제 진짜로 카레를 끓일 준비를 하려는 듯 냄비를 꺼냈다. 사카구치는 냄비에도 버터를 먼저 녹인 뒤, 고기를 넣어 볶기 시작했다. 오다가 요리를 할 때도 버터를 이만큼씩 넣었던가 생각해보던 사카구치는, 그래서 자신을 부엌에 오지 못하게 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고기는 생각보다 빨리 익었고, 사카구치는 팬에서 끓고 있는 채소와 육수를 그대로 냄비로 부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채소들을 바라보던 그는, 물과 고형 카레를 냄비에 넣고 불의 세기를 더 올렸다. 금방 녹아사라진 카레를 멍하니 바라보던 사카구치는 점점 풍겨오는 카레냄새가 성공적이라는 생각에 미소를 띤 채로 안을 저어대었다. 오다의 솜씨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배운 만큼은 해냈다는 생각에 안도한 그는, 고형카레가 다 풀어진지 확인하고는 뚜껑을 닫았다. 조금만 더 끓이면 자신이 했던 음식들 중 가장 성공적인 카레가 완성된다는 생각에 신이 나는지, 평소에는 부르지도 않을 콧노래를 소심하게 흥얼거리며 그릇을 꺼냈다. 이 주방을 자주 쓰던 오다가 듣던 노래였던가, 노래 제목을 기억해보던 그는 가물가물한 제목을 나중에 검색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국자로 다시 카레를 젓기 시작했다. 그릇에 담긴 카레는 요 근래 보았던 음식들 중에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물론 스스로의 요리라는 것에 조금 더 점수를 얹어준 것이었지만, 오다가 이것을 보더라도 같은 말을 할 거라 생각하던 사카구치는 피식 웃으며 2인용 식탁 양쪽에 카레를 놓았다. 식기도 가지런히 놓은 그는,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듯 누군가를 데리러 가기라도 하는 듯 방으로 향했다.

“작년에는 망쳤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저번 때보다 솜씨가 늘었습니다.”

‘당신이 봐도 맛있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물론 당신은 제가 만든 거라면 다 먹어주겠지만요.’ 조곤조곤 말을 걸며 나오던 사카구치는, 자신의 자리 맞은편에 작은 액자를 놓았다. 제사를 지내는 듯한 엄숙함은 없었다. 누군가라도 있다는 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사카구치는 카레가 식겠다며 숟가락을 들었다. 맞은편에 보이는 오다는 어서 식기 전에 먹으라는 듯이 미소를 띠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레를 휘휘 저어보던 사카구치는 ‘그래도 당신이 만든 카레가 더 맛있는 게 당연하잖아요...’라고 중얼거리며 보슬보슬하게 익은 감자를 입에 넣었다.

“다음번에는 저도 안 지도록 더 연습해오겠습니다.”

‘일 년에 단 한번뿐인 정시퇴근을 노려서 말이죠.’너털웃음을 지으며 액자를 바라보던 그는, 카레를 다시 한입 먹으며 변함없는 그의 표정만을 응시했다.

posted by 송화우연